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꽃이 만발한 봄날도 단풍이 새빨갛게 물든 가을날도 별 감흥없이 심상하게 맞곤 했다.
봄인가보다, 가을이네. 그저 그거였다.
오히려 이제 이만큼 나이 먹다 보니 계절의 변화에 민감해지고 센티멘털해진다.
단풍은 언제쯤 절정일까 일기예보에 집중하기도 하고 이번 주를 놓치면 이 가을을 영영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조바심도 갈마든다.
내게 남은 가을이 소년시절 적처럼 하 많이 남아있는 게 아니라는 무의식의 조급증임을 안다.
그러니 이 귀중한 가을을 예전처럼 허투루 보내고 말 수는 없는 절박함이기도 하다.
독립기념관의 단풍숲길이 핫플레이스로 각광받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예의 언제쯤 단풍이 들까 노상 검색하다가 정한 날이 11월 6일이었다.
혼자 가도 좋지만 카페에 정기적으로 깃발을 드는 입장이니 이걸로 스케줄을 잡아도 좋겠다는 생각에 공지를 올렸다.
공지 올리면서 막연하게 예상은 했다. 오가는 거리가 좀 멀어 선뜻 나서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집에서 가까운 곳이니 좀은 내 편의대로 설정한 것 같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렇다고 취소를 하거나 스케줄을 바꾸기는 또 할 수 없으니 애초 의도대로 혼자 다녀오면 되겠구나.
해서 아침에 백신주사를 맞고 여유롭게 천안으로 떠나왔다. 너무 여유를 부렸나 보다.
과연 단풍의 절정기라 인산인해다. 위드코로나의 첫 주말이니 얼마나 다들 나오고 싶었을까.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길도 밀리고 저녁에 나올 때도 역시 그랬다.
그러고 보면 오늘 참가자가 없길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을 테고 인파에 밀려 일정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단풍객들 속에서 제법 여유롭게 가을을 본다.
여럿이었다면 보지 못했을 풍경들을 혼자서는 보는 경우가 많다.
일장일단.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고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게 되는 게 생활의 속성임을.
독립기념관의 단풍은 그야말로 절정인데 예년의 새틋한 빛에는 많이 미치지 못해 그게 옥의티라고 할까.
여기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단풍잎들이 다 그렇다고 하니 일말의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그래도 역시 가을은 가을이라 지천의 단풍잎들이 내뿜는 어마어마한 아우라는 차마 표현 못하게 센슈얼하다.
단풍 반 사람 반.
이제 코로나블루에서 해방된 것일까. 진정한 해방은 아니지만 이만큼이라도 얼마나 고마운지.
우리가 일제에서 해방됐다고 만세 부른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현상황은 완전한 해방이 아니듯이.
독립기념관 겨레의집 기둥에 기대서서 잠시 독립, 그리고 자유란 걸 생각했다.
계단 아래 드넓게 펼쳐진 광장에는 가을빛이 형형하고 오가는 사람들은 너마다 폰을 꺼내들고 사진들을 찍는다.
마스크에 가려진 얼굴이지만 그 안의 홀가분한 해사한 표정들을 훤히 짐작한다.
전에는 별것도 아니었던 것이 이리도 소중함이야.
광장뿐 아니고 건물 옆댕이 집터서리에도, 키작은 나무의 그늘 아래에도, 사람들의 발밑에도 속속들이 온통 가을이다.
인간사는 완벽하지 못하지만 자연은 언제나 이처럼 완벽하다.
이렇게 해서 또 하나의 가을을 맞고 보내고.
내년 가을에도 난 또 못견디는 애절함으로 무언가를 찾아 다니게 되겠지.
내가 때를 아주 적절하게 잘 잡았다.단풍의 절정기였다.다만 주말이라 인파가 너무 많아 오롯이 고즈넉한 산책이 아니어서 좀.평일에 갔으면 금상첨화일텐데 직장인의 여건이 또 그렇지 않으니 그래도 괜찮다.
독립기념관 단풍나무 숲길은 3.2km라고 한다.내가 아는 단풍 명소 중 손가락에 꼽을 만한 멋진 길이다.내년에 또 가고 싶은.
바비 골즈 보로 :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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