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한국의 아름다운 길 156

김포 금빛수로

계절은 분명히 가을인데 무척이나 더웠다. 안날부터 감기 기운이 돌더니 이 날 아침엔 맑은 콧물이 흐르기 시작. 시절이 시절인지라 혹시 코로나가 아닌가도 했지만 증상으로 보아 그건 아니다. 게다가 회사사람 말고는 누구랑 접촉한 적이 없으니 코로나 바이러스를 들이마셨을 가능성이 적다. 라는 이름의, 원래는 '김포대수로'였던 물길을 걷다. 그닥 길지 않은 거리를 걷는데 뜨거운 햇볕에 숨은 턱턱 막히고 감기가 더해 몹시 불편하다. 땀도 흐르고 몸 상태도 찌뿌드드한 게 영 좋지 않다. 콧물은 쉴 새 없이 흐르고 잠깐잠깐 쉬기를 반복한다. 이 금빛수로는 원래는 농사용 하천으로 비가 안 오면 물이 없는 건천이었던 것을, 김포시가 ‘한국의 베니스’를 표방하며 야심차게 기획한 프로젝트다. 팔당댐에서 물을 끌어와 흐르게 ..

담양 관방제림 길

담양의 유명한 숲 관방제림. 오래된 노거수들이 으늑한 그늘을 지우고 줄지어 늘어선, 보기에도 시원한 그늘숲입니다. 푸조나무가 주종이며 팽나무 느티나무 벚나무 서어나무 등의 수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무마다 일련번호를 붙여 체계적인 관리를 하고 있어서 이 아름다운 숲이 보존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름은 갔지만 여전히 나뭇잎과 숲은 짙은 푸르름으로 마지막 축제를 즐기는 듯 보였습니다 태풍 힌남노가 오기 하루 전 주말이었습니다. 폭풍전야의 고요인지. 바람 한 점 없이 물쿤 날씨. 하늘은 구름이 몰려들었다가는 파랗게 벗개기길 반복하며 이따금 는개가 흩뿌리기도 하고 곧이어 쨍쨍 햇빛이 쏟아지기도 하는 요상한 날씨였습니다. 관방천을 사이에 두고 유명한 죽녹원이 마주하고 있고 관방제 숲을 사뭇 걸어가면 또 유명..

국민의숲길 안개에 젖어

국민요정 국민여동생 국민첫사랑 국민배우 국민남편... 더 이상 가져다 쓸 게 없을 정도로 ‘국민’이 흔하던 그 어름. 그 유행에 편승해 평창군이 잽싸게 이름을 선점한 ‘국민의숲’입니다. 대서(大暑) 날이라 역시나 무더운 날, 꽝꽝 얼린 물에다가 등에 붙이는 쿨링팩, 그리고 합죽선. 또 숲속 모기가 있을지도 몰라 기피제까지 거의 완벽하게(?) ‘큰더위’를 대비해 갔습니다, 그런데. 대관령 고갯마루에 오르자 썰렁한 냉기가 끼칩니다. 숲으로 들어갈 때쯤엔 짙은 안개가 뒤덮어 덥기는커녕 춥지 않을지가 더 걱정이었습니다. 안개 안개 안개... 숲은 온통 안개에 묻혀 있습니다. 전나무 곧은 둥치에도, 넙데데한 떡갈나무 이파리에도, 내 발소리에 놀라 냅다 달아나는 다람쥐의 곧추세운 꼬랑지에도 온통 안개였습니다. 잘 ..

바다가 보이는 언덕 논골담

휴가의 절정기인데다가 주말이었다. 동해 묵호를 갈 생각이었다면 미리 숙소를 예약을 했어야 했는데 난 그런 면에선 절박함이 항상 부족하다. 뭐 있겠지. 없으면 돌아오면 되지. 그랬더니 과연 모텔이 없다. 간판 불도 거의 다 꺼졌고 간혹 불이 켜져 있는 곳엘 가니 다 만실이다. 내가 그럼 그렇지. 집으로 돌아오려니 너무도 멀다. 이왕 왔으니 방은 없어도 차에서 자면 된다. 묵호항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잠을 청한다. 이 일대는 주차할 곳이 많아서 좋다. 주차장에 차가 많다. 시동을 캬놓고 있는 차들이 많은 걸로 보아 그들도 나처럼 차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인 것 같다. 아마 나처럼 숙소를 못 잡은 게 분명하다. 나는 저녁놀을 좋아한다. 이유는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서 일찍 일어나지 못해서다. 그래서 내 여행사진은 ..

달성 육신사 배롱나무길

昨夜一花衰 今朝一花開 相看一百日 對爾好衡杯 어젯밤 한 송이 떨어지고 오늘 아침에 또 한 송이 피어 서로 일백일을 바라보니 너와 마주하여 한잔하리라 (성삼문) 달성 하빈면에 있는 육신사는 사육신을 모신 사당이다. 원래는 박팽년을 모셨고 나중에 여섯 위패를 봉안했다. 생전에 성삼문은 배롱나무를 사랑하였다고 한다. 육신사 경내에도 배롱나무가 있지만 정작은 사당으로 들어가는 길의 배롱나무를 보러 간다. 폭염의 절정인 이 계절에 그나마 위안을 주는 정열의 꽃. 특히 이 육신사 길은 국내 몇 손가락에 꼽힐만한 배롱나무 명소다. 민해경 : 변명

