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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투어 충주] 비 오는 날은 수채화

밖이 수선스럽기에 창을 열어 보니 활짝 벙근 모과꽃이 함초롬히 비를 맞고 있다. 연한 새순 돋을 때 보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느새 저토록 무성한 잎새에다 꽃이 피어 있는 것이다. 한동안 가물어 대기가 부옇더니 이제 말끔해졌을 것이다. 오늘 같은 비 오는 날은 그냥 동네 골목이나 한번 걸어볼 요량으로 우산을 받쳐 들고 나섰다. 문을 나서면 바로 사이길, 즉 ‘사과나무 이야기 길’이다. 몇몇 지역과 더불어 충주는 사과의 명산지다. 사과를 테마로 하여 내가 사는 골목을 포함한 산책길이 있다. 이곳으로 이사하고 꽤 여러 날이 지났지만 오늘에야 처음 나서는 길이다. 1912년 지금의 용운사 근처에 몇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은 게 충주 사과의 시작이라 한다. 계단 끝 두 그루 모형 사과나무에서 ‘사이길’ 산책을..

충주 호암지

집 가까이 호암지가 있다. 심심하거나 문득 문밖이 궁금할 때 산책하기 좋은 호수인데 원래 사람 심리가 가까운 곳은 잘 안 가게 된다. 충주 와서 처음 나섰던 날엔 반바퀴도 안 돌고 들어왔다. 날이 많이 풀린 봄날이라 정말 가볍게 대충 입고 나갔더니 바람 불고 쌀쌀하게 추워 그만 돌아왔다. 짜장 봄이 무르익은 4월 11일 여유롭게 호암지를 돌았다. 봄에 볼 수 있는 모든 꽃이 다 있다. 이것도 벚꽃인 것 같은데 꽃잎이 다르게 생겼다. 이것도 벚꽃인 것 같다. 한과처럼 생긴 총상화서인데 자세히 보면 수많은 꽃송이가 한 자루에 다닥다닥 붙었다. 특이한 벚나무다. 맑은 날에 오세요 그대 푸름 모아둔 호수 수면 가득 하늘 비치는 맑은 날에 오세요 그대 제일 화사한 오늘처럼 발걸음 가벼운 날 꽃같은 그대 늘 봄처럼..

을왕리 해변 노을

사는 게 먹먹해져 밑바닥처럼 타락하고 싶은 날 우리 공항철도 타고 을왕리로 가자 푸른 하늘에 떠 있는 낮달 바라보며 지금까지 끌고 온 길 밑줄 치며 삭제해 보자 파도소리보다 먼저 와 우리를 염탐하고 돌아가는 바람의 뒤통수에 힘껏 고함을 질러 보자 지난날의 패배 미래의 두려움 모두 저 푸른 바다에 수장시키자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절망의 날을 만날 때 공항철도 타고 을왕리로 가자 푸른 바다에 우리를 맘껏 버리고 오자 - 이권 새가 왕성해서 을왕(乙旺)리라던가. 내가 이 섬에 와서 처음 만난 건 갈매기다.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드니 갈매기들도 먹을 게 많아서 해변으로 죄다 몰려드나 보다. 여기도 갈매기 저기도 갈매기. 을왕리 바다. 노을이 궁금했다. 흐리지 않은 날씨라 괜찮다. 평일에도 사람들이 많다..

수원 황구지천의 벚꽃

예전에, 지방민들의 선망 동경 중 하나가 ‘창경원 벚꽃구경’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벚꽃놀이 상춘은 역사가 제법 오래됐다. 벚나무가 언제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1936년에 발표된 김유정의 이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인파 넘실대는 벚꽃놀이에 나선 세 아가씨들의 풋풋한 설렘과 정경이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심쿵한 기분으로 읽은 기억이 있다. 일제시대에도 벚꽃놀이는 우리들의 선망하는 봄문화였던 것 같다. 야앵(夜櫻)은 밤벚꽃의 한자어다. 벚꽃놀이 정경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창경원 벚꽃이 어땠는지 나는 사진조차 한 장 본 적 없다. 지금은 봄철이면 온통 벚꽃 천지다. 전국 어디든 벚꽃명소 아닌 데가 없다. 내 방 창문을 열어도 거기 하얀 꽃잎이다. 그렇더라도 사람들이 꼽는 명소가 있긴..

서산 유기방 가옥 그리고 수선화

유정은 군위 한밤마을을 가고 싶어 했는데 계절적으로 좀 이르다고 대신 선택한 게 서산 유기방가옥이다. 시기적으로 수선화가 한창일 것이었다. 나도 명성만 듣고는 한번도 못 가 본 곳이다. 안날 저녁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아침에 일어나니 여전히 비가 내린다. 예보는 많지는 않아도 하루 종일 내린다고 한다. 꽃구경은 쾌청한 날이라야 하는데 비라니 조금은 설렘이 식었지만 수선화는 노란색이니 이런 우중에서는 더욱 새틋하게 화려하지 않을까. 유기방가옥이란 이름을 대부분 잘 모르는 듯하다. 유기방은 사람 이름이다. 그 일가가 지은 아름다운 한옥이다. 이곳에 오는 관광객들은 가옥보다는 수선화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다. 수선화의 화려함에 묻혀 가옥의 아름다움은 그냥 지나치게 된다. 평일인데다 날도 궂은데 사람들 엄청..

