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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말티재

어느새 몸 오싹하게 아침공기가 싸늘하다. 법주사 입구 오리숲길은 겨울 같은 느낌. 이 알싸한 느낌이 좋다. 정신이 맑다. 이 청량한 숲길은 월정사 숲길과 더불어 가장 힐링이 되는 길이다. 오늘은 이 길이 아니라 법주사로 들어가는 관문, 말티재가 목적지다. 함양의 지안재 흑산도의 열두구비길과 더불어 3대 구불길이다. 이라는 테마로 포스팅하지만 전망대에 올라 내려다보는 뷰 말고는 그닥 볼 건 없다. 전망대도 최근에야 생겼으니 그 전에는 길이 구불거린다는 것만 짐작할 뿐 그것을 눈으로 보지는 못했다. 오르내리는 차들만 힘겨울 뿐이었다. 지금도 역시 운전하기 난감한 열구비 꼬부랑길이다. 걷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길이 ‘아름다운 길’이고 말티재는 한 장의 사진이 아름다운 길이다. 고갯마루에에 만발한 가을꽃들이 선연..

선운사 꽃무릇을

이태 전 가을 이맘때 영광 불갑사의 꽃무릇을 보았지요. 불타듯 빨간 촛불들을 난생 처음 대했습니다. 그 강렬한 충격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올해는 고창 선운사를 갔습니다. 선운사의 꽃무릇이야 워낙 유명한 곳이니 두말할 필요 없으리라 짐작은 했었지만 실제로 본 그곳 꽃무릇은 참말 장관이었습니다. 국내 최대 규모라고 해요. 과연 불갑사의 꽃무릇을 본 눈에 선운사의 그것은 또한 뭐라 표현할 수 없어 후기를 쓰기가 난감합니다. ‘꼭 사람이 활활 불길 위를 걷는 것 같아’ 지인에게 보낸 이 한 줄 문자가 내가 끄집어낼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이었고 지금 보니 나름 적절하고 괜찮은 소감인 것 같습니다. 눈가는 대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 여러 장 담아와 풀어 놓으니 만족할만하게 사진들이 잘 나왔습니다. 어쭙잖은 후기는 ..

지금은 메밀꽃 질 무렵

이효석의 소설을 다시 읽어 본다. 겨우 4장 분량 정도의 짧은 소설이지만 읽을 때마다 전에 못 보았던 문장이나 구절이 새록새록 발견된다. 장돌뱅이 허생원이 청주 사람이면서도 늘 평창과 그 일대의 장을 돌아다닌 이유가 있었다.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의 아름다운 강산이 그대로 그에게 그리운 고향이었다" 직업으로서의 숙명의 길이 아닌 여행의 길로 강원도의 산천을 택한 것 같다. 언제부턴가 도보여행에 대한 현대인들의 인식이 새롭게 변했는데 허생원은 이미 그때 ‘길 위의 여행’을 즐겼던 것 같다. 메밀은 예전에 가난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렇다 할 땅뙈기 없는 강원도 산골의 무지렁이들이 평생 가난을 벗지 못하고 땅에 엎디어 심어 먹은 게 그저 감자요 옥시기요 메밀이었다. 척박한 자드락 돌밭에서 거둘 수 있는 건 ..

들길 따라서 비내섬

여긴 비내섬이예요. 섬이라고 해서 웅숭깊은 대양 가운데의 거창한 그런 섬이 아니고 유장하게 흐르는 남한강 어느 물굽이에 하나 떠 있는 평범한 작은 섬입니다. 주말이면 어디로든 가방 메고 떠나곤 하지만 가끔 정한 데가 없거나 혹은 왠지 움직이는 게 귀찮아져 아무 것도 안하고 멍때리고 싶을 때가 있지요. 그럴 때 찾곤 하는 충주의 섬입니다. 집에서 멀지 않아 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라떼커피 사들고는 하루종일 쉬다 오는 곳입니다. 전혀 인공의 손길이 가지 않은 곳. 그래서 세련되고 고상한 걸 좋아하는 보통의 사람들은 오지 않는 곳입니다. 작은 섬이라고 했지만 한바퀴 돌아보는 데 두 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산책도 하다가 풀숲에 앉아 벽공을 보며 오랫동안 멍때리기도 하고, 들고간 책을 읽기도 합니다. 그..

