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한국의 아름다운 길 156

영동 백화산 계곡길

11월. “모든 것이 다 사라지지는 않은 달” 모든 달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인디언들의 11월에 대한 개념이다. 그렇군. 들판도 텅 비고 나무도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하고, 버석거리며 말라 가는 우리네 휑한 가슴. 다 사라져 간 것 같지만 집 밖 어디든 서 보면 11월은 텅 비어 있지 않다. 오히려 풍성해 보이는 것은 내 기분 탓이겠고. 충북 영동 백화산 계곡의 석천을 따라 걷는 길은 한 해중 이맘 때가 가장 아름답다. 벼르고 별러 떠난 가을 도보여행. 11월 첫날. 가을 반야사, 가을 계곡, 그리고 낙엽 그리고 비. 새초롬히 내리는 비와 함께 11월이 시작되었다. 촉촉이 물기 머금은 풍경이 운치 있어 맑은 날이 아닌 게 더 행운이었다. 가뿐하니 머릿속도 한결 상쾌하다. 별로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데..

만경평야의 들판과 코스모스

이런 날은 더 쫄쫄 굶게 마련이다. 추석이라고 음식점은 거개가 문을 닫는다. 가정으로 안 돌아가는 홀로족이나 먼 이방에 와 있는 외국인들은 긴 연휴가 좋지만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코로나로 아예 폐점을 한 식당들도 훨씬 많다. 이런 때 편의점은 참 반갑고 고마운 상점이다. 편의점에 들어가서 느끼는 애잔한 감정. 이런 날에도 집에 있지 못하고 일하고 있는 점원이나 아르바이트생들. 삶이 팍팍한 건가. 전에는 그렇게 동정을 했었는데. 생각해보면 친지들 모인 자리에서 대답하기 싫은 질문 폭격을 받는 것보단 탈출해 나와 일하는 게 홀가분하고 편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김없이 들판은 이리도 가을이 가득 찼다. 가네 마네 모이네 마네 사람들만 안달복달 속끓이지 계절은 왔다가 또 가고. 김제시 광활면이다. 광활면(廣活..

추자도 올레길

내 평생에 추자도를 가보리라고는 꿈도 꾼 적 없었다. 그저 남해바다에 절해고도가 하나 있지. 옛날엔 유배지였다지. 본토와 제주도의 중간쯤에 있다지. 막연하고 먼 미지의 섬이었다. 시쳇말로 대박이다. 막연한 이어도 같은 그 섬에 내가 들어갔다. 여행을 다니면서 다음 주는 어디로 갈까 대강 얼개를 잡고 서너 곳 후보지를 생각한다. 이번에 예정에도 없는 이틀간의 휴가가 생겨 버렸다. 갑자기 맞닥뜨린 휴가에 당황하여 생각을 정리하다가 뜬금없이 추자도가 떠올랐다. 태풍 ‘마이삭’이 전국을 휩슬고 있었다. 마이삭의 진로를 주시하다가 추자도가 튀어나온 것이었다. 아 그럼 저길 가봐야지, 태풍이 끝나면 배도 출항하겠지. 마이삭과 뒤이은 하이선 사이의 이틀간을 그렇게 해서 추자도에서 보내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추자도..

진안 모래재 메타세쿼이아길 여름

전주에서 진안 쪽으로 구 26번 도로를 타고 가다 구불구불 구절양장 오르막을 오르면 모래재다. 고갯마루에 휴게소가 있어 그늘 벤치에 앉아 음료수 한 캔 마시고 있으면 영을 넘는 서늘한 바람이 몸의 땀을 식혀 준다. 고갯마루에서 진안 쪽으로 약 4km 남짓의 가로수는 메타세쿼이아다. 이곳의 그로수길이 근래 명소로 부상하고 있다. 지난 겨울 전주에 갔다가 이곳을 가려고 했는데 대중교통 조건이 워낙 불리해서 이리저리 검색해보다가 포기했었다. 그러나 유명세에는 아직 미흡하다. 4km라고 하지만 모래재부터 3km 구간은 이제 식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나무들이어서 앞으로 많은 해가 지나야 할 것 같다. 그렇지만 나머지 1km 정도 되는 구간은 참말 명품길이다. 늦가을의 노란 나무들과는 또다른, 진초록 메타세쿼..

제주 사려니숲길

제주도라 남방식물이 많을 것 같지만 사려니숲은 고스란히 뭍의 수종들로 울창하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길이라는 사려니숲길이다. 원시림 속을 거닐며 몽환의 시간을 누린다. 세상사를 잊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오가는 탐방객들마다 죄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별수 없이 현실과 동행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폭염 속에 허덕이는 이곳 남쪽과 달리 중부지방에는 연일 폭우와 홍수로 난리다. 걷는 내내 북쪽의 재해현황이 실시간으로 들려온다. 이 나라는 결코 땅덩어리가 좁은 나라는 아니다. 이곳은 까마귀 천국이다. 내내 까마귀소리가 숲을 진동한다. 일천한 상식으로 가마귀는 겨울새로 알고 있었다. 전에도 왔다가 지천인 까머귀들을 보고 의아해했었는데. 검색해 보니 여러 종류의 까마귀 중에 한국의 텃새도 있다고 한다. 도처..