동두천 외국인관광특구

옛날에는 양공주거리라고 했다지요. 양공주 양색시 양갈보 유엔마담 히빠리...어느 단어를 써도 민망하고 부끄러워 잊고 싶은 과거지만 그래도 잊어서는 안될 역사이기도 합니다. 기지촌이 있는 지역은 다 그런 어두운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자란 춘천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떠나고 없는, 캠프페이지가 있어서 내 고등학교 모교 바로 앞 골목이 공주거리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힐 일입니다. 학교 앞에 공주거리라니! 동두천 보산동의 그 양공주거리가 지금은 이름과 형태를 바꿔 가 되었습니다. 한때는 가장 번화한 경제중심지였다고 합니다. 주민의 40%가 외국인이라서 말 그대로 한국 속의 외국이었다고. 미군 클럽이 56개 업소나 되었다고 하니 정말 굉장했나 봅니다. 지금도 클럽 간판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9..

제주 비자림로

제주도 동부지역을 반으로 가르며 사려니숲에서부터 동쪽 해안까지 뻗은 1112번 도로. 비자림로다. 이름은 비자림로이지만 비자나무는 없다. 이 길을 따라 거뭇하게 숲을 이룬 건 삼나무다. 길의 끄트머리 쯤에 비자림이 있어 도로명을 그리 지었을 것이다. 이 삼나무길이 도보여행자들에게는 아주 근사한 트레킹 코스가 될 수 있는데 아쉽게도 그렇지 못하다. 왕복 2차선의 좁은 도로에 보행자가 걸을 수 있는 갓길이 없다. 섬 동편 성산과 우도로 가는 관광 요충로라서 관광객이 많은 주말엔 차량이 몰려 언감생심 걸을 엄두조차 못 낸다. 그나마 한적한 평일을 택해 그 풍경을 담았다. 여러 날을 찜통처럼 삶아대더니 하늘이 흐려졌다. 기상예보를 통해 비소식을 접한 터라 미리 우산을 챙겨 들고 온 터였다. 그리고 염천을 식히며..

철원 소이산에 산수국이 만발했다

파란색도 아닌 것이 보라색도 아닌 것이 어느 때는 노랑에 어느 때는 하양, 또 다른 때는 분홍. 종잡을 수 없는 그녀의 꽃말은 그래서 변덕, 변하기 쉬운 마음 어쩌고저쩌고. 산수국을 보러 떠나온 길이지만 우리를 맞는 건 눈부시게 하얀 개망초입니다. 소금을 뿌려 놓은 듯하다고 이효석은 메밀꽃을 묘사했거니와 그 표현은 이 개망초에도 그대로 들어맞습니다. 이 꽃이 흐드러지면 계절은 깔축없이 여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꽃. 너무나 흔해 빠져서 고운 대접을 못 받고 있지만 기실은 청초하고 순결한 매력으로 이보다 더한 꽃이 없습니다. 산수국은 어둑신하고 습한 곳에 삽니다. 그 음습한 풍경을 아름답게 장식한 꽃. 철조망 너머 그네들도 다 똑같은 자태 고운 꽃입니다. 6·25 72주년이었습니다. 휴전선 너머 ..

강진 병영마을 담장길

강진 병영면은 조선시대 병마절도사 영이 있던 지역이다. 그 이름을 그대로 남겨 병영이 되었다, 이름만으로도 군대주둔지임을 알겠다. 오늘은 이 병영 한골목이다. ‘한골목’은 큰골목의 의미도 있고, 막혀 있지 않고 열려 있다는 말인데 실제로 골목에 들어서면 막다른 길이 없고 어느 곳으로든지 다 연결되어 있다. 하나의 마을이 독특한 담장으로 구성된 ‘담장마을’이다. 조선이라는 동방 미지의 한 나라를 최초로 소개한 하멜. 제주도에 표류해 와서 생존한 일부는 조선 한양에 끌려갔다가 이곳 강진군 병영에 억류되어 7년간을 유배 아닌 유배생활을 했다. 뜻하지 않은 이역생활은 물론 낯설고 두려웠을 것이다. 마을의 큰 은행나무 아래에 앉아 고국 네덜란드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들이 마을에 살면서 만들어 놓은 건축물이 지금..

정읍천, 꽃비 내리던 길

여기는 정읍. 정염의 기를 다 발산했는가. 벚꽃들은 지금 화려한 꽃비 되어 내려 쌓이고 있었다. 늦가을의 낙엽보다 더 비장하게 슬픈 봄철의 낙화. 하롱하롱 앵두꽃 하얀 잎이 흩날려 떨어질 때의 처연함을 시골에서의 유년시절에 이미 체득했었다. 조숙하기도 하여라! 보통의 낙화는 이처럼 슬픔을 주지만 벚꽃잎은 아니다. 비처럼 떨어지는 꽃잎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활짝 핀 화양연화 꽃잎보다 흩어져 날리는 낙화를 좋아한다. 슬퍼서 좋아한다니! 이율배반의 모순덩어리인가. 사실 꽃잎 지는 걸 슬퍼할 이유가 없다. 꽃이 짐으로써 열매를 맺으니 그들로서는 그것이 더 화려한 생으로 진격하는 일이다. 정읍시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는 정읍천의 가로수길은 목하 벚꽃의 낙화가 절정이다. 꽃비... 건듯 바람에도 호로로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