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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메밀꽃 질 무렵

이효석의 소설을 다시 읽어 본다. 겨우 4장 분량 정도의 짧은 소설이지만 읽을 때마다 전에 못 보았던 문장이나 구절이 새록새록 발견된다. 장돌뱅이 허생원이 청주 사람이면서도 늘 평창과 그 일대의 장을 돌아다닌 이유가 있었다.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의 아름다운 강산이 그대로 그에게 그리운 고향이었다" 직업으로서의 숙명의 길이 아닌 여행의 길로 강원도의 산천을 택한 것 같다. 언제부턴가 도보여행에 대한 현대인들의 인식이 새롭게 변했는데 허생원은 이미 그때 ‘길 위의 여행’을 즐겼던 것 같다. 메밀은 예전에 가난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렇다 할 땅뙈기 없는 강원도 산골의 무지렁이들이 평생 가난을 벗지 못하고 땅에 엎디어 심어 먹은 게 그저 감자요 옥시기요 메밀이었다. 척박한 자드락 돌밭에서 거둘 수 있는 건 ..

들길 따라서 비내섬

여긴 비내섬이예요. 섬이라고 해서 웅숭깊은 대양 가운데의 거창한 그런 섬이 아니고 유장하게 흐르는 남한강 어느 물굽이에 하나 떠 있는 평범한 작은 섬입니다. 주말이면 어디로든 가방 메고 떠나곤 하지만 가끔 정한 데가 없거나 혹은 왠지 움직이는 게 귀찮아져 아무 것도 안하고 멍때리고 싶을 때가 있지요. 그럴 때 찾곤 하는 충주의 섬입니다. 집에서 멀지 않아 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라떼커피 사들고는 하루종일 쉬다 오는 곳입니다. 전혀 인공의 손길이 가지 않은 곳. 그래서 세련되고 고상한 걸 좋아하는 보통의 사람들은 오지 않는 곳입니다. 작은 섬이라고 했지만 한바퀴 돌아보는 데 두 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산책도 하다가 풀숲에 앉아 벽공을 보며 오랫동안 멍때리기도 하고, 들고간 책을 읽기도 합니다. 그..

안성 해바라기

해바라기의 계절. 1983년이었던가. 소피아 로렌 주연의 영화 를 보았다. 이미 전성기가 한참 지난 옛날 배우를 개봉관에서 보다니. 기실 70년에 제작상영했던 영화를 나중에 재개봉한 거였다. 소피아 로렌 특유의 무표정 연기는 정말 좋았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건 역시 광활한 해바라기 들판이다. 그것은 흔히 우리가 아는 노란색이 아닌 우크라이나의 오렌지빛 해바라기다. 거대한 바람이 들판을 휩쓸며 지나갈 때 일렁이던 해바라기의 물결. 그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돈값(?)을 했던. 우리나라에는 그런 광활한 해바라기밭이 없다. 그리 크게 농사를 지을 리가 없다. 다만 볼거리 차원에서 가꾸는 해바라기 명소들이 있다. 안성 팜랜드. 역시 보기는 아름답지만 영화에서 느끼는 광활..

경산 반곡지 그리고 천도복숭아

찍사들의 출사지로 각광받고 있는 경산 반곡지. 단 한 커트의 사진을 위한 방문은 그럴싸 하지만 여행지로서의 가성비는 좀 떨어지는 듯. 인터넷상의 사진들은 아주 멋지다. 사철이 다르고 하루 시간별로도 그 풍경의 느낌이 다르니 사진가의 시선에 따라 그 감성도 다양하다. 하지만 찍는 포인트는 대동소이다. 못의 규모가 크지 않으니 다양하지 못하다. 봄철의 복사꽃 풍광이 아름답고 해질 무렵의 노을 풍광, 그리고 이름 아침의 물안개 풍광 등이 근사하다. 이것들 대부분의 포인트가 단 하나 복숭아 과수원에서 건너다보는 왕버들과 수면의 반영이다. 폭우가 쏟아지고 왜바람이 심하던 여름날의 반곡지. 사위가 어두컴컴하니 여타 사진들에서 보는 근사한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습도 어둠, 그리고 우산이 찢길 듯 거센 비바람에 영상..

대프리카 근대路의 여행

내게는 덥다는 이미지로만 각인된 도시 대구. 대도시지만 이렇다 할 명소가 없어 부러 찾아가게 되지는 않는 도시. 규모 큰 약령시장이 있어 그나마 찾게 되는 거리. 근래 근대골목투어의 여행지로 한창 부상하고 있다. 대구 중구는 ‘근대路의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골목투어를 운영하고 있다. 골목투어는 걸어서만 가는 여행이다. 차나 비행기로는 갈 수 없다. 그래도 이런 여행은 도보가 차보다 빠르다. 동산선교사 주택은 제중원(현 동산의료원)과 교회를 설립한 선교사들이 살던 곳으로 현재 스윗즈주택(선교박물관), 블레어주택(역사박물관), 챔니스주택(의료박물관) 등이 남아 있다. 동산(東山)은 달성토성의 동쪽에 있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대구에는 이외에도 단순한 지명이 많다. 도심 앞에 있는 ‘앞산', 대구읍성 동쪽의..

