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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곶 둘레길

더위를 피한다고 피서인데. 피서 나들이 자체가 의미가 없다. 어디를 가든 문밖을 나서면 덥다. 집에 가만히 있는 게 피서다. 올여름, 내 생애 최악의 대홍수가 있더니 곧 이어 최악의 폭염이다. 극과 극의 기후가 갈마드는 시대다. 두렵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기후참상이 언제든지 공습할 것 같다. 장장 열흘의 여름휴가가 생겼다. 막연히 3박 4일의 일정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동해 바닷길이다. 종착지는 정하지 않고 포항 호미곶을 출발하여 사흘을 걸을 요량이었다. 첫날 12km를 걷고 그만 종료해 버렸다. 작열하는 태양열, 뜨거운 바람. 그늘 없는 해파랑길.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일 온열질환으로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뉴스가 봇물을 이루고 있는 중이었다. 나도 이젠 젊은 축은 아니니..

고원의 해바라기

연일 온열로 사망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 폭염의 나날들이다. 내 생애 최악의 대홍수로 참혹했던 때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이젠 내 생애 최악의 폭염이다. 세상의 기후가 지나치게 극과 극의 연속이다. 두렵다. 해바라기의 계절이다. 성하를 넘어서면서 해바라기가 피면 가을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전령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노란 해바라기 평원으로 사람들이 몰려든다. 고원지대 태백은 벌써 피부에 닿는 바람의 감촉이 다르다. 아침의 기온이 서늘하다. 조금 더 있으면 난방을 하고 자야겠다는 게 농담이 아니다. 겨울이 일찍 시작되는 강원도 고원지대. 오늘도 나라 전역이 폭염으로 힘겨운 하루를 보내고 열대야의 이 밤도 역시 고통스럽다. 태백도 낮에는 태양열이 강하게 내리쬐지만 습하고 무더워 죽을 것같은 날씨는 아니다. 여름..

탈고 안 될 전설... 불암사 가는 길

버스에서 내리니 잠시 누꿈했던 비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폭우다. 하늘과 땅이 하나로 맞닿은 듯이 빗줄기들이 빽빽하게 섰다. 한낮인데도 캄캄하고 아득했다. 불암사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유정이 전에 내가 올렸던 글을 읽고는 이 생각났다고 한다. 아. 여러분은 생각나시는지. 고등학교 국어책에 나왔던 유주현의 수필 . 여름날의 소나기처럼 아름답고 투명한 사람과 사랑의 풍경을 눈앞에 보듯 감동적으로 읽었던(실은 우린 그걸 읽은 게 아니고 공부했다). 거기 나오는 것이 남양주 불암사다. 학창시절에 불암사가 궁금했었다. 최불암이 떠올라 킥킥 한번 웃고 수업을 했었다. 궁금하긴 했어도 내 한번 거길 찾아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에서야 몹시 가보고 싶어졌다. 불암사가 아닌, 그때 원두막이..

항아리가 있는 풍경, 순창 고추장마을

순창 고추장민속마을 비 오는 날. 소슬한 이런 풍경 좋다. 어린시절의 그 모든 것이 고스란히 소환된다. 가을, 장작, 가마솥, 시렁, 청국장, 골마지, 버선금줄, 그리고 항아리 장독대.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나의 추억. 고추장마을 길 건너에 메타세쿼이아 길이 이어져 있다. 내내 지짐거리던 비가 폭우로 내리부었다. 가로수 아래는 밤이 온 듯 캄캄해졌다. 나는 메타세쿼이아를 보면 가슴이 뻥 뚫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한다. 저 미추룸하고 헌걸찬 용모와 기상. 거기에 비 내리고 안개 서려 있으니 내가 속한 이 세상 같지 않은 아득한 황홀감이다. 뚜아 에 무아 : 임이 오는 소리

온빛자연휴양림

생활하다가 칼에 손가락만 살짝 베어도 무지 신경 쓰이고 불편하다. 커피 마시고 컵 씻는 것조차도 자연스럽지가 못하다. 그러니 다리를 다치고 팔목을 다치고 하는 것들은 말해 무엇하리. 발목 한 군데 부상을 당하고 평생 불구로 살고 있는 사람들도 우리는 많이 보았다.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두 발 두다리 멀쩡하니 내 좋아하는 여행 다니고, 시력은 좋지 않아도 두 눈 멀쩡하니 여행지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껏 본다. 귀 멀쩡하니 또 좋아하는 음악 듣고 입 멀쩡하니 좋아하는 커피도 마신다. 두 손 멀쩡하니 카메라도 찍고 자판도 두드리고, 맛난 커피 사먹고는 지갑 꺼내 결제하는 것도 자유자재 손쉽게 한다.. 대통령 내외분의 어이없는 행태들에 화가 나는 걸 보면 정신도 멀쩡한 것 같고. 서서히 노화가 돼서 기능..

