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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염의 꽃, 오동도 동백

어느 날 문득 꿈길인 듯 여수 앞바다 오동도가 빨간 꽃잎 터뜨리며 내 폐항으로 달려왔다. 김여정 중에서 허공에서 한 차례, 지상에서 한 차례. 두 삶을 치열하게 살고 가는 꽃. 나무에서의 화려한 생보다는 땅에 떨어진 처연함이 아름다워 보는 사람들에게 애잔한 슬픔을 주는 꽃, 동백. 지금 오동도는 그 슬픔이 절정이다. 새벽기차를 타고 와서 내리니 칠흑같은 밤. 시간이 남아 물소리 철썩대는 방파제를 소요하다 보니 먼바다에 벌겋게 동이 터 온다. 비로소 드러나는 오동도의 실루엣. 간밤에 떨어진 꽃송이들이 고스란히 내 차지가 된다. 인적이 뜸한 이른 시각이니 저렇지 관광객들이 밀려 들어오면 저 꽃송이들은 죄다 밟혀 뭉개져 버릴 것이다. 꽃의 운명이란 게 그런 게지. 너무 예쁘면 생이 평탄하지 않다는 진리. 어떻..

양평 용문사

아주 추운 날 용문사. 용문사의 상징 은행나무. 너무 커서 카메라에 다 안 잡힌다. 오지게도 춥다. 경내에 카페가 있어 코피 생각은 별로 없었지만 따뜻하게 몸 좀 녹이려고 들어갔더니. 안에서 드실 수 없다고 한다. 코로나 확진자가 연일 천 명을 넘기던 최악의 상황이어서 모든 카페가 테이크아웃만 허용되던 날들이었다. 쫓나서 한랭한 정원에 오도카니 서서 후루룩 털어 넣고 그대로 내려왔다. 아, 전염병의 시대여. 이 냉랭한 겨울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다른 계절에는 없는 이 판타지아.

삼다도 통신

꼭 목적지를 정하고 가지는 않습니다. 공항에 내리면서 그때 생각나는 곳이 여행지입니다. 제주는 내게 그런 곳입니다. 제주공항 출구로 나오니 관광홍보판에 노란 유채밭이 있습니다. 그렇지 마침 그 계절이니 저길 가보자. 폰 검색을 하니 산방산 유채꽃이 유명하다고 나옵니다. 유채밭 노랑. 노랑 노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 노랑입니다. 사진이나 TV로 볼 때는 대규모 유채밭으로 보였는데 막상 현지에 가니 그렇지는않네요. 내 유년시절에 시골집에서 누에를 키웠더랬습니다. 누에는 오로지 먹는 것이 생의 전부입니다. 밖의 세상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뽕잎만 깔아주면 잠가 밖으로 나갈 줄을 모릅니다. 유채밭의 관광객들이 흡사 잠가 안의 꼬물거리는 누에들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세상의 것은 관심 밖이고 오직 사진..

스튜어디스들이 키가 큰 이유

기종에 따라 어떤 비행기는 기내 선반이 좀 높다. 내가 탄 비행기도 그랬는데 가방을 얹으려니 까치발을 해야 했다. 내가 그리 작은 키도 아닌데. 얹다가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리고 다시 얹으려고 하는데 가까이 있던 여승무원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하며 내 가방을 받아 거뜬하게 얹는다. 키 큰 아가씨가 팔까지 뻗으니 그저 너무나 우월한 광경이다. 아씨... 나도 할 수 있는데. 항공사 내규상 승무원들의 안전을 위해 승객들 짐 얹고 내리는 걸 해주지 말라는 규정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승무원들이 도와주고 있는 건 그만큼의 서비스 정신을 발현하는 것이리라. 우월한 키를 이용하여 나를 도와준 여승무원의 친절에 한편으론 고마웠고 한편으론 열패감을 느꼈다. 아이 씨... 나도 까치발하면 할 수 있었는데 말이..