이슬라 보니따 선유도

태양이 강렬한 8월. 산천초목, 그리고 사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운도 가장 강렬하게 발산하는 계절. 사람의 일생으로 쳐도 절정으로 치달아 가장 빛나는 시절이다. 그 절정을 넘어서면 서서히 조락이다. 원치 않지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우주 삼라만상의 섭리. 이 계절이 스러지기 전에 우리는 그것을 누려야 조금이라도 덜 억울하겠지. 섬은 그야말로 절정의 태양빛이 작렬하고 있었다. 덥기도 덥지만 그래서 아름다운 여름, 그리고 섬, 바다. 진정으로 여름을 누리려거든 섬으로 가자. 뜨거운 빛이 무작스레 쏟아지는 곳. 이 길을 처음 왔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이 길고 지루한 이 길 새만금방조제. 방조제에서 보이는 신시도 무녀도 선유도 장자도 대장도의 고군산열도. 무언가 베일에 가려져 있는 듯한 신비한 느낌..

시간이 멈춘 마을 판교

판교다. 성남 판교 아니고 서천의 판교다. 옛 장항선이 경유하던 곳으로 충청도 3대 쇠전의 하나요 세모시장, 도토리묵시장으로 유명했지만 역시 세월 따라 쇠락했다. 서천군의 인구감소와 새 장항선의 직선화로 옛 판교역은 폐역이 되었고 새 판교역은 마을에서 뚝 떨어져 홀로 생뚱맞게 서 있다. 옛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은 그나마 과거의 영화를 추억하는 부스러기로 남아 있지만 자꾸만 낡아가는 이 건물들은 머지않아 짜장 부스러기 되어 풀썩 주저앉을 것이다. 판교극장. 지금도 시 아닌 군소재지에는 영화관이 없는 게 현실인데 이렇게 버젓한 극장 건물이 있었으니 과연 은성했던 판교의 옛날을 짐작할 수 있겠다. 나름의 생각이 있어 이 낡아가는 추억의 부스러기들을 그대로 놔두고 있을 테지. 대신 이라는 테마로 지..

명옥헌 원림의 배롱나무

매년 이맘때면 나 너를 찾아 문밖을 나서곤 하지. 굳이 어렵게 찾을 것 없이 너는 늘 저만치 가까운 곳에 서 있곤 하지. 낯익은 길가에, 또는 낯선 먼 이방의 길가에. 뉘집 담장너머에, 개울물 휘돌아 나간 산모롱이 야트막한 기스락에. 사사불공이요 처처불상이라. 어디든 있는 너야 말로 부처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너는 늘 나를 향해 웃고 있다. 나는 네가 날 보고 좋아서 웃는다고 착각하고 황홀해한다. 너는 내가 오금을 못 피게 치명적인 매력을 지녔고 나는 여름 한 철을 그 환락의 늪에 빠져 있곤 하지. 그렇다고 네게 그 어떤 것도 바라지는 않는다. 나처럼 너도 나를 사랑해 주길 원하는 것 더욱 아니다. 내가 저 산을 좋아한다고 해서 저 산도 나를 좋아하길 바랄 수는 없지 않은가. 너는 그저 그렇게 존재하는 ..

쌍용자동차의 모태를 찾아서

생뚱맞게도 쌍용자동차의 모태는 강원도 영월 궁벽진 산골이다. 제천 단양 영월 일대는 우리나라 최대의 석회석지대다. 영월 쌍룡리 마을에 처음 시멘트공장을 지어 굴지의 양회회사가 된 기업 이름이 그래서 쌍용시멘트. 이후 자동차회사를 인수하여 쌍용자동차가 되었다. 엄밀하게는 자동차와 쌍룡리는 관련이 없지만 그 핏줄을 따라 거슬러 오르면 바로 이곳이다. 정선 살 때, 38번 국도는 내가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었다. 쌍룡리는 국도변에 있는 마을이다. 이정표를 볼 때마다 한번 들러서 걸어 보고 싶었었다. 여전히 이곳은 활발하게 시멘트가 생산되고 있다. 궁벽한 촌이지만 무궁화열차가 하루 두 번씩, 왕복 네 차례나 들어왔다 나간다. 기차를 타고 이 역에 내리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나처럼 별 볼것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