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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소소금밭길

예전 정선 숲에 살 적에, 비어 있던 옆 폐가에 부부가 이사를 왔었다. 십 몇 년을 신안의 염전에 있다가 이젠 힘들고 지쳐 산으로 왔다고 했다. 나이가 나보다 그리 많은 것도 아닌데 겉늙어 보이는 데다 굴왕신 같은 매골이어서 환갑도 더 지나 보였다. 얼굴은 새카만데다 버석거리는 피부. 한눈에도 고생에 찌든 인생이 보였다. 일년 정도 그 폐가에 살다가 큰골로 집을 얻어 갔는데 그 이후로는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그 아저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깝게 지내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마음이 몹시 우울했다. 한 가련한 인생을 떠나보낸 것 같은 슬픔이었다. 내 인생도 그보다 나은 것도 아니면서. 부안마실길의 한 구간으로 왕포에서 곰소까지의 이 길이 ‘곰소소금밭길’이다. 소금을 뿌려 놓은 듯한 ..

신의 정원 옥천 수생식물학습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태복음 7:13-14) 청소년 시절에 루이제 린저의 을 감명 깊게 읽었다. 성경에 나오는 구절에서 모티프를 얻어 쓴 소설이다. 대청호 호안가 언덕에 있는 옥천 수생식물학습원은 저 ‘좁은문’이라 쓴 문으로 들어간다. 허리를 굽혀야 들어간다. 이곳에 오면 결코 서두르거나 조급해하지 말고, 바람보다 앞서가지 말고 천천히 관조하며 거닐라는 배려의 의미로 작게 만들었을 것이다. ‘수생식물학습원’이라는 이름은 교육적인 뉘앙스를 풍기지만 이곳은 멋진 정원이다. 인공적이면서도 그 인공적인 느낌을 최소로 줄여 짜장 느릿느릿 산책하게 되는 정원이다. 유럽풍의 건물과 ..

군위 화본역

이용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지금도 여객열차의 기능을 하고 있다. 대부분은 관광객이다. 역사가 가장 아름답다는 타이틀이 붙은 역. 입장료 1000원이다. 간이역이지만 역무원이 근무한다. 역무라기보다는 입장료 매표업무다. 주차장은 있는데 내방객이 많아 구석구석 빈자리 찾아 헤매다 겨우 골목길에 비집고 주차함. 화본역 꽃 진 물자리, 젖꼭지 달렸네 자다 잠 깬, 꽃물 든 목숨이네 앉은 자리 꽃 진 자리 꽃자리 선 자리 꽃자리 꽃 뿌리 눈물 뿌리 방울새 어디 서서 우나 배꽃. 메밀꽃, 메꽃 배꼽 눈 보이네, 배꼽도 서 있네 녹물 든 급수탑 억새풀 고개 숙인 목덜미 눈물 포갠 기다림, 설렘 흰 겨울 눈꽃에 젖네 어머니 젖꽃 어머니 젖꽃 젖꽃 실뿌리, 실, 실, 실, 웃는 실뿌리 오솔길, 저녁 낮달로 떴네 어머니..

단양 도담삼봉

단양군에서는 이 도담삼봉을 단양 명소 제일 으뜸으로 선정하고 홍보하고 있다. 글쎄다. 단양이 워낙 명승지가 없는 건지 내 보기에 이게 첫번째라는 건 동의하기 어렵다. 그랬는데 예전의 사진을 보고는 과연 명승지라는 걸 비로소 인정한다. 충주댐이 생기기 이전의 도담삼봉은 가히 절경이다. 환경단체에서 또는 내가 왜 댐건설을 반대하는지 명분이 선다. 물에 잠긴 도담삼봉은 더이상 단양제일경이 아닌 것이다. 어디 충주댐 뿐이겠는가.

원주 뮤지엄산

오랜만에 유정으로부터 전화. 언뜻 기억은 희미하지만 최소 2년은 넘은 것 같다 그를 만난 지가. 돈거래를 하는 사람은 만나기 불편해 표 안나게 외면했었는데 원주 새벽시장을 구경 가자고 전화를 해 왔으니 차마 거절은 못하여 정말 오랜만에 두 사람만의 여행. 꼭두새벽에 눈 비비고 일어나 양평에서 그와 만나 차 하나를 타고 새벽시장 둘러보기. 그리고 뮤지엄산. 유명소라 익히 이름은 들어 알고 있어 언젠가는 가 보리라 막연한 계획을 갖고는 있었는데 덕분에 방문. 뭔가 아우라는 있는 것 같은데 범부의 눈으로는 당최 알 수 없다. 백남준의 작품을 볼 때처럼. 백남준의 작품이니 고품격 걸작이려니 짐작만 하지 정작은 어떻게 감상해야 그 진수를 누낄 수 있는 건지 난해하기만 했던. 뮤지엄산 방문기도 역시 그렇다. 내 심..

보은 말티재

어느새 몸 오싹하게 아침공기가 싸늘하다. 법주사 입구 오리숲길은 겨울 같은 느낌. 이 알싸한 느낌이 좋다. 정신이 맑다. 이 청량한 숲길은 월정사 숲길과 더불어 가장 힐링이 되는 길이다. 오늘은 이 길이 아니라 법주사로 들어가는 관문, 말티재가 목적지다. 함양의 지안재 흑산도의 열두구비길과 더불어 3대 구불길이다. 이라는 테마로 포스팅하지만 전망대에 올라 내려다보는 뷰 말고는 그닥 볼 건 없다. 전망대도 최근에야 생겼으니 그 전에는 길이 구불거린다는 것만 짐작할 뿐 그것을 눈으로 보지는 못했다. 오르내리는 차들만 힘겨울 뿐이었다. 지금도 역시 운전하기 난감한 열구비 꼬부랑길이다. 걷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길이 ‘아름다운 길’이고 말티재는 한 장의 사진이 아름다운 길이다. 고갯마루에에 만발한 가을꽃들이 선연..

선운사 꽃무릇을

이태 전 가을 이맘때 영광 불갑사의 꽃무릇을 보았지요. 불타듯 빨간 촛불들을 난생 처음 대했습니다. 그 강렬한 충격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올해는 고창 선운사를 갔습니다. 선운사의 꽃무릇이야 워낙 유명한 곳이니 두말할 필요 없으리라 짐작은 했었지만 실제로 본 그곳 꽃무릇은 참말 장관이었습니다. 국내 최대 규모라고 해요. 과연 불갑사의 꽃무릇을 본 눈에 선운사의 그것은 또한 뭐라 표현할 수 없어 후기를 쓰기가 난감합니다. ‘꼭 사람이 활활 불길 위를 걷는 것 같아’ 지인에게 보낸 이 한 줄 문자가 내가 끄집어낼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이었고 지금 보니 나름 적절하고 괜찮은 소감인 것 같습니다. 눈가는 대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 여러 장 담아와 풀어 놓으니 만족할만하게 사진들이 잘 나왔습니다. 어쭙잖은 후기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