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2394

제주 비자림로

제주도 동부지역을 반으로 가르며 사려니숲에서부터 동쪽 해안까지 뻗은 1112번 도로. 비자림로다. 이름은 비자림로이지만 비자나무는 없다. 이 길을 따라 거뭇하게 숲을 이룬 건 삼나무다. 길의 끄트머리 쯤에 비자림이 있어 도로명을 그리 지었을 것이다. 이 삼나무길이 도보여행자들에게는 아주 근사한 트레킹 코스가 될 수 있는데 아쉽게도 그렇지 못하다. 왕복 2차선의 좁은 도로에 보행자가 걸을 수 있는 갓길이 없다. 섬 동편 성산과 우도로 가는 관광 요충로라서 관광객이 많은 주말엔 차량이 몰려 언감생심 걸을 엄두조차 못 낸다. 그나마 한적한 평일을 택해 그 풍경을 담았다. 여러 날을 찜통처럼 삶아대더니 하늘이 흐려졌다. 기상예보를 통해 비소식을 접한 터라 미리 우산을 챙겨 들고 온 터였다. 그리고 염천을 식히며..

동두천 니지모리 스튜디오

동두천 외곽에 있는 니지모리 스튜디오. 일본 에도시대의 풍광을 고스란히 재현했다. 니지모리의 뜻은 무지개숲(にじもり)이다. 로 유명한 고 김재형 감독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드라마 영화촬영으로 일본을 다녀오는 때가 많아 그 경비를 줄이는 게 어떨까 하고 구상을 해서 조성한 촬영지라고 한다. 보통 ‘일본인마을’이라 일컫는데 마을은 아니고 이름 그대로 스튜디오다. 그래서 실제의 일본보더 더 일본 같다는 평이다. 원래는 사진, 또 영화촬영이 주목적인데 작년부터 일반인에게도 개방했다. 입장료가 2만원이다. 주차료 3천원도 별도로 받는다. 입장료는 좀 비싸지만 그런대로 가성비는 괜찮은 편이다. 료칸도 있고 음식점도 있고 일본식카페 기념품가게 등 체험과 함께 돈을 쓸 콘텐츠가 많다. 료칸(旅館이)란 여관이다...

남해 금산 그리고 은모래비치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이성복 이성복의 시 을 읽고 서울서 새벽 첫 버스를 타고 다시 군내버스를 타고 허위허위 금산을 올라 보리암에 올랐다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예전에 본 적이 있다. 그 여정이 얼마나 먼지 고스란히 하루를 썼다고 한다. 어스름 저녁이 내리는 암자에 앉아 인생 가장 행복한 순간을 경험했다고 한다. 한 시인의 감성에 빠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난 그 여행자를 존경한다. 어쩌면 해수관음상 난간에 여전히 그가 앉아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은모래해변에 캠프..

철원 소이산에 산수국이 만발했다

파란색도 아닌 것이 보라색도 아닌 것이 어느 때는 노랑에 어느 때는 하양, 또 다른 때는 분홍. 종잡을 수 없는 그녀의 꽃말은 그래서 변덕, 변하기 쉬운 마음 어쩌고저쩌고. 산수국을 보러 떠나온 길이지만 우리를 맞는 건 눈부시게 하얀 개망초입니다. 소금을 뿌려 놓은 듯하다고 이효석은 메밀꽃을 묘사했거니와 그 표현은 이 개망초에도 그대로 들어맞습니다. 이 꽃이 흐드러지면 계절은 깔축없이 여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꽃. 너무나 흔해 빠져서 고운 대접을 못 받고 있지만 기실은 청초하고 순결한 매력으로 이보다 더한 꽃이 없습니다. 산수국은 어둑신하고 습한 곳에 삽니다. 그 음습한 풍경을 아름답게 장식한 꽃. 철조망 너머 그네들도 다 똑같은 자태 고운 꽃입니다. 6·25 72주년이었습니다. 휴전선 너머 ..

