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가장 광활하다는 억새평원 사자평.
오래전부터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번번이 미루다가
이번 가을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말겠다는 집심으로 벼르다가 드디어 올랐습니다.
무슨 큰 과업을 완수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조금은 비장하게.
사자평으로 가는 길은 여러 루트가 있지만 그중에 가장 짧고 난이도가 쉬운 표충사 코스로 잡았습니다.
밀양 표충사로 들어가는 길은 수려한 소나무 숲길이 장관입니다. 솔숲으로 아침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풍광은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환상의 풍경이었습니다.
고찰 표충사는 무슨 전각을 더 짓는지 공사로 어수선하기 짝이 없습니다.
10월 중순 한가을이지만 아침 공기는 싸늘해 입김이 나옵니다. 더구나 산악지역의 가을은 예상보다 훨씬 깊어져 있기 마련입니다.
표충사 옆댕이를 돌아 만만치 않은 등산로를 오릅니다.
허위단심 헉헉거리며 꽤나 체력을 소비하다 보니 드디어 억새 꽃이삭들이 보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사진에 보이는 대로고,
무슨 감상문을 쓴다는 건 군더더기일 것 같습니다.
명성대로 참 장관입니다.
그런데 2프로 부족해서 섭섭한 건,
억새꽃의 색이 화려하지 않습니다. 이곳의 억새는 갈색을 띄고 있습니다. 또 꽃이삭이 다른 곳의 그것보다 빈약한 특성이 있어 더욱 그렇습니다.
정선 민둥산의 풍성하고 새하얀 꽃이삭, 화려한 억새를 본 눈으로는 조금 서운했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산정에 질펀하게 펼쳐진 대자연의 풍광은 경이롭습니다.
진종일 햇빛 가득하고 바람 쓸고 지나가던 10월의 어느 멋진 날이었습니다.
때로는 이별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가스등이 켜진 추억의 플랫폼에서
마지막 상행선 열차로 그대를 떠나보내며
눈물에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어둠이 묻어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터벅터벅 긴 골목길 돌아가는
그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 없는 시대의 이별이란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
작별이 축축한 별사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총
제 갈 길로 바쁘게 돌아서는 사람들
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 흘려 주겠는가
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
내 생에 가장 깨끗한 눈물 적시고 싶은 것이다
정일근 <가을 억새>
어느덧 찬 것보다 따뜻한 음료가 당기는 계절.
사자평을 떠나 내려오는 등뒤로 차가운 골바람이 따라 내려왔습니다.
또 그 뒤로는 겨울이 머뭇거리며 발맘발맘 따라오는 것도 먼발치로 보였습니다.
따뜻한 커피가 좋은 오후.
해묵은 숙제 하나를 끝낸 홀가분한 오후였습니다.
슈베르트 즉흥곡 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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