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한국의 아름다운 길

신안 순례길에서

설리숲 2021. 2. 15. 23:29

신안군의 많은 섬들중에 기점도와 소악도가 있다.

근래에 이곳을 일명 순례길이라는 테마로 트레킹 길을 열었다.

뭐 그냥 가도 아름다운 섬길이지만 아무래도 머나먼 낙도를 일부러 가려는 열정은 일천하니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기 위해 조성한 게 건축물이다.

 

국내외 작가들이 열두 개의 건축물을 제작해 트레일 곳곳에 세웠다.

예수의 열두 제자 이름을 붙였다.

그래서 순례의 섬인데 기독교 신앙과는 전혀 관계없다. 불자가 아니어도 절에 놀러 가듯이. 단지 열두 사도 이름일 뿐이다.

 

 

 

저녁 무렵에 도착해 하룻밤 잘 요량으로 아침나절에 느긋하게 떠나 익산 쯤에 갔을 때 아뿔싸!

카메라는 챙겼는데 메모리카드를 빼놓고 왔음을 깨달았다.

제기럴! 이게 벌써 몇 번째냐. 나이 들면 그렇다더니 영락없다.

사진 때문에 가는 거니 카메라 없는 여행은 의미가 없다. 차를 되돌려 돌아오고 말았다. 메모리카드를 챙겨 넣고 다시 그 길을 가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에라이, 일찍 자고 밤중에 일어나 길을 떠나자.

 

 

 

그렇게 떠나온 여행길이었다. 송공항에 좀 일찍 도착하여 잠깐 눈을 붙이고 나니 배 시간이 되었다. 첫배가 6시 50분이다.

아직 사위는 어둡다. 첫 배에 탄 승객은 주민 세 사람에 나와 같은 관광객은 열 명이다.

객실 온돌이 따듯하다. 다들 누워 편안한 휴식을 취한다. 시나브로 어둠이 걷히면서 희미하게 섬들이 지나간다. 안개 풍경이다.

 

 

어느 순간 창밖을 보다 눈이 커졌다. 시뻘건 태양이 바다 위에 떠 있다. 얼른 카메라를 들고 후다닥 나가는데 그걸 본 일행들도 죄다 벌떡 일어나 뛰쳐나온다. 그리곤 탄성들을 지르며 사진을 찍어댄다.

처음 보는 태양의 모습이다. 그 신비한 태양을 카메라는 담아내지 못했다. 여러 커트 찍고 보니 너무도 미천하다.

어쨌든 신안 바다에서의 신비한 태양은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

 

 

 

 

섬 순례길은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 네 개의 섬을 연결하는 길이다. 섬과 섬은 노둣길로 건넌다. 노둣길이란 원래 섬과 섬 사이에 주민들이 돌을 쌓아 건너다니게 된 길이고 지금은 시멘트로 포장하였다. 따라서 만조가 되면 걸을 수가 없다. 유명한 제부도길이 대표적인 노둣길이다.

친절하게도 매표소에서 만조와 간조 정보 바탕으로 어디부터 먼저 걸으라고 배표도 그렇게 끊어 준다.

그들이 일러준 대로 우리 일행은 소악도에서 내렸다.

 

 

      가롯 유다의 집

 

 

    시몬의 집

 

 

 

목적도 같고 동선도 같으니 의도치 않게 우리는 동행인이 되어 버렸다. 패키지여행이다. 본의 아니게 5인 이상 집합금지의 방역수칙도 어기게 된 셈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친숙해졌다.

여행의 근본 속성 중의 하나다. 길을 가다 만나 웃고 떠들고 때가 되면 또 제 갈길로 헤어져 간다. 여행과 인생을 같은 것으로 여기는 이유다. 다만 길고 짧은 차이일 뿐이다. 인생은 긴 여행이요, 여행은 짧은 인생이다.

 

 

 

    유다의 집

 

    작은 야고보의 집

 

    마태오의 집

 

   토마스의 집

 

   바르톨로메오의 집

 

     빌립의 집

 

   야고보의 집

 

  안드레아의 집

 

      베드로의 집

 

 그리고 요한의 집이 있는데 빼먹었다. 이런!

 

 

순례길은 기대보다 훨씬 고상했다. 물론 열두 건축물을 찾아 가는 여행이지만 그것은 다만 관광객을 부르기 위한 홍보물이지 그것 아니라도 길은 참말 좋았다.

머나먼 이국에 온 것 같은 풍광이다.

 

일단 이 길에 들어서면 기본으로 최소 열두 장의 사진을 찍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다른 여행지보다 사진 장 수가 많아지기 마련이다.

 

친숙해진 우리는 서로서로 사진을 찍어 주며 폰으로 주고 받는다. 곧 헤어질 인연이지만 여행길에서의 이런 인연은 얼마나 고상한 풍경인가.

 

 

 

 

"작은 존재에 불과한 방랑자의 길은 고독한 구도의 과정!

그들에게 신은...

새롭게 만나는 ‘모든 것’들이다.

 

길위에서 스친 만남...

선생님도 ‘신’이네요.

제 영혼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 것 같아 감동입니다.

 

방랑자인 제가 저리도 솔직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던가.

깊이 감사를 드리고 작품 잘 간직하겠습니다.

 

길위에서 또 뵙겠습니다."

 

 

사진과 함께 그이가 이런 문자를 보내왔다.

아 이런 방랑자였다니!

나는 철학자와 동행한 거였다.

 

 

 

 

 

 

 

   카탈라니 오페라 <라 왈리>중, 나 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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