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 곰탱이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되었다. 시간은 시나브로 흘러가 초목들은 스러지려는 준비들을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앉은 떡갈나무 고사목은 사철 잎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그 영속성이 좋아 늘 거기 올라앉아 시간을 보낸다. 나는 까마귀다. 오랫동안 숲의 동물들로부터 현자라는 칭송을.. 언니의 방 2016.07.21
스카프 5년 전의 일이다. 강원도의 한 촌락에서 이상한 여자를 접해 알게 되었는데 그 인연은 자꾸 곱씹어도 치욕적인 흉터로 남아 지금도 등이 스멀거린다. 나는 한때 꽤나 촉망받던 소설가였지만 어느 순간 글에 대한 회의가 들어 머리를 싸매고 번민하던 끝에 절필을 하기로 큰 용단을 내렸다.. 언니의 방 2015.11.16
깊어 가는 가을 (下) 따그르르르 가까운 곳에서 딱따구리가 오묘한 소리를 냈다. 정혜 스님의 목탁소리와도 같았다. 한번도 정혜 스님의 독경소리는 듣지 못했으나 목탁을 치는 소리는 두어 번 들었다. 뚜드락 뚜드락 딱 자냥하게 그 소리는 금강문을 넘고 일주문을 지나 안개 자욱한 숲으로 사라졌다. 목탁.. 언니의 방 2015.10.14
깊어 가는 가을 (中) 구름이 온통 새빨갰다. 뉘엿거리는 저녁놀을 보며 영묵과 젊은 여자는 저녁을 먹었다. “젊은 아저씨요! 정말 미안합니데이. 믿고 먼저 내리가니더. 봉정암서 또 보입시더.” 중년 여자와 그 남편은 그렇게 젊은 여자를 남겨 놓고 내려갔다. “외려 잘 됐네요. 오늘 산장서 푹 쉬시고 내일.. 언니의 방 2015.10.13
깊어 가는 가을 (上) 아무래도 그 젊은 여자가 마음에 걸렸다. 마지막 간힘을 들이며 영묵은 꼭뒤가 무거웠다. 대청봉을 코끝에 바라보면서도 여느 때 산 정상 직전에 느끼던 설렘이 없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곡풍이 산 밑에서 쉴 새 없이 올라왔다. 이제 대청봉에만 오르면 그녀들과는 이별이다. 사람 .. 언니의 방 2015.10.13
외등 그가 죽었다. 흐드러지게 화사했던 벚꽃도 차츰 그 화양연화의 청춘을 보내려고 하롱거리며 지고 있던 날 밤이었다. 외등에 목을 매 죽었다. 내 집 앞이었다.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대도 정황상 나는 사망자의 지인이었다. 경찰서에서 나는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았다. 경찰에 의하면 .. 언니의 방 2014.12.23
뒷내 마을의 해바라기와 거머리 오늘도 그녀가 토마토를 놓고 갔다. 비뚝비뚝 위태로워 보이게 혜영이가 걸어 나간, 문짝도 없이 설주기둥만 시늉으로 서 있는 대문을 바라보다가 영애는 후 한숨을 쉰다. 아무리 봐도 혜영이는 천생 여자다. 맘씨 곱지, 살림 싹싹하지, 살갗이 가무잡잡한 게 그 미목이야 누군들 이쁘다 .. 언니의 방 2014.09.10
남촌에서 1 남풍이 불어온다. 저 남쪽 바다 어디에선가 시작된 바람이 오추산을 넘어 그 마을 들판을 지나가고 있다. 훈풍에 맨 처음 눈을 뜬 것은 토담 옆 묵정밭의 냉이였다. 이어서 산비탈 양지쪽에서부터 노란 새싹이 돋기 시작했다. 논두렁에서도 싹이 돋았고, 얼음이 녹아 돌돌거리며 흐르는 .. 언니의 방 2014.02.11
우리 종수 양로원에 계시던 큰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장례를 보고 온 어머니가 영 기분이 없어 하면서 아랫목에 누워서는 연해 한숨을 내쉬었다. "흐유, 그렇게 허무한 게 사람 한살이지 뭐, 흐이구!" 내게 큰어머니는 딱 한 가지 모습으로만 남아 있었다. 내가 열한 살이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 언니의 방 2014.02.07
커피 한잔 진부한 연애 이야기 하나 들려 드릴까요? 이건 뭐 소설도 뭣도 아닌, 그냥 어느 시골 다방 금붕어 수족관 옆자리 우중충한 소파에 머리가 푹 파묻히게 비겨 앉아서는, 별로 재미있지도 않는 얘기에 깔깔대며 호들갑스러운 레지 아가씨의 허옇게 드러난 허벅지를 주무르며, 그래도 제 딴엔.. 언니의 방 2013.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