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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춘선숲길

길을 걷는데 햇빛이 이마를 툭 건드린다 봄이야 그 말을 하나 하려고 수백 광년을 달려온 빛 하나가 내 이마를 건드리며 떨어진 것이다 나무 한 잎 피우려고 잠든 꽃잎의 눈꺼풀 깨우려고 지상에 내려오는 햇빛들 권대웅 중에서 중학교 때 처음 기차를 타 보고는 이후로 이 경춘선 철도는 내 인생에 주요 행로가 되었다. 마석 금곡 화랑대 태릉 신공덕 등의 정겨운 지명들. 한번도 내려서 디뎌 보지 못한 그 철길을 이제 밟아 본다. 저 레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숱한 질곡과 영욕의 역사가 보이는듯도 하다. 위대한 유산이다. 아주 포근하고 밝은 햇살 가득한 오후였다. 포근하다기보다는 훗훗해서 등어리에 땀이 맺히게 더운. 봄이다. 날도 좋고 마침 방역단계가 완화된 첫 주말이라 경춘선 철길에 나들이객이 아주 많이 나왔..

우리 가슴에는 여전히 구둔역이 있다

어린 날 우리 또래 시골촌놈들의 로망 중의 하나가 기차였다. 말만 들었던 그 기차를 나는 중학교 2학년 여름에 처음 타 보았다. 그 설렘이라니. 첫 경험은 늘 그렇다. 나이 40이 넘어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을 때도 역시 그랬다. 첫 경험의 설렘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그것들은 너무 빨리 사라졌다. 비둘기와 통일호 무궁화 등으로 등급을 나눴던 시절도 잠시, 그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 정신없이 달리는 세상. 그래도 ‘기차’라는 단어는 아직 건재하다. 이젠 증기로 움직이지 않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기차(汽車)라고 한다. 알아들을 수 없는 신조어가 날마다 양산되는 이 시대에도 ‘기차’는 남아 있으니 대견하다고 할까. 혹은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버리지 않으려는 우리의 마지막 자존심이거나 보루일지도 모르겠다. ..

신안 순례길에서

신안군의 많은 섬들중에 기점도와 소악도가 있다. 근래에 이곳을 일명 순례길이라는 테마로 트레킹 길을 열었다. 뭐 그냥 가도 아름다운 섬길이지만 아무래도 머나먼 낙도를 일부러 가려는 열정은 일천하니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기 위해 조성한 게 건축물이다. 국내외 작가들이 열두 개의 건축물을 제작해 트레일 곳곳에 세웠다. 예수의 열두 제자 이름을 붙였다. 그래서 순례의 섬인데 기독교 신앙과는 전혀 관계없다. 불자가 아니어도 절에 놀러 가듯이. 단지 열두 사도 이름일 뿐이다. 저녁 무렵에 도착해 하룻밤 잘 요량으로 아침나절에 느긋하게 떠나 익산 쯤에 갔을 때 아뿔싸! 카메라는 챙겼는데 메모리카드를 빼놓고 왔음을 깨달았다. 제기럴! 이게 벌써 몇 번째냐. 나이 들면 그렇다더니 영락없다. 사진 때문에 가는 거니 카메라..

소녀와 가로등

춘천에서 나고 자라면서 같은 관내에 있는 남이섬을 한번도 가 보질 않았다. 춘천을 떠나 타지에 살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남이섬이 유명해졌다. 드라마 가 일본에서 크게 흥행하면서 춘천에 일본 사람들이 밀려들기 시작했고 중앙시장과 명동거리에는 일본 글씨들이 난무하고 일본 노래들도 간간이 들렸다. 남이섬은 인산인해, 유명세에 휩쓸려 덩달아 한국 사람들도 몰려들었다. 남이섬 선착장 소재지인 가평군도 어부지리로 관광수익을 올렸다. 이것이 한류의 시작이었다. 우리의 욘사마와 지우히메가 정말 빛나는 업적을 이루었다. 나 그로부터 어언 20여년 후에 처음 이 섬에 들어오다. 흰눈이 있는 풍경은 서정을 만끽하기에 좋았다. 제목은 소녀와 가로등이라고 적어 놓고 생뚱맞은 남이섬이라니!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가수..

