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한국의 아름다운 길

곰소소금밭길

설리숲 2021. 10. 5. 21:46

 

예전 정선 숲에 살 적에,

비어 있던 옆 폐가에 부부가 이사를 왔었다.

십 몇 년을 신안의 염전에 있다가 이젠 힘들고 지쳐 산으로 왔다고 했다.

나이가 나보다 그리 많은 것도 아닌데 겉늙어 보이는 데다 굴왕신 같은 매골이어서 환갑도 더 지나 보였다.

얼굴은 새카만데다 버석거리는 피부. 한눈에도 고생에 찌든 인생이 보였다.

 

일년 정도 그 폐가에 살다가 큰골로 집을 얻어 갔는데 그 이후로는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그 아저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깝게 지내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마음이 몹시 우울했다. 한 가련한 인생을 떠나보낸 것 같은 슬픔이었다. 내 인생도 그보다 나은 것도 아니면서.

 

 

 

 

 

부안마실길의 한 구간으로 왕포에서 곰소까지의 이 길이 ‘곰소소금밭길’이다.

소금을 뿌려 놓은 듯한 봉평의 메밀밭처럼 문학적이고 낭만적인 길이 아니다.

평생을 뻘에 엎디어 살아간 아버지들의 고단함이 서린 길이다.

 

 

 

 

 

 

 

 

가장 흔한 것은 커피점이다.

시골이라도 국도변에 커피점 하나 정도는 있다.

카페는 내게 자동차의 주유소 같은 존재다.

설사 커피점은 없어도 편의점이라도 있기 마련이니 요즘의 트렌드가 홀로 가는 여행자에게는 얼마나 즐거운 행운인지.

 

 

 

 

그의 가련한 인생을 만든 건 염전이었다고 나는 근거 없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만큼 염전 일은 고된 일이다.

직업은 귀천이 없다지만 노동의 강도로 따지자면 염전 일은 천한 일이란 걸 부정할 수 없다.

 

 

그 후로 여행길에서 언뜻언뜻 염전 근처를 지날 때면 착하기만 했던 그 아저씨의 새카만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근로勤勞는 아름답지만 노동勞動으로 찌든 삶은 아름답지 않다.

 

 

 

 

 

 

 

 

 

 

바닷물을 끌어와 저수지에 가두었다가 다시 증발지로 데려온다.

당연 물이 증발해야 소금이 되니 고된 소금만들기 노동이란 햇볕과의 싸움이다.

소금을 만드는데 가장 핵심인 햇볕이 염전의 인간들에겐 고통인 아이러니.

봄철의 차덖기도 그와 한가지다. 뜨거운 불이라야 차가 되지만 그것을 덖는 사람의 손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

 

증발지의 바닥은 갯벌이다. 이 갯벌이 질 좋은 소금의 비밀이다. 제1증발지에서 염도 3~15%를 만들고 제2증발지에서 15~25%의 염수가 된다. 이 과정은 보통 보름이 걸린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바닥에 타일을 깐 결정지로 이동한다. 타일을 얼마나 정교하게 깔았는지 한 치의 틈도 없이 꼭 거대한 거울 같다. 이곳에서 이틀 정도 증발하면 하얀, 아주 새하얀 소금이 남는다. 이 사람들은 소금꽃이 온다고 한다.

염도 25% 정도가 가장 맛있는 소금이라 하며 곰소의 소금이 그렇다고 한다. 곰소소금꽃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단순히 모래해안에서 만든 소금은 짠맛이 다이지만 곰소처럼 갯벌에서 증발한 소금은 단맛이 난다고 한다. 단짠소금이다.

 

소금은 가장 잘 났지만 배추와 고등어 앞에서 잘난 체를 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서포트만 한다. 소금을 목탁에 비유하는 이유일 것이다.

 

 

 

 

 

 

 

 

 

 

 

 

 

 

늘 그렇듯이 저 먼 바다로부터 불어와 개펄을 지난 바람은 오늘도 여지없이 그렇게 왔다가 가곤 한다.

사람의 인생 역시 그같이 반복되는 것임을.

죽어야 끝나는 이 고통, 환멸.

죽어도 소멸되지 않는 무거운 업장들.

머리카락이 죄다 뽑힐 듯한 뜨거운 태양열을 이고 걸으면서도 차마 덥다는 하소연을 스스로에게 하지 못했다.

개펄의 오후는 유난히도 더 무더웠다. 간단없이 불어오는 바람이지만 습이 가득한 바람은 오히려 숨이 막혔다.

 

이제 저만치 서늘한 바람이 오고 해가 짧아지면 이 소금밭의 노동도 한 해를 마감하게 된다.

11월의 김장배추를 비롯해 우리의 식탁엔 그들의 땀이 어린 소금꽃이 올라올 것이다.

 

 

 

 

 

 

              소금꽃

 

      11월 곰소항에 황혼이 지고 있었다
      염전을 걸으며 우리는
      소금창고 검은 판때기 벽면에 핀 소금꽃
      노을 속에서 더 하얗게 반짝이는
      바다의 내밀한 말씀을 읽고 있었다
      "詩를 業으로 삼았으면, 저쯤은 되어야지"
      전업의 길을 가려는 제자에게
      스승은 소금 같은 시 정신을 전해 주시고 싶었으리
      서해 뻘밭을 밀물로 달려와
      소금이 된 바다의 말씀이 피운 꽃, 소금꽃
      나는 시의 말씀이 피울 꽃에 대한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뜨거워진 내 눈시울이
      노을보다 붉게 젖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 마음 속에 들어가 소금이 되는 시
      결핍의 행간에 간을 치고 상처를 씻어내고
      마침내 꽃을 피우는
      시의 소금창고 하나를 가질 수 있었다
      십리 밖 내소사 범종소리에 귀가 열리는
      곰소항의 저녁
      짙어가는 세상 어둠을 가르며
      지상의 별이 된 소금꽃 빛나고 있었다

 

                                                     배한봉

 

 

 

 

 

 

 

곰소 앞바다와 염전의 풍경은 칙칙한 무채색이다.

그런데 공평하게도 하늘은 역시나 벽공의 아름다운 색이다.

눈을 들어 푸른 하늘을 보며 문득 나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토착민인지 아니면 잠시 여행지를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인지 뜬금없는 의문이 생겼다.

 

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

캔자스(Kansas)의 노래 가사다.

우리는 모두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일 뿐이다.

영어 가사를 알고 있는 몇 안되는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니

나는 바람 앞에 잠시 선 나그네라는 걸 자각한다.

나뿐이겠는가. 우리는 모두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 같은 존재들이라는 것을.

 

 

 

 

 

 

 

 

 

 

곰소는 온통 젓갈 천지다.

이곳에서는 늘 비릿한 바닷냄새가 난다.

충청도 강경에서 맡던 숙성된 젓갈냄새와는 또 다르다.

 

곰소는 바다가, 갯벌이, 햇빛이

그리고 바람이 고스란히 들어와 앉았다.

 

 

 

 

            김현식 : 한국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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