고창 청농원 라벤더

수많은 허브가 있어 그중에서도 가장 이름이 대중화되어 있으며 실제로도 많이 씌기도 하는 라벤더. 그 향과 보라색을 사람들이 사랑하여. 이때쯤이면 전국 곳곳의 라벤더 농장은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고창 청농원의 라벤더도 인기가 높다. 좁은 시골길에 차들이 모여드니 입장하는데도 장시간 대기한다. 농장이 그닥 큰 규모는 아니지만 보랏빛으로 질펀하게 깔린 풍경이 좋다. 내가 갔을 때는 약간은 덜 개화했다. 6월 둘째 주가 가장 적기일 듯하다. 어딜 가나 만나게 되는 인싸들. 카메라 켜놓고 모델처럼 포즈 취하다. 늘 보는 낯익은 광경이어서 생경하지도 않고 사람들도 무관심하긴 하지만 나는 도저히 못하겠다. 혼자서 저러고 있으면 민망하기 그지 없을 것이다. 좀 뻔뻔해야 하지만 나는 도저히... 엠마뉴엘 : Aquare..

영흥도 가족 모임

띠앗머리가 구순하긴 하긴 하지만. 흔한 ‘현실남매’ 같은 가풍은 아니어서 치고 받고 싸우고 못된 짓은 없이 그냥 데면데면한 형제들이다. 돌아가신 엄마가 평생을 자랑처럼 말한 게 우리 애들은 한번도 싸우질 않아서 그게 난 제일 좋아. 싸우질 않으니 정도 그리 깊지는 않을 터, 다 장단점이 있겠지. 부모님이 계시면 그 덕에 강제로라도 모여서 얼굴 보고 음식 먹고 하였지만 이후로는 구심점이 없으니 모일 명분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선견지명일까. 우리 형제들은 언제부턴지 연말이면 한번씩 모이기로 암묵적인 약속이 있었는데 이제껏 잘 지켜 왔다. 처음엔 번갈아 가면서 누구 집에서 개최를 했지만 나이가 먹고 움직이기 벅찬 연륜이 되니 그것도 만만하지가 않다. 이제는 누구 집이 아닌 여행지에서 하루 숙박하면서 지내는 편..

거센 바람 거친 파도 가파도

섬과 바다는 광풍이었다. 가파리(가오리)를 닮아 가파도라 했다던가 파도가 많아 가파도라 했는가. 운진항에서부터 섬까지의 짧은 뱃길은 높은 파도로 일렁거렸다.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곳은 늘 이리도 바람 세고 파도가 높다고 했다. 그러니 이 섬의 이름은 파도가 거센 加波島, 또는 加波濤라 하는 게 적당할 것 같다. 상동포구에 도착했지만 거센 파도에 여차하면 전복될 듯이 배는 위태해 보였다. 선장은 여기 바다는 늘 이렇다는 방송으로 불안해하는 승객들을 안심시킨다. 가까스로 접안을 하고도 선체는 널뛰듯 오르내렸다. 위태롭게 선착장에 오르고 나서야 승객들은 십년감수 마음이 놓였다. 가파도는 넘실대는 보릿물결이 장관이라는데 수확이 끝난 들판은 텅 비었다. 허허롭다. 첫 추위를 코앞에 둔 늦가을 들녘 같다. 빈..

영랑생가 그리고 모란 이야기

6월의 꽃, 하면 모란이 젤 먼저 떠오른다. 화투장의 6월이 목단이기도 하고 김용호의 시에 조두남이 곡을 붙인 가곡 의 노랫말에도 6월의 꽃으로 나온다. 모란, 하면 역시 김영랑이다. 영랑생가에 또 다녀오다. 5월 초였다. 그러나 모란은 없다. 꽃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초당 정원의 모란들은 열매만 달고 있었다. 몇 번째인지 모른다. 모란을 보려고 영랑생가를 찾은 게. 그러나 또 실패. 도대체 언제 가야 볼 수 있는겨? 4월에 가야 하나벼. 영랑생가 뒤울 대나무숲 뒤쪽 언덕에 세계모란공원이 있다. 거창하게 ‘세계모란공원’이라기에 규모도 있고 온갖 모란이 만발하려니 했더니, 그저 여느 조그만 공원이나 다름없고 모란도 그저 그렇다. 그마저도 이미 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도 영랑생가에서는 보지 못한 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