안성 해바라기

해바라기의 계절. 1983년이었던가. 소피아 로렌 주연의 영화 를 보았다. 이미 전성기가 한참 지난 옛날 배우를 개봉관에서 보다니. 기실 70년에 제작상영했던 영화를 나중에 재개봉한 거였다. 소피아 로렌 특유의 무표정 연기는 정말 좋았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건 역시 광활한 해바라기 들판이다. 그것은 흔히 우리가 아는 노란색이 아닌 우크라이나의 오렌지빛 해바라기다. 거대한 바람이 들판을 휩쓸며 지나갈 때 일렁이던 해바라기의 물결. 그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돈값(?)을 했던. 우리나라에는 그런 광활한 해바라기밭이 없다. 그리 크게 농사를 지을 리가 없다. 다만 볼거리 차원에서 가꾸는 해바라기 명소들이 있다. 안성 팜랜드. 역시 보기는 아름답지만 영화에서 느끼는 광활..

경산 반곡지 그리고 천도복숭아

찍사들의 출사지로 각광받고 있는 경산 반곡지. 단 한 커트의 사진을 위한 방문은 그럴싸 하지만 여행지로서의 가성비는 좀 떨어지는 듯. 인터넷상의 사진들은 아주 멋지다. 사철이 다르고 하루 시간별로도 그 풍경의 느낌이 다르니 사진가의 시선에 따라 그 감성도 다양하다. 하지만 찍는 포인트는 대동소이다. 못의 규모가 크지 않으니 다양하지 못하다. 봄철의 복사꽃 풍광이 아름답고 해질 무렵의 노을 풍광, 그리고 이름 아침의 물안개 풍광 등이 근사하다. 이것들 대부분의 포인트가 단 하나 복숭아 과수원에서 건너다보는 왕버들과 수면의 반영이다. 폭우가 쏟아지고 왜바람이 심하던 여름날의 반곡지. 사위가 어두컴컴하니 여타 사진들에서 보는 근사한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습도 어둠, 그리고 우산이 찢길 듯 거센 비바람에 영상..

대프리카 근대路의 여행

내게는 덥다는 이미지로만 각인된 도시 대구. 대도시지만 이렇다 할 명소가 없어 부러 찾아가게 되지는 않는 도시. 규모 큰 약령시장이 있어 그나마 찾게 되는 거리. 근래 근대골목투어의 여행지로 한창 부상하고 있다. 대구 중구는 ‘근대路의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골목투어를 운영하고 있다. 골목투어는 걸어서만 가는 여행이다. 차나 비행기로는 갈 수 없다. 그래도 이런 여행은 도보가 차보다 빠르다. 동산선교사 주택은 제중원(현 동산의료원)과 교회를 설립한 선교사들이 살던 곳으로 현재 스윗즈주택(선교박물관), 블레어주택(역사박물관), 챔니스주택(의료박물관) 등이 남아 있다. 동산(東山)은 달성토성의 동쪽에 있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대구에는 이외에도 단순한 지명이 많다. 도심 앞에 있는 ‘앞산', 대구읍성 동쪽의..

이슬라 보니따 선유도

태양이 강렬한 8월. 산천초목, 그리고 사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운도 가장 강렬하게 발산하는 계절. 사람의 일생으로 쳐도 절정으로 치달아 가장 빛나는 시절이다. 그 절정을 넘어서면 서서히 조락이다. 원치 않지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우주 삼라만상의 섭리. 이 계절이 스러지기 전에 우리는 그것을 누려야 조금이라도 덜 억울하겠지. 섬은 그야말로 절정의 태양빛이 작렬하고 있었다. 덥기도 덥지만 그래서 아름다운 여름, 그리고 섬, 바다. 진정으로 여름을 누리려거든 섬으로 가자. 뜨거운 빛이 무작스레 쏟아지는 곳. 이 길을 처음 왔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이 길고 지루한 이 길 새만금방조제. 방조제에서 보이는 신시도 무녀도 선유도 장자도 대장도의 고군산열도. 무언가 베일에 가려져 있는 듯한 신비한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