들고 나가서 먹어

어렸을 때부터 귀가 따갑게 듣던 말중의 하나가 먹을 땐 앉아서 먹어라, 서서 먹으면 상놈이다. 그 학습효과 덕분에 여전히 음식은 모름지기 양반처럼 앉아서 먹어야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이러면 꼰대 취급받기에 십상이다) 언제인지 테이크아웃(Take Out)이란 새로운 문화가 침투하더니 지금은 아주 자연스런 패러다임이 됐다. Take out! 얼핏 세련된 말 같지만 우리말로 하면 ‘갖고 나가!’ 돈 주고 사 먹는 손님이 갑을 관계에선 당연히 갑이지만 우아하고 고상하게 앉아서 못 마시고 밖으로 쫓겨나는 모양새다. 이거 정말 맘에 안 든다.(역시 꼰대 기질이 있는 건가) 아마 90년대 말쯤에 들어온 스타벅스가 그 시초가 아닐까 한다. 낯선 문화충격에 첨엔 생경스러웠겠지만 이젠 그게 더 세련된 문화로 역전되었다..

변산 노을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것은 노을 밖에 없네. 이준익 감독 영화 에서 여러 번 나오는 싯구절이다. 보여줄 건 노을밖엔 없다는 그 변산. 변산해변. 시나브로 사위어 가는 낮의 빛. 시시각각 하늘과 바다는 색이 변하였다. 그리고 더는 하늘과 바다를 구별할 수 없는 칠흑 같은 밤이 왔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데 변산에선 밤이 모든 것을 휩싸고 있었다. 레모 지아조토 : 아다지오

경춘선숲길

길을 걷는데 햇빛이 이마를 툭 건드린다 봄이야 그 말을 하나 하려고 수백 광년을 달려온 빛 하나가 내 이마를 건드리며 떨어진 것이다 나무 한 잎 피우려고 잠든 꽃잎의 눈꺼풀 깨우려고 지상에 내려오는 햇빛들 권대웅 중에서 중학교 때 처음 기차를 타 보고는 이후로 이 경춘선 철도는 내 인생에 주요 행로가 되었다. 마석 금곡 화랑대 태릉 신공덕 등의 정겨운 지명들. 한번도 내려서 디뎌 보지 못한 그 철길을 이제 밟아 본다. 저 레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숱한 질곡과 영욕의 역사가 보이는듯도 하다. 위대한 유산이다. 아주 포근하고 밝은 햇살 가득한 오후였다. 포근하다기보다는 훗훗해서 등어리에 땀이 맺히게 더운. 봄이다. 날도 좋고 마침 방역단계가 완화된 첫 주말이라 경춘선 철길에 나들이객이 아주 많이 나왔..

우리 가슴에는 여전히 구둔역이 있다

어린 날 우리 또래 시골촌놈들의 로망 중의 하나가 기차였다. 말만 들었던 그 기차를 나는 중학교 2학년 여름에 처음 타 보았다. 그 설렘이라니. 첫 경험은 늘 그렇다. 나이 40이 넘어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을 때도 역시 그랬다. 첫 경험의 설렘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그것들은 너무 빨리 사라졌다. 비둘기와 통일호 무궁화 등으로 등급을 나눴던 시절도 잠시, 그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 정신없이 달리는 세상. 그래도 ‘기차’라는 단어는 아직 건재하다. 이젠 증기로 움직이지 않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기차(汽車)라고 한다. 알아들을 수 없는 신조어가 날마다 양산되는 이 시대에도 ‘기차’는 남아 있으니 대견하다고 할까. 혹은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버리지 않으려는 우리의 마지막 자존심이거나 보루일지도 모르겠다. ..

신안 순례길에서

신안군의 많은 섬들중에 기점도와 소악도가 있다. 근래에 이곳을 일명 순례길이라는 테마로 트레킹 길을 열었다. 뭐 그냥 가도 아름다운 섬길이지만 아무래도 머나먼 낙도를 일부러 가려는 열정은 일천하니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기 위해 조성한 게 건축물이다. 국내외 작가들이 열두 개의 건축물을 제작해 트레일 곳곳에 세웠다. 예수의 열두 제자 이름을 붙였다. 그래서 순례의 섬인데 기독교 신앙과는 전혀 관계없다. 불자가 아니어도 절에 놀러 가듯이. 단지 열두 사도 이름일 뿐이다. 저녁 무렵에 도착해 하룻밤 잘 요량으로 아침나절에 느긋하게 떠나 익산 쯤에 갔을 때 아뿔싸! 카메라는 챙겼는데 메모리카드를 빼놓고 왔음을 깨달았다. 제기럴! 이게 벌써 몇 번째냐. 나이 들면 그렇다더니 영락없다. 사진 때문에 가는 거니 카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