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이 수선스럽기에 창을 열어 보니 활짝 벙근 모과꽃이 함초롬히 비를 맞고 있다.
연한 새순 돋을 때 보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느새 저토록 무성한 잎새에다 꽃이 피어 있는 것이다.
한동안 가물어 대기가 부옇더니 이제 말끔해졌을 것이다. 오늘 같은 비 오는 날은 그냥 동네 골목이나 한번 걸어볼 요량으로 우산을 받쳐 들고 나섰다.
문을 나서면 바로 사이길, 즉 ‘사과나무 이야기 길’이다.
몇몇 지역과 더불어 충주는 사과의 명산지다. 사과를 테마로 하여 내가 사는 골목을 포함한 산책길이 있다. 이곳으로 이사하고 꽤 여러 날이 지났지만 오늘에야 처음 나서는 길이다.
1912년 지금의 용운사 근처에 몇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은 게 충주 사과의 시작이라 한다.
계단 끝 두 그루 모형 사과나무에서 ‘사이길’ 산책을 시작한다.
군데군데 벽화가 있는 것 말고는 여느 골목과 별다르지 않은 평범하고,
그닥 아름답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예쁘게 내리는 비의 정취에 동화되어 제법 그럴듯한 풍경이다. 순전히 날씨 탓일 게다.
그러고 보니 전에 괴산 살 적에 얼핏 이 골목길 이야기를 들었던 게 생각이 난다. 이게 그 길이었구나.
이것도 비 탓이겠지. 골목에 인적이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봄은 절정을 지나 나무들은 거개가 낙화가 끝나 가고 있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무성한 녹음과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비에 젖은 오늘은 낙화도 슬픔도 저절로 잦아들었다.
골목길을 걸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의 그리운 감정
설렘의 반복,
내 마음에 쏙 들어왔다.
김동욱
카페 수채화.
사이길엔 카페가 몇 있지만 나는 이 카페가 좋다.
이름이 순진하고 올드하니 올드한 내 감성에 그만이다. 더구나 비 오는 거리에서.
실은 이 카페는 전에도 비오는 날 두 번 왔었다. 오늘 외출의 목적도 정작은 이 작은 카페 앉아서 노닥거리는 거였다. 이유는 없다. 비가 오니까.
매번 나 말고 다른 손님은 보질 못했다. 오늘도 그렇다.
유동인구 없는 골목 안쪽에 들어와 있으니 손님이야 애시 적을 테고 더구나 평일에야 하루 종일 몇 사람이나 올까. 비 오는 이런 날은 더욱 그러할 테고.
카페 이름도 좋지만 작고 아담해서 마음에 좋다. 오늘 같은 이런 창밖 풍경이 좋다.
귀살스런 머릿속 스트레스가 준동하지 않아 적요한 가슴,
앞으로도 가끔 올 이런 날이 좋다.
다음 비 오는 날에도 이 ‘수채화’에 와 앉아서 청승 떨고 갈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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