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한국의 아름다운 길 156

옛 철로변 따라 백마고지로

목하 우리 산내들은 온통 금계국 천지입니다. 이 식물이 언제들어왔는지 짐작은 못 하지만 봄이 끝나고 여름이 가까워지면 전국을 노랗게 덮어 버리는 귀화식물이 되었습니다. 철로변의 금계국도 절정으로 피어 예쁩니다. 옛 경원선의 대광리역에서 시작하여 백마고지를 향한 길을 걷습니다. 경원선은 현재 전철화공사로 인해 운행이 중단되어 기차 대신 버스가 똑같은 코스 똑같은 시간으로 동두천에서 백마고지역까지 운행되고 있습니다. 보통 이 여정은 신탄리역에서부터 시작합니다만 저는 대광리역에서 내려 천변을 걷습니다. 천변의 길섶에도 역시 노란 금계국이 만발해 있습니다. 이 금계국은 백마고지역까지 내내 철로변에 가득합니다. 길을 떠난다는 건 일상의 속박에서 놓여나는 것, 그게 어느 곳이든, 아름다운 길이든 삭막한 길이든 일상..

광주의 이팝나무.... 5월, 꽃잎

망월동 5·18 묘역으로 가는 민주로에는 이팝나무 흰 꽃잎이 절정이었습니다. 묘역을 성역화하면서 임들의 넋을 추모하는 취지로 5월에 꽃이 피는 이팝나무를 가로수로 심었습니다. 이만큼 세월이 흘러 무심한 이들에겐 그저 예쁜 꽃구경의 즐거움일 테지만 그날을 겪고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가슴을 찢는 처절한 아픔의 꽃잎기도 합니다. 올해 광주민주화운동 41주년입니다. 처음으로 망월동을 찾았습니다. 그간 해마다 임들을 추모해 왔으면서 어찌 이곳을 찾을 생각은 한번도 안 했는지 모릅니다. 묘역은 우선 정갈하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날의 역사만 잠시 기억에서 지운다면 반나절 놀다 가기 좋은 시민공원입니다. 입구까지 줄지어 선 이팝나무는 이 여행의 주 테마이구요. 추모탑 앞에서 제법 긴 묵념을 하고 묘비들을 둘러..

전주 팔복동철길 이팝나무

5월의 첫날이었습니다. 아주 추운 아침입니다. 설악산 오대산에 폭설이 내렸습니다. 이 푸른 5월에. 이곳은 간간이 는개비가 흩뿌렸습니다. 을씨년스런 하루였어요. 지난 11월의 첫날도 비와 함께 시작되더니 이 5월의 첫날도 비가 내렸습니다. 비가 아니라 이곳의 나무들도 눈을 맞은 듯 저리 하얗습니다. 전주 팔복동 옛 기찻길이예요. 유명해서 이맘때 사람들이 많이 몰려오지만, 특별히 가꾸거나 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소박한 매력이 있습니다. 폐철로와 이팝나무 하얀 꽃. 얼핏 어울리는 조합은 아닌 듯한데 직접 풍광을 대하니 제법 그림이 됩니다. 가난했던 옛 사람들이 이름만이라도 배불러지라고 이팝나무라 했다고 합니다.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라는데 어째 그럴싸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이 팔복동 이팝나무 철길은 그..

진해 여좌천 벚꽃길

내년 봄엔 여길 꼭 가야지. 여러 해 집심하여 별렀었죠. 재작년에 드디어 난생 처음 스케줄을 잡아 설레고 있었는데 그만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느라 기회를 놓치고는, 작년엔 코로나로 또 못 갔습니다. 그리고 올해 역시 군항제는 취소가 됐지만 작년처럼 완전봉쇄는 없어서 자유로이 벚나무 그늘을 걸을 수 있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필생의 소원인 진해의 유명한 벚꽃을 보고 왔습니다, 실컷. 아, 생은 소소한 소망 한 가지씩 이루는 재미로 점철되는 것임을! 웬만하면 3월에 개화하지 않는데 올해는 벚꽃 개화가 아주 빠릅니다. 보통 남쪽에서 화신을 접하고 자랑삼아 벚꽃 통신을 보내면 북쪽 사람들이 부러워하며 놀러가곤 하는데 올해는 거의 동시다발로 전국이 피어나니 자랑할 만한 간격도 없이 어느새 서울쪽에도 벚나..