고성 건봉사

또 절 포스팅. 사실은 화진포를 목적지로 떠난 길이었다. 연말연시 해돋이 관광객들 오지 말라고 동해안 일대 해변을 거의 다 통제하던 주람이었다. 그 정보를 알긴 했지만 설마 저 북쪽 끄트머리 화진포도 통제를 하리라는 생각은 안했다. 허술하게나마 주차장과 송림 등에 출입금지용 테이프를 쳐 놓았다. 사람도 별로 없고 뭐 무시하고 들어가도 되지만 나야 모범생이니 관에서 하지 말란 건 하지 않는다. 멀리서 짙푸른 바다와 꽁꽁 언 화진호수만 둘러보고 돌아섰다. 다음 주에 올까 어쩔까. 돌아오는 길에 들른 건봉사다. 실은 예전부터 한번 가려고 벼르고 있던 건봉사다. 몹시 추운 날이다. 추우니 미세먼지는 없이 완전 청명한 하늘이다. 겨울 하늘이 어쩜 저리도 파랄 수 있을까였다. 금강산 건봉사. 말로만 듣던 금강산은 ..

강화 전등사

이 블로그가 사찰 순례 콘텐츠가 아닌데 근래 사찰 여행이 빈번해져서 모양새가 이렇게 되었다. 주말이면 어디든 가야겠고 코로나로 인해 오지 말라는 곳이 많아지니 열린 곳, 불교 사찰이 주요 여행지가 되었다. 고즈넉한 겨울 산사가 좋다. 특히 기분이 편해지는 도량. 강화 전등사도 그중의 하나다. 사부대중을 위해 경내 곳곳에 벤치를 마련해 놓은 마음 씀씀이가 관음보살 같다. 입구에 시끌벅적한 장사치들만 옥의 티다. 어느 사찰이든 꼭. 절(佛法僧) 덕분에 먹고 살면서 고기 장사를 하는 비양심을 나는 비난한다.

전설의 시대

엄동설한의 딸기. 예전에 이런 전설을 들으며 자랐지. 몸이 아픈 어머니가 딸기를 먹고 싶어 하니 효자가 딸기를 구하러 눈 덮인 산들을 헤집어 다닌다는 이야기. 그땐 공감했는데 요즘 아이들은 이 이야기를 이해 못할 것이다. 이 한겨울에도 이렇게 맛난 딸기를 먹고 있으니. 딸기뿐 아니라 모든 과일과 채소들을 무심하게 먹는 세상이다. 저 위의 전설이은 짜장 전설되어 사라져 버릴 것이다. 옛 전설로나 들었던 역병을 우리가 직접 겪게 될 줄을 몰랐다. 이동이 많지 않았던 옛 시절은 지역적으로 국한되었지만 글로벌시대에 괴질은 전 인류를 몰살하려 한다. 전설이 현실로 생생하게 출현하고 현실은 전설이 되는. 몹시 어지러운 이 세계. 그런데 여름 제철에 먹는 딸기보다 요즘 철이 더 맛있는데 어인 일인가

영천 은해사

동화사를 나와 은해사를 가다. 차가운 겨울의 저녁답. 냉기 가득한 계곡에 그나마 저녁 햇살이 따스해 보이는 시각적 효과를 준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복하는 현수막이 제일 먼저 맞는다. 불교의 이런 열린 마음이 좋다. 개신교의 개념으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그런 불경한 생각은 이단숭배로 돌 맞을 짓이다. 오늘 같은 날, 불교방송에서도 크리스마스 캐롤을 하루종일 방송한다. 은해사에 들어와서 비로소 아까 동화사에서의 불편한 감정이 녹는다. 왠지 편안해지는 사찰이 있다. 남원의 실상사가 그렇고 이 은해사가 그렇다. 편안하지만 기품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사찰이다. 이곳에서는 추운 저녁이지만 오래 앉아 번뇌를 식혀 본다. 20여년 전 이곳 주지였던 일타 스님 다비식 때 한번 왔었던 곳인데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