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꿈길인 듯
여수 앞바다
오동도가 빨간 꽃잎 터뜨리며
내 폐항으로 달려왔다.
김여정 <동백꽃> 중에서
허공에서 한 차례, 지상에서 한 차례.
두 삶을 치열하게 살고 가는 꽃.
나무에서의 화려한 생보다는 땅에 떨어진 처연함이 아름다워
보는 사람들에게 애잔한 슬픔을 주는 꽃, 동백.
지금 오동도는 그 슬픔이 절정이다.
새벽기차를 타고 와서 내리니 칠흑같은 밤.
시간이 남아 물소리 철썩대는 방파제를 소요하다 보니 먼바다에 벌겋게 동이 터 온다. 비로소 드러나는 오동도의 실루엣.
간밤에 떨어진 꽃송이들이 고스란히 내 차지가 된다. 인적이 뜸한 이른 시각이니 저렇지 관광객들이 밀려 들어오면 저 꽃송이들은 죄다 밟혀 뭉개져 버릴 것이다.
꽃의 운명이란 게 그런 게지.
너무 예쁘면 생이 평탄하지 않다는 진리.
어떻게 견뎌낸 외로움인데
어떻게 다독여 온 아픔인데
어떻게 열어 온 설렘인데
어떻게 펼쳐 놓은 그리움인데
혼자 깊어지다
뚝
저를 놓아버리는 단음절 첫말이
이렇게 뜨거운데
설마설마
이게 한 순간일라구
신병은 <동백꽃 지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꽃송이들은 모두 한 방향으로 떨어져 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정렬해 놓은 것처럼.
그동안 수없이 보아 왔으면서도 이제야 처음 깨달은 저들의 내밀한 배치.
숲속에 카페가 있다. 여주인이 한참 돌아다녀 떨어진 꽃송이를 바구니에 한껏 주워담는 걸 보았는데 카페 정원을 이렇게 장식해 놓았다.
동백꽃차를 마신다.
맛은 뭐 특별히 좋았다라고 하진 못하겠다. 동백숲에 왔으니 한번 마셔 보는 거지.
여기서는
그대도 꽃이 된다
뜨거운 용솟음이든
열길 위태로운 낭떠러지이든
흐트러짐 없는 사랑
천만년 붉은 발원
그렇다면,
그대도 오늘은 꽃이다
- 김숙경
섬에 딱 한 그루 있는 벚나무. 이 날이 3월 13일인데 화란춘성 완전 만개했다.
벚꽃이 이렇게 일찍 핀 것을 여태 보지 못했다. 이것도 신기하여라.
음삼한 분위기의 섬을 이 벚나무 하나가 환히 밝히고 있다. 꽃등불이다.
얼추 시간이 지나 햇살이 이만큼 퍼지니 역시나 사람들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어쩌면 한 해중 가장 화양연화일 오동도의 봄날.
두 번째 정염을 불태우고 있을 동백 꽃송이들은 아마 무참히 밟히면서 생을 마감하리라.
슈베르트 피아노 트리오 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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