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한국의 아름다운 길 156

화양구곡에 내리는 비

괴산 화양구곡입니다.몇 년 전 한번 가보긴 했지만 나뭇가지에 눈도 틔지 않은 3월이라 계곡은 메마르고 쌀쌀했었습니다.여기 여름 숲은 어떨까 궁금해하면서도 가까운 곳이라는 안일함으로 이후 한번도 가보지 않았어요. 더 먼 곳 충주로 옮기고 나서야 비로소 찾아봅니다.여름 끝자락이라지만 숲의 초록은 한참 더 지나야 퇴색합니다. 곧 비 뿌릴 것 같이 하늘이 낮게 내려앉아 있습니다.뽀얀 이내가 서리고 습기 가득해 역시나 무더운 날입니다.소나기 한바탕 내렸으면 좋겠는 습윤한 숲입니다.   명산은 명산이라 속리산에서 내려온 계곡의 수려함이 명불허전입니다.겨울의 적막도 말할 것 없고 여름의 무성함도 역시 좋습니다.혼자 걷는 길도 고적하지 않고 풍성합니다. 평일인데다 날도 궂은데 구곡으로 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동강 그리고 칠족령

오래전에,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동강댐 건설이 기획 단계에서 백지화되었다.가끔 동강 길을 갈 때마다 얼마나 그게 잘한 결정인지 절감하곤 한다. 세상이 파괴의 시대에 들었어도 이 강은 여전히 태초의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내가 정선에 살 때만 해도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오지였는데 지금은 래프팅을 비롯해 전국에서 트레킹족들이 많이 찾아오는 동경의 땅이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그나마 환경이 덜 훼손된 우리 최후의 오지로 남았으니지나고 생각하면 동강댐 건설계획은 엄청난 파괴의 음모였다.  칠족령을 올랐다.문희마을 쪽에서 백룡동굴을 지나 오르는 코스가 있어 보통은 그리로 드나들지만 나는 연포마을을 들러 그 너머 반대쪽으로 올랐다. 아찔한 뼝대 위 벼룻길을 걷는다는 건 탐험의 길을 나선 모험가처럼 가슴 떨리는..

무주 구천동 어사길

더워요. 이젠 본격적으로 한여름입니다. 숲의 녹음도 검푸르게 짙어져 갑니다.여름은 역시 이 우거진 숲을 향한 동경이 커지는 철입니다.             무주 구천동계곡. 계곡을 끼고 백련사까지 들어가는 트레킹 길을 걷습니다.‘어사길’이라고 하네요. 방방곡곡 어딜 가나 무슨 무슨 이름 붙인 길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여긴 어느 소설에서 박문수가 지나갔다고 해서 지었나 본데 그런 거 별 의미는 없습니다.김호중이 걸으면 ‘김호중길’이 되기도 하니까.  어쨌든 ‘무주구천동’ 하면 예전부터 워낙 명성 높은 계곡이라 그 수려함은 말할 게 없습니다.우거진 숲에, 무엇보다 계곡을 흘러내리는 물이 이곳의 절경입니다. 길은 시종 물길에서 한번도 멀어지지 않아 내내 물소리 청아하니 심신이 치유되는 느낌입니다. 한동안 가물..

오지로의 여행, 정선 덕우리

어천은 깊은 산골을 굽이굽이 돌아 조양강으로 흘러들고조양강은 굽이굽이 돌아 흘러 동강이 된다. 어천이 지나는 정선 덕우리 일대는 지금도 오지에 속한다.그만큼 자연경관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그 장남인 이황이 이곳으로 유배되었다고 하니 그때는 오죽했을까.제주도 추자도 등 절해고도만큼 깊은 오지였을 걸 미루어 짐작하겠다. 정선에 십 몇 년을 살면서도 인근인 이곳을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내가 사는 곳이 오지였으니 굳이 인근 오지를 갈 일이 없었다.에전엔 전기가 들어오는지가 오지를 정하는 기준이었는데 지금은 전기 안 들어오는 마을이 거의 없다.전기가 있어도 이 덕우리 마을은 여전히 오지라 하기에 충분하다.     근래 이곳이 유명해진 건 원빈의 결혼식과 삼시 세..

울진 왕피천은어길

은어라면 섬진강이지만 울진 왕피천도 은어 서식지다.은어를 보지는 못하였다.나는 은어를 보러 간 게 아니니 상관없다. 왕피천이 지나는 구산리 구간의 천변에 이색 트레킹 길이 있다고 하여 궁금했다. 왕피천은어길. 또는 '봇도랑길'이라는 이름이다. 봇도랑은 논에 물을 대기 위한 물길이다.천변에 시멘트로 봇도랑 형태의 길을 만들었다.그 흔한 나무데크길을 지양하려는 발상인 것 같다.  하안단구처럼 수려한 경관은 아니지만 아직도 원시 생태로 남아 있는 보배로운 하천이다.이곳에 관광객을 끌어들이려 뻘짓을 하고 있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만 나 역시 그들의 홍보에 혹해서 다녀온 사람이니 비난할 처지는 아니다.           고요하고 한적한 풍경이다. 곳곳에 핀 야생화, 서덜과 모래톱, 웅숭 깊은 녹색 소와 웅덩이들..