횡성 호숫길

숲도 푸르고 호면도 푸른 여름날의 호수. 환경파괴라는 숱한 비난을 감내하면서 횡성댐은 건설되었고 거대한 호수가 생겼다. 이왕 만들었고 원상태로 복귀할 수는 없으니 이 환경에서 인간은 또 최대의 혜택을 누리는 발상들을 한다. 호젓하게 호안가를 걷는다. 여름은 깊어가고 아름다운 날들이다. 뒷이야기, 배후의 사연이 이젠 별로 궁금하지 않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을 즐기고 싶다. 골치 아픈 것, 여행은 그런 것을 버리는 즐거운 작업이다. 여름이 되니 여름이 젤 좋다. 겨울에는 겨울철이 젤 좋더니. 예전엔 반대였는데. 눈이 시리도록 푸른 이 풍경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자연.

통영 동피랑, 그 다이나믹한 골목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해마다 봄, 또는 초여름에 통영을 가게 된다. 그때마다 들르게 되는 통영항 남망산공원 또 중앙시장, 그리고 동피랑 골목. 시장에서 먹는 멍게비빔밥이나 성게비빔밥은 아주 일품이다.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통영의 맛. 동피랑. 피랑은 벼랑의 이곳 말이라고 한다. 골목은 그 골목이어도 매번 같지 않은 것은 벽화가 갈 때마다 바뀌어 있어서다. 머물러 있지 않고 늘 새롭게 업그레이드되고 있는 것 같은 역동적인 바다 같은 기상이 좋다. 무서버라, 카메라 메고 오모 다가? 와 너무집 밴소깐거지 디리대고 그라노? 내사마 여름내도록 홀짝 벗고 살다가 요새는 카메라 무서버서 껍닥도 몬벗고 고마 덥어 죽갔능기라. 어쩌다 한번 오는 관광객들에겐 호기심 천국이지만 주민들은 짜장 성가시고 불편하기 이를 ..

창녕 우포늪

‘늪’이라는 단어는 보통 문학적인 관용어로 쓰이는데 부정적인 이미지다. 늪에 빠진다. 헤어날 수 없다 등등. 인문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면 ‘늪’은 그야말로 자연의 시원이다. 살아 숨쉬는 생명의 보고다. 바닷가의 뻘도 그렇다. 늪가에 가까이 서 있을 때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이 생기는 이유다. 사람의 몸에 내재돼 있던 원시적 생명력이 슬그머니 살아나는 움직이는 것이다. 겨울에만 두어 번 갔었다. 한창 생명력이 왕성해지는 계절에 우정 다녀왔다. 그저 늪이니 아름답다는 미사여구는 진심이 아니다. 보이느니 혼탁한 물이요, 나무와 풀이다. 그 안에 깃들이고 사는 수많은 생명의 세계가 아름다운 것이다. 늪 주변을 따라 걷는다. 너무 늪에 가까이 접근하지 않게 적당한 거리로 나 있다. 유명관광지지만 음식점 매점 ..

호반의 가을, 청남대

가을은 그냥 침잠한다. 햇살이 눈부신 날에도 갈색 나뭇잎에 가슴은 내려앉고 마는 것이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사람에겐 아주 좋은 계절이다. 아무 데나 갖다대고 눌러도 그림이 된다. 청남대 호수에 가을빛이 절정으로 무르익었다. 대통령의 휴양지라는 선입견만 빼면 최고의 가을호수 풍광이다. 이런 곳에서 휴가를 보낼 수 있는 대통령이란 지위가 지고한 존재임을 딱 한번 절감해 본다. 사전 예약으로만 입장이 된다. 전날 열심히 두드려서 예약을 하고 결제도 완료된 것으로 믿고 갔는데 청남대 정문에서 예약이 안 됐다고 한다. 내가 어설프게 잘 못했나 보다. 그래도 박정하지 못한 게 사람 사는 사회라 미적거리며 되돌아 나오려고 하는데 이왕 오셨으니 지금 매표하시고 들어가시라 한다. 그렇지 원리원칙만이 미덕은 아니니 이..

서울 중랑천 장미터널

장미넝쿨 우거진, 혹은 장미 가득한 정원이 있는 집에서 살기를 그 얼마나 소망하는지. 누구나 장미 가득한 정원을 꿈꾸며 장미 향기 가득한 인생이기를 원합니다. 나는 단 한번도 장미정원을 약속한 적 없지만 나의 그녀는 예쁜 장미정원을 소망하곤 했지요. 가슴 속으로만. 평생을 꿈꾸던 장미정원을 그녀는 한번도 가져 보지 못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붉은장미 넝쿨이 담장을 덮은 집을 보면 많은 상념이 갈마듭니다. 과연 저 집 여주인은 우리가 부러워하는 것만큼 행복할까. 모르긴 몰라도 그녀의 생활 역시 희노애락으로 점철된 보통의 삶 이상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행복한 삶이란 화려한 삶이 결코 아니란 생각으로 자위도 합니다. KBS드라마 에서 평범한 여자 최진실은 화려한 장밋빛 인생을 꿈꾸지만 현실은 그저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