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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투어] 통영

10월이 되자 귀신같이 기온이 떨어졌다. 계절 생각은 안 하고 습관대로 반팔차림으로 떠난 길이었다. 통영 거리에 내리니 시누적시누적 는개비까지 내리고 있어 오싹 한기가 끼쳤다. 가로수마다 잎을 떨구고 떨어진 잎들은 는개에 흠뻑 젖고 있었다. 바람막이라도 사서 입을까 하다 비의 양은 적고 한낮은 기온이 올라간다는 예보를 믿고 잠시만 추위를 견디기로 했다. 최남단 바다에도 이미 가을이 들어와 있었다. 여러 번 왔던 거리 통영. 길지는 않지만 한때는 주소를 두고 살았던 지방. 매번 같은 장소를 돌아다녔는데 이번엔 맘먹고 그동안 가지 않았던 골목길을 걸어 보기로 했다. 통제영 청마거리 윤이상거리 해저터널 미륵도골목. 같은 한국 땅이면서도 사뭇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 바다로 시작해서 바다로 완성하는 ..

아그로랜드 태신목장

당진에 있는 아그로랜드. 낙농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목장이다. 화려하거나 오밀조밀 세련된 뷰를 자랑하는 곳은 아니지만 드넓은 초지와 산책길 오솔길 또는 곳곳에 산재한 축산동물들의 우리 등 볼 것들이 다양하고 풍성하다. 우리가 가끔 접하는 하얀 모자와 드레스 차림의 유럽 귀부인이 꽃바구니 들고 산책을 하는 명화 속이나, 또는 그런 류의 영화나 소설 등에서 보게 되는 전형적인 목장의 풍경이다. 둘러보는데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길 풍경이 좋다. 소개 글을 써 놓고 보니 목장의 홍보사원인 것 같다. 그치만 세련된 풍경을 기대하고 가면 실망할 수도 있다. 그저 하루 자연과 초록 안에서 거닐며 유유자적 힐링하기엔 정말 좋은 여행지다. 멘델스존이나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 딱 좋을..

호로고루의 해바라기와 함께 여름은 가 버렸다

호로고루는 고구려 사적지다. ‘호로’라는 이름서껀 역사적 의미와 가치는 차치하고 오로지 유명한 해바라기를 보러 갔었다. 보통 염천 8월이 제철인 해바라기인데 호로고루는 국내에서 가장 늦게 피는 곳이다. 매년 9월이면 노란 해바라기 질펀한 명소로 유명해서 올해는 우정 이제나저제나 때를 기다려 갔더랬는데. 이게 뭐니. 해바라기 밭은 생각보다 규모가 훨씬 작아 대가집 화단 같은 수준으로 유명세가 민망했고, 해바라기가 피긴 했지만 어설프고 빈약하고. 게다가 심은 종자는 키도 작아 겨우 사람 무릎에 닿는, 우리가 아는 그 해바라기와는 근본이 달랐다. “해바라기가 참 성의가 없네” 동행인과 이런 농담을 하면서 실망감을 나눴다. 그래도 명색 ‘해바라기축제’라고 관광객들은 많이 밀려들고 있었다. 다들 실망한 표정들이다..

달성 하목정의 배롱나무

올해도 목백일홍이 피었습니다. 달성에 있는 정자 하목정(霞鶩亭)에도 목하 백일홍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곳은 정열적이라기보다는 청초한 느낌의 꽃송이들입니다. 이 정자에 드러누워 도끼자루 썩는 것 모르고 여름 한 철을 보내고 싶지만 시간은 유수라 긴 여름 낮도 어느새 저물어 땅거미가 밀려옵니다. 내게 더위는 쥐약이지만, 더구나 올해 같은 폭염은 거의 지옥이지만 정열의 배롱나무꽃이 주위에 있어 여름은 아름다운 계절이기도 합니다. 이름이 ‘백일홍’인만큼 그녀들이 내뿜는 이 황홀한 아우라는 9월까지 세상을 지배할 겁니다. 하롱하롱 마지막 꽃잎이 지는 날은 가을입니다. 내년엔 또 어디로 가서 그들을 만날까 벌써 마음은 그 여름 속으로.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