[골목투어 충주] 비 오는 날은 수채화

밖이 수선스럽기에 창을 열어 보니 활짝 벙근 모과꽃이 함초롬히 비를 맞고 있다. 연한 새순 돋을 때 보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느새 저토록 무성한 잎새에다 꽃이 피어 있는 것이다. 한동안 가물어 대기가 부옇더니 이제 말끔해졌을 것이다. 오늘 같은 비 오는 날은 그냥 동네 골목이나 한번 걸어볼 요량으로 우산을 받쳐 들고 나섰다. 문을 나서면 바로 사이길, 즉 ‘사과나무 이야기 길’이다. 몇몇 지역과 더불어 충주는 사과의 명산지다. 사과를 테마로 하여 내가 사는 골목을 포함한 산책길이 있다. 이곳으로 이사하고 꽤 여러 날이 지났지만 오늘에야 처음 나서는 길이다. 1912년 지금의 용운사 근처에 몇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은 게 충주 사과의 시작이라 한다. 계단 끝 두 그루 모형 사과나무에서 ‘사이길’ 산책을..

충주 호암지

집 가까이 호암지가 있다. 심심하거나 문득 문밖이 궁금할 때 산책하기 좋은 호수인데 원래 사람 심리가 가까운 곳은 잘 안 가게 된다. 충주 와서 처음 나섰던 날엔 반바퀴도 안 돌고 들어왔다. 날이 많이 풀린 봄날이라 정말 가볍게 대충 입고 나갔더니 바람 불고 쌀쌀하게 추워 그만 돌아왔다. 짜장 봄이 무르익은 4월 11일 여유롭게 호암지를 돌았다. 봄에 볼 수 있는 모든 꽃이 다 있다. 이것도 벚꽃인 것 같은데 꽃잎이 다르게 생겼다. 이것도 벚꽃인 것 같다. 한과처럼 생긴 총상화서인데 자세히 보면 수많은 꽃송이가 한 자루에 다닥다닥 붙었다. 특이한 벚나무다. 맑은 날에 오세요 그대 푸름 모아둔 호수 수면 가득 하늘 비치는 맑은 날에 오세요 그대 제일 화사한 오늘처럼 발걸음 가벼운 날 꽃같은 그대 늘 봄처럼..

수원 황구지천의 벚꽃

예전에, 지방민들의 선망 동경 중 하나가 ‘창경원 벚꽃구경’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벚꽃놀이 상춘은 역사가 제법 오래됐다. 벚나무가 언제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1936년에 발표된 김유정의 이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인파 넘실대는 벚꽃놀이에 나선 세 아가씨들의 풋풋한 설렘과 정경이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심쿵한 기분으로 읽은 기억이 있다. 일제시대에도 벚꽃놀이는 우리들의 선망하는 봄문화였던 것 같다. 야앵(夜櫻)은 밤벚꽃의 한자어다. 벚꽃놀이 정경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창경원 벚꽃이 어땠는지 나는 사진조차 한 장 본 적 없다. 지금은 봄철이면 온통 벚꽃 천지다. 전국 어디든 벚꽃명소 아닌 데가 없다. 내 방 창문을 열어도 거기 하얀 꽃잎이다. 그렇더라도 사람들이 꼽는 명소가 있긴..

임실 천담에서 구담까지 섬진강변

천담교를 건너면 천담마을이고 여기서부터 왼쪽으로 섬진강을 끼고 약 3키로미터 걸어가면 구담마을이다. 평범한 시골 강마을이지만 1년에 한때 아름다운 풍경이 되는 곳이다. 길가에 매실나무가 늘어서 있어 매화가 절정일 때 아름다운 길이다. 구담마을은 영화 촬영지라고 한다. 내가 간 때는 매화가 하롱하롱 지고 있어 절정의 풍광은 지나 있었다. 그래도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섬진강의 풍광과 따스한 봄이 주는 느낌이 평화롭고 안온했다. 아주 깡촌이지만 아늑한 분위기의 마을이라 이곳서 한번 살아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대는 닥나무가 많아 예전엔 종이 만드는 작업장들이 많았다고 한다. 강변 언덕마다 솥을 걸어 놓고 한 때는 호황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그 터가 남아 있다. 천담마을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삼진강..

부산 초량동 이바구길

초량동 이바구길 기차에서 내려 부산역 광장을 지나 길을 건너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거대도시 부산의 정체를 볼 수 있다. 거미줄처럼 어지러이 난 좁은 골목길. 이곳 사람들의 숙명 같은 계단과 미로, 그리고 아프지 않은 옛 기억들이 고스란히 앉아들 있다.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 방금 지나온 부산역은 최첨단 기술과 예술의 복합공간이 되었지만 '한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잣집이여...' 이 언덕배기는 여전히 개항기 때의 정경으로 남아 있다, 다만 판자가 아닌 번듯한 콘크리트집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라는 이름의 테마길. 조금만 걸어도 숨을 헐떡이는 가파른 골목길들을 허위허위 톺아 보았다. 남선창고 구 백제병원 담장갤러리 초량초등학교 초량교회 168계단 산복도로전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