구례 지리산치즈랜드 수선화

나는 노랑색을 참 좋아합니다. 다행히(?) 우리 산내들엔 노랑 꽃이 제일 많아요. 이제 봄철엔 영춘화 산수유 생강나무 개나리 산괴불주머니 민들레 양지꽃 애기똥풀 등 다양한 꽃들이 화려함의 극치를 이룹니다. 그중에서 봄철 노랑의 여왕은 단연 수선화일 듯합니다. 들판에 지천으로 피는 우리 야생화가 아닌 외래종이라 특별히 관리하여 가꾸는 식물입니다. 그래서 전국 곳곳에 수선화 단지를 조성하여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수선화 명소는 많은데 여기는 구례에 있는 치즈랜드입니다. 젖소를 키우는 사유목장입니다. 절정으로 벙근 개화기를 잘 맞춘 덕에 화려한 노랑의 바다를 즐겼습니다. 색도 색이려니와 자기최면에 빠진 꽃미남 나르시스 생각에 더욱 매혹되는 마력이 있습니다. 물론 나는 노랑을 좋아하지만 이 색깔은 오래 ..

단양 사인암

단양과 그 일대를 지나갈 때면 수시로 ‘사인암’이란 관광지이정표가 보이곤 한다. 이름만 많이 들었지 별 관심은 없어 일말의 상식이 없던 나는 암자 이름인 줄 알았다. 얼마나 대단하기에 곳곳에 이정표가 있는 거냐. 몹시 무덥던 어느 주말 그곳을 방문했다. 아하! 암자가 아니라 물가에 병풍처럼 둘러친 암벽이다. 庵이 아니라 巖이다. 지질학 용어로는 수직절리이다. 남조천의 물이 아주 맑고 시원해 여름철 피서객들이 몰려든다. 일대에 펜션과 음식점 등 관광 인프라가 많은 걸 보아 과연 명소인 줄 알겠다. 그간 내가 관심 없이 무심하게 지나쳤다는 생각을 했다. 사인암(舍人巖)이란 이름은 사인 우탁에서 연유했다. 고려 충선왕 때의 학자인 우탁은 중학교 때 공부했던 를 쓴 학자다. 사인(舍人)은 그 당시의 정4품 벼슬..

임실 천담에서 구담까지 섬진강변

천담교를 건너면 천담마을이고 여기서부터 왼쪽으로 섬진강을 끼고 약 3키로미터 걸어가면 구담마을이다. 평범한 시골 강마을이지만 1년에 한때 아름다운 풍경이 되는 곳이다. 길가에 매실나무가 늘어서 있어 매화가 절정일 때 아름다운 길이다. 구담마을은 영화 촬영지라고 한다. 내가 간 때는 매화가 하롱하롱 지고 있어 절정의 풍광은 지나 있었다. 그래도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섬진강의 풍광과 따스한 봄이 주는 느낌이 평화롭고 안온했다. 아주 깡촌이지만 아늑한 분위기의 마을이라 이곳서 한번 살아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대는 닥나무가 많아 예전엔 종이 만드는 작업장들이 많았다고 한다. 강변 언덕마다 솥을 걸어 놓고 한 때는 호황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그 터가 남아 있다. 천담마을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삼진강..

남원 약수암

해탈교를 건너면 실상사다. 해탈. 인간들의 궁극의 목표다. 하지만 그곳에 도달한 자는 없다. 해탈이란 굴레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번뇌 근심 없는 평안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깨달은 자다. 부처가 된 그도 해탈에는 이르지 못했다. 번뇌와 근심 없는 해탈은 죽어서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해탈은 열반의 다른 말이기도 하고 곧 죽음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약수암은 실상사의 부속암자다. 암자를 가려면 실상사를 지난다. 우선은 저 해탈교를 건너야 한다. 죽음으로 가는 다리일까. 실상사는 전에도 여러 번 방문했고 앞으로도 여러 번 찾아올,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찰이라 우정 약수암을 찾아온 이번 길엔 그냥 지나간다. 약수암으로 가는 오솔길엔 노란 산수유 꽃이 한창이다. 암자 사립문 앞까지 차가 올라..

통리장을 가다

태백 통리에는 여전히 장이 선다. 과거 흥성했던 영광은 통리역 폐역으로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5일장이던 것이 현재는 매달 5, 15, 25일에 서는 10일장으로 운영된다. 이 통리장이 생각보다 규모가 상당히 크다. 지난 2월 말에 통리장엘 갔었다. 폭설이 내린 다음 날이었다. 일대는 한 길이 넘는 눈이 쌓여 도로만 간신히 제설이 되어 있을 뿐 거의 대부분이 마비상태로 보였다. 당연히 그날 장은 서지 않았다. 몇몇 주민들의 차가 오갈 뿐 적막 속에 갇힌 마을에 불도저 한 대가 제설을 하고 있었다. 겨울이 긴 강원 산골의 눈만 실컷 보고 돌아왔다. 지난 주 다시 통리를 찾았다. 아주 화창하고 따스한 날이었다. 이곳에도 봄은 가까워서 날은 푸근했으나 풍경은 여전히 한겨울이다. 1년중 반 이상이 겨울인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