하늘재를 넘어 덕주사로

신라 경순왕은 나라를 들어 왕건에게 바쳤다. 마의태자는 신라 중흥의 여망을 안고 궁을 떠났다. 덕주 공주가 동행했다. 그들은 문경에서 월악산으로 향했다. 남매가 넘었다는 고개가 하늘재다. 하늘재는 조령과 이화령 훨씬 이전부터 영남과 경기를 잇는 가장 오래된 교통로라고 한다. 하늘재를 넘어 태자는 미륵사에, 덕주 공주는 수안보 근처에 머물며 신라의 중흥을 발원하며 기도를 드렸다. 태자는 미륵입상을 세우고 공주는 덕주사에 마애불상을 새겼다. 석공도 아닌데 미륵입상을 세우고 여자인 덕주는 마애불상을 새기다니! 옛날 사람들은 죄다 능력자다. 옛 역사를 접하다 보면 불가사의하고 의문이 생기곤 하는 대목들이다. 아무개 대사가 무슨 절을 지었다는 건 허다하고, 선덕여왕은 황룡사 목탑을 세웠다. 거북선을 정말로 이순신..

호미곶 둘레길

더위를 피한다고 피서인데. 피서 나들이 자체가 의미가 없다. 어디를 가든 문밖을 나서면 덥다. 집에 가만히 있는 게 피서다. 올여름, 내 생애 최악의 대홍수가 있더니 곧 이어 최악의 폭염이다. 극과 극의 기후가 갈마드는 시대다. 두렵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기후참상이 언제든지 공습할 것 같다. 장장 열흘의 여름휴가가 생겼다. 막연히 3박 4일의 일정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동해 바닷길이다. 종착지는 정하지 않고 포항 호미곶을 출발하여 사흘을 걸을 요량이었다. 첫날 12km를 걷고 그만 종료해 버렸다. 작열하는 태양열, 뜨거운 바람. 그늘 없는 해파랑길.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일 온열질환으로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뉴스가 봇물을 이루고 있는 중이었다. 나도 이젠 젊은 축은 아니니..

고원의 해바라기

연일 온열로 사망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 폭염의 나날들이다. 내 생애 최악의 대홍수로 참혹했던 때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이젠 내 생애 최악의 폭염이다. 세상의 기후가 지나치게 극과 극의 연속이다. 두렵다. 해바라기의 계절이다. 성하를 넘어서면서 해바라기가 피면 가을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전령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노란 해바라기 평원으로 사람들이 몰려든다. 고원지대 태백은 벌써 피부에 닿는 바람의 감촉이 다르다. 아침의 기온이 서늘하다. 조금 더 있으면 난방을 하고 자야겠다는 게 농담이 아니다. 겨울이 일찍 시작되는 강원도 고원지대. 오늘도 나라 전역이 폭염으로 힘겨운 하루를 보내고 열대야의 이 밤도 역시 고통스럽다. 태백도 낮에는 태양열이 강하게 내리쬐지만 습하고 무더워 죽을 것같은 날씨는 아니다. 여름..

탈고 안 될 전설... 불암사 가는 길

버스에서 내리니 잠시 누꿈했던 비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폭우다. 하늘과 땅이 하나로 맞닿은 듯이 빗줄기들이 빽빽하게 섰다. 한낮인데도 캄캄하고 아득했다. 불암사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유정이 전에 내가 올렸던 글을 읽고는 이 생각났다고 한다. 아. 여러분은 생각나시는지. 고등학교 국어책에 나왔던 유주현의 수필 . 여름날의 소나기처럼 아름답고 투명한 사람과 사랑의 풍경을 눈앞에 보듯 감동적으로 읽었던(실은 우린 그걸 읽은 게 아니고 공부했다). 거기 나오는 것이 남양주 불암사다. 학창시절에 불암사가 궁금했었다. 최불암이 떠올라 킥킥 한번 웃고 수업을 했었다. 궁금하긴 했어도 내 한번 거길 찾아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에서야 몹시 가보고 싶어졌다. 불암사가 아닌, 그때 원두막이..

항아리가 있는 풍경, 순창 고추장마을

순창 고추장민속마을 비 오는 날. 소슬한 이런 풍경 좋다. 어린시절의 그 모든 것이 고스란히 소환된다. 가을, 장작, 가마솥, 시렁, 청국장, 골마지, 버선금줄, 그리고 항아리 장독대.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나의 추억. 고추장마을 길 건너에 메타세쿼이아 길이 이어져 있다. 내내 지짐거리던 비가 폭우로 내리부었다. 가로수 아래는 밤이 온 듯 캄캄해졌다. 나는 메타세쿼이아를 보면 가슴이 뻥 뚫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한다. 저 미추룸하고 헌걸찬 용모와 기상. 거기에 비 내리고 안개 서려 있으니 내가 속한 이 세상 같지 않은 아득한 황홀감이다. 뚜아 에 무아 : 임이 오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