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한국의 아름다운 길

옛 철로변 따라 백마고지로

설리숲 2021. 6. 15. 22:21

 

목하 우리 산내들은 온통 금계국 천지입니다.

이 식물이 언제들어왔는지 짐작은 못 하지만 봄이 끝나고 여름이 가까워지면 전국을 노랗게 덮어 버리는 귀화식물이 되었습니다.

 

철로변의 금계국도 절정으로 피어 예쁩니다.

옛 경원선의 대광리역에서 시작하여 백마고지를 향한 길을 걷습니다.

경원선은 현재 전철화공사로 인해 운행이 중단되어 기차 대신 버스가 똑같은 코스 똑같은 시간으로 동두천에서 백마고지역까지 운행되고 있습니다.

 

 

 

 

 

보통 이 여정은 신탄리역에서부터 시작합니다만 저는 대광리역에서 내려 천변을 걷습니다. 천변의 길섶에도 역시 노란 금계국이 만발해 있습니다.

이 금계국은 백마고지역까지 내내 철로변에 가득합니다.

 

길을 떠난다는 건 일상의 속박에서 놓여나는 것,

그게 어느 곳이든, 아름다운 길이든 삭막한 길이든 일상과는 다른 풍광이어서 메말랐던 눈이 정화됩니다, 약간의 객수까지 더하면 여행은 좋았다고 표현합니다.

 

 

 

 

중간에 인민군이 뚫다 만 터널이 있습니다. 이 굴 천장에서 물이 떨어져 겨울에는 역고드름이 솟는 독특한 볼거리가 됩니다. 지도에도 등재된 역고드름. 그래서 이 길은 귀가 떨어져 나가게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에 관광객들이 많습니다.

황량한 겨울풍경이 더 어울리는 지역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금계국 만발한 지금의 여행도 그에 못지않게 낭만이 있습니다. 변방군사지역이어서 오염이 덜 된 아름다운 우리 산하입니다.

 

 

 

 

 

백마고지역을 오지에 가까운 추레한 역으로 상상했다면 실망하기 딱 좋습니다.

관광객이 많아지자 옛 흔적을 다 없애고 새로이 건물을 떡하니 지어 놓았습니다.

세련되지도 않고 낭만적이지도 않은, 멋대가리 없는 작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도 애초엔 황량한 들판에 낡아 다 부서져 내리는 오래된 플랫폼을 상상했더랬는데 정말 실망이 컸습니다. 대광리역이나 신탄리역이 주는 고풍의 멋을 외면했는지.

 

 

 

 

어쨌거나 여기는 하룻밤에 주인이 24번이나 바뀌었다는 치열한 전적지 백마고지입니다. 기차역이 멋대가리 없다고 푸념하는 소견머리가 부끄러운 무거운 역사의 현장입니다. 멀지도 않은, 고작 내가 태어나기 11년 전에 수많은 목숨을 걷어간 살벌한 전쟁터였습니다.

 

어쨌거나 그 공포의 전력을 지닌 땅에 여느 곳과 다름없이 꽃들이 피어 만발하고 온갖 생명이 충만한 살아 있는 땅입니다.

문밖을 나서 길 위에 서면 지상의 모든 에너지를 몸에 담뿍 받는 행복한 동행이 됩니다. 혼자라고 해서 정말로 혼자가 아닙니다.

 

 

 

백마고지역이 이 노정의 종착지이지만 지척에 있는 노동당사도 둘러봅니다.

전에는 건물 내부에도 들어갔었는데 이젠 둘레에 울타리를 쳐 출입이 안됩니다.

건물이 워낙 낡아 언제라도 시멘트 조각 하나 떨어져 내릴 위험한 상태이기도 하지만, 해설사의 말로는 내부 벽에다 사람들이 자꾸 낙서들을 해대서 관리와 통제가 안 된다고 합니다.

 

 

 

이곳 연천과 철원 일대는 이렇듯 전쟁과 북한에 관계된 고통의 땅이라는 걸 새삼 절감합니다.

 

 

 

  월하리를 지나

  대마리 가는 길

  철조망 지뢰밭에서는

  가을꽃이 피고 있다

 

  지천으로 흔한

  지뢰를 지긋이 밟고

  제 이념에 맞는 얼굴로 피고 지는

  이름 없는 꽃

 

  꺾으면 발 밑에

  뇌관이 일시에 터져

  화약 냄새를 풍길 것 같은 꽃들

 

  저 꽃의 씨앗들은

  어떤 지뢰 위에서

  뿌리 내리고

  가시 철망이 찢긴 가슴으로

  꽃을 피워야 하는 걸까

 

  흘깃 스쳐가는

  병사들 몸에서도

  꽃냄새가 난다

 

                         정춘근 <지뢰꽃>

 

 

 

 

 

 

돌아오는 길은 낮이 긴 계절도 어느덧 저녁해가 뉘엿뉘엿 서산 산그늘이 길게 집니다.

이 길은 갈꽃 만발한 올 가을에도 또 한번 걷고 싶습니다.

노동당사 바로 앞 소이산에도 올라 드넓게 펼쳐진 철원평야 누런 황금들녘을 보려 합니다.

지금은 여름의 초상.

들녘, 들꽃, 전쟁, 평화 그리고

친구.

 

저녁햇살은 얼굴이 아닌 내 가슴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입니다.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어 버렸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개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윤동주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