경춘선숲길

길을 걷는데 햇빛이 이마를 툭 건드린다 봄이야 그 말을 하나 하려고 수백 광년을 달려온 빛 하나가 내 이마를 건드리며 떨어진 것이다 나무 한 잎 피우려고 잠든 꽃잎의 눈꺼풀 깨우려고 지상에 내려오는 햇빛들 권대웅 중에서 중학교 때 처음 기차를 타 보고는 이후로 이 경춘선 철도는 내 인생에 주요 행로가 되었다. 마석 금곡 화랑대 태릉 신공덕 등의 정겨운 지명들. 한번도 내려서 디뎌 보지 못한 그 철길을 이제 밟아 본다. 저 레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숱한 질곡과 영욕의 역사가 보이는듯도 하다. 위대한 유산이다. 아주 포근하고 밝은 햇살 가득한 오후였다. 포근하다기보다는 훗훗해서 등어리에 땀이 맺히게 더운. 봄이다. 날도 좋고 마침 방역단계가 완화된 첫 주말이라 경춘선 철길에 나들이객이 아주 많이 나왔..

신안 순례길에서

신안군의 많은 섬들중에 기점도와 소악도가 있다. 근래에 이곳을 일명 순례길이라는 테마로 트레킹 길을 열었다. 뭐 그냥 가도 아름다운 섬길이지만 아무래도 머나먼 낙도를 일부러 가려는 열정은 일천하니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기 위해 조성한 게 건축물이다. 국내외 작가들이 열두 개의 건축물을 제작해 트레일 곳곳에 세웠다. 예수의 열두 제자 이름을 붙였다. 그래서 순례의 섬인데 기독교 신앙과는 전혀 관계없다. 불자가 아니어도 절에 놀러 가듯이. 단지 열두 사도 이름일 뿐이다. 저녁 무렵에 도착해 하룻밤 잘 요량으로 아침나절에 느긋하게 떠나 익산 쯤에 갔을 때 아뿔싸! 카메라는 챙겼는데 메모리카드를 빼놓고 왔음을 깨달았다. 제기럴! 이게 벌써 몇 번째냐. 나이 들면 그렇다더니 영락없다. 사진 때문에 가는 거니 카메라..

석모도 바람길

지난 가을 강화도행 교통의 열악함을 절감했던 터라 새벽 일찍 서둘렀다. 5시에 일어나 대충 낯만 씻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겨울에는 차 유리가 허옇게 얼어 녹이는 데도 시간이 걸리기 일쑤라 안날 저녁에 미리 종이박스로 앞유리를 덮어 놓아서 시동 걸자마자 바로 출발했다. 실은 차를 바꾸고 시운전 겸 자축의 의미로 고속도로와 올림픽대로를 질주하고 싶었던 여행이기도 하다. 새 차에 만족한다. 잘 샀군. 일찍 떠난 덕분에 막히지 않고 예상된 시각에 강화에 입도했다. 그리고 다시 석모도로 건너간다. 석모도 바람길을 걸을 요량이었다. 이 길은 강화나들길의 한 구간으로 석모도석착장이 그 시발점으로 되어 있다. 내비에 의지해 갔는데 내비가 엉뚱한 곳에 내려준다. 석모대교가 개통한 지 3년이라 그 전까지는 오로지 배편으..

강천사 가는 길

강천사를 처음 찾았던 게 2002년 12월이었다. 공동체마을에 축복하지 못할 결혼식이 있었다. 축복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결혼이 있었다. 감히 말리지는 못하고 그냥 나와 버렸다. 그들의 결혼을 부정하는 내 알량한 의사표시였다. 날은 왜 그리 추운지 전라도 일대는 눈 내리고 며칠이 지나도록 녹지 않고 그대로 설원이었다. 차창 밖의 설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낭만적인데 그 정취를 즐기지 못하게 마음은 얼어 있었다. 이름 모를 산협 모퉁이의 암자들을 찾아다녔다. 훗날에야 일종의 ‘암자순례’로 포장했지만 사실 당시는 왜 그러고 싸돌아다녔는지 알 수가 없다. 실은 그 며칠 전부터 정찬주의 포켓용 책을 일고 있었던 참이었다. 책에 소개된 암자들을 찾아 전라도 일대를 헤메 다녔다. 시시각각으로 그때의 소회를 적은..

갑사 가는 길

다시 또 가을. 그것도 만추. 어김없이 자연은 그대로 순환하는데 변하는 건 사람의 일이다. 조금씩 늙어 가면서 똑같은 가을을 맞다가 가뭇없이 소멸한다. 그 뒤를 다른 사람들이 살다가 역시 소멸하고. 어떻게 보면 이것도 끝없는 순환의 반복이긴 하지만. 갑사는 처음이다. 춘마곡추갑사. 우정 가을에 방문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이것도 때를 못 맞춰 빨간 단풍이 흐리마리 끝나 가고 있었다. 그러나 만추의 풍정이 곳곳에 가득하니 진짜 가을을 실감하겠다. 곧 이 길에 눈 내리고 겨울 오겠지. 드라마 중, Return To 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