도시투어 서울 한남동 골목

카페 자리가 꽉 찼다. 운 좋게 빈자릴 차지하고 앉다. 월요일이다. 저녁 8시 32분. 웬 여자들만 이래 많지? 남자는 없다. 여자들 소굴에 나만 청일점으로 비비고 앉았다. - 주말에 애인들과 데이트하고 월욜엔 여자들끼리 만나서 애인 자랑도 하고 흉도 보고 소개팅 갔다 바람 맞은 얘기도 하고 수다 떠는 거예요 - 그녀가 제법 그럴듯하게 설명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남자가 어째 하나도 없는 건가. 놈들은 도대체 어디서들 방황하고 있나. 여자들이 지들을 저렇게 씹어대고 있는데... 월요일 저녁 8시 32분이다. 한남동 골목길을 거닐다. 화려하거나 세련된 골목은 아니라도 구석구석 구경하면서 한나절 놀기에 제법 매력이 있다. 인근 이태원 거리와 연계되어 서서히 핫플로 부상하고 있는 이 골목들이다. 여기도 온통 여..

휴휴암

어느 해 연분이었는지. 유치한 치기로 방랑의 길을 다니던 시절이었다. 오색에서 대청봉을 넘어 용대리로 내려간 적이 있었다. 영시암 조금 지난 곳에서 스님 하나와 동행을 하게 되었다. 동행이라고는 하지만 처음 눈 마주쳤을 때 합장한 것 말고는 둘 다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의 뒤를 발맘발맘 말없이 걷는 게 다였다. 신기하게도 묵언이었지만 많은 대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석양이 가까운 무렵이라 곧 어둠이 내리면 혼자 밤길 가는 게 걱정이더니 스님이 앞에서 걸어주니 천군만마 얻은 듯 든든했었다. 백담산장 쯤 왔을 땐 어둑신하게 땅거미가 내렸다. “혹 사시다가 좀 버겁다 싶으면 관세음보살을 부르세요” 말마디 없던 우리 둘 사이에 느닷없이 일방적으로 건너온 말이었다. 생뚱스러웠다. 난데없는 관세음보살이라..

차밭이 있는 풍경 다솔사

다시 다솔사. 몇 년 만에 갔더니 상전벽해가 되어 있었다. 우선은 대규모 주차장이 번듯하게 들어앉았다. 이젠 여기도 관광지가 다 됐구나. 다솔사로 들어가는 길이 아름답다. 선차도량이라 해서 처음에 茶率寺로 알았는데 多率寺다. 이름처럼 소나무숲이 장관이다. 그것보다는 쭉쭉 뻗은 삼나무 편백나무 숲길이 빼어나다. 경내는 털머위로 뒤덮였다. 노란 꽃이 필 무렵엔 이것도 볼만하겠다 싶어 다음엔 언제 올까를 재 본다. 푸르른 나날이다. 사시사철 푸른 차나무의 고고함이 미쁘다. 일주문 없는 들머리는 울창한 나무숲이다. 이 길에 서면 정신이 맑아져 그때 문득 세계 모든 것은 空이다. 대양루는 설법도 하고 다솔사에 대한 자료를 전시해 놓았었는데 이번에 가니 출입을 통제해 놓았다. 적멸寂滅이 아닌 적막寂寞의 공간이 돼 ..

미인폭포를 찾아 심포협곡 속으로

강원도라 심심산천엔 우리가 모르는 비경들이 많기도 하여라. 너무 높아 기차도 힘들어 스위치백이라는 방법으로 힘겹게 태백산맥을 넘었던 추억이 있었다. 그곳에 깊은 협곡이 있다. 심포협곡. 여전히 사람이 드나들지 못하게 험한 지형이다. 뭐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고 관에서는 수식어를 붙였지만 어불성설, 낯간지러운 수식어다. ‘그랜드’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지는 아닐 테고. 그랜드캐니언의 모태끝을 떼어다 놓은 정도라 할까. 그래도 어쨌든 강원도에서만 볼 수 있는 심심유곡의 절경이다. 심포협곡은 역암층 지질이 강물에 침식돼 만들어진 협곡으로 현재 그 깊이가 270여 미터라고 한다. 이 협곡에 장쾌한 폭포와 신비스런 용소가 있어 거기까지 사람들에게 개방됐다. 골벽을 타고 거의 수직으로 내려간다. 친절하게도 나무데..

식물의 낙원, 외도 보타니아

보타니아. 거제 장승포항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가면 외도다. 실제로는 30분 소요되는 뱃길이지만 해금강을 유람하는 선사측의 프로그램 코스라 갈 때는 한 시간이고 나올 때는 30분이다. 나는 장승포에서 배를 탔지만 외도로 가는 배편은 구조라 와현 지세포 도장포 다대항 등에서 출항한다. 어느 곳에서 타든 소요시간, 배삯과 입장료가 동일하다. 외도 자체가 보타니아고, 보타니아가 곧 외도다. 보타니아는 식물의 낙원(botanic + utopia)이란 뜻이다.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정원이다. 오롯이 인공으로 가꾼 곳으로 구석구석 허투루 내버려 두지 않은 섬세한 예술품이다. 초록의 계절인 지금이 가장 아름다운 철일 것 같다. 생전 처음 보는 기화요초들이 즐비하다. 문득 전설의 섬 이어도를 생각했다. 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