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2404

[도시투어 광주] 양림동 양림산

양림동. 지금의 광주가 시작된 곳입니다. 한 세기 전 개신교 선교사들이 터를 잡으면서 들어선 이 지역 최초의 교회, 근대병원, 학교, 서양식 주택 등이 지금도 산재해 있습니다. 유진 벨(배유진) 오웬(오기원) 엘리자베스 세핑(서서평) 최홍종 목사 윤형숙 열사 등의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호남신학대를 지나 이웃한 사직산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 양림동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봅니다. 앞에 보이는 게 호남신학대학이고 저 뒤편으로 수피아여고가 있습니다. 양림산은 산이라기보단 언덕이라 하는 게 걸맞은 아주 작은 산이지만 이 자락의 골목길과 자드락길을 걸으면서 기독교 신앙에 얽힌 수많은 근대문화유산을 만납니다. 양림산은 개신교의 심장과도 같은 곳입니다. 양림동엔 교회도 많아 ‘양림교회’만도 셋입니다. 이곳에 와서 양림교..

해파랑길 가을 속으로

46코스는 두어 해 전 추석에 다녀왔으므로 이번엔 45코스를 걷기로 했다. 그 많은 해파랑길 구간 중에서 45코스를 선택한 건 이렇게 싱거운 거였다. 장사항에서 설악항까지. 이 구간은 호젓한 바다풍광을 즐기며 걷는 구간은 아니다. 항구와 해수욕장들로 이어져 있어서 관광 인파가 북적거리는 휴양지가 대부분이다. 낮보다는 밤이 더 피어나는 유흥가의 구간이다. 이 구간의 알짬은 아무래도 영랑호수 둘레길이다. 처음 걸어본 영랑호. 가을이 짙어지는 호수의 오후가 고즈넉하니 좋다. 8km나 되는 제법 먼 길이다. 어스름 저녁이 내리고 있는 잔잔한 호수. 설악 능선 뒤로 넘어가는 석양이 호수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꼭 영랑호라서 아닌, 가을의 여행은 어디든 좋다. 그리고 영랑호에서의 가을 저녁은 더욱 행운이었다는 자평이..

거창 감악산의 아스타국화

처음 보는 꽃인데 아스타국화라고 합니다. 거창 감악산 산정은 목하 보랏빛 세상입니다. 이곳은 ‘별바람언덕’이라는 예쁘기도 하고 한편 유치한 느낌도 있는 이름이 있네요. 한가을의 아스타국화가 명물이지만 일출과 일몰, 그리고 밤하늘의 별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나는 그냥 꽃만 구경하고 왔습니다. 어떻게들 알고 오는지 사람들이 바글바글합니다. 해발 9백 미터나 되는 산을 허위허위 올라갑니다. 내려올 때는 시종 브레이크를 밟아야 해서 파열하지 않을까 내내 불안했던 운전이었습니다. 어느 해 여름에 올랐던 1.200미터 평창 청옥산의 육백마지기 때도 엄청 겁이 났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여름, 육백마지기를 뒤덮었던 샤스타데이지의 하얀 물결이 지금도 눈에 암암합니다. 그때는 흰색의 바다, 이 가을 별바람언덕은 보라의 ..

[도시투어] 통영

10월이 되자 귀신같이 기온이 떨어졌다. 계절 생각은 안 하고 습관대로 반팔차림으로 떠난 길이었다. 통영 거리에 내리니 시누적시누적 는개비까지 내리고 있어 오싹 한기가 끼쳤다. 가로수마다 잎을 떨구고 떨어진 잎들은 는개에 흠뻑 젖고 있었다. 바람막이라도 사서 입을까 하다 비의 양은 적고 한낮은 기온이 올라간다는 예보를 믿고 잠시만 추위를 견디기로 했다. 최남단 바다에도 이미 가을이 들어와 있었다. 여러 번 왔던 거리 통영. 길지는 않지만 한때는 주소를 두고 살았던 지방. 매번 같은 장소를 돌아다녔는데 이번엔 맘먹고 그동안 가지 않았던 골목길을 걸어 보기로 했다. 통제영 청마거리 윤이상거리 해저터널 미륵도골목. 같은 한국 땅이면서도 사뭇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 바다로 시작해서 바다로 완성하는 ..

아그로랜드 태신목장

당진에 있는 아그로랜드. 낙농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목장이다. 화려하거나 오밀조밀 세련된 뷰를 자랑하는 곳은 아니지만 드넓은 초지와 산책길 오솔길 또는 곳곳에 산재한 축산동물들의 우리 등 볼 것들이 다양하고 풍성하다. 우리가 가끔 접하는 하얀 모자와 드레스 차림의 유럽 귀부인이 꽃바구니 들고 산책을 하는 명화 속이나, 또는 그런 류의 영화나 소설 등에서 보게 되는 전형적인 목장의 풍경이다. 둘러보는데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길 풍경이 좋다. 소개 글을 써 놓고 보니 목장의 홍보사원인 것 같다. 그치만 세련된 풍경을 기대하고 가면 실망할 수도 있다. 그저 하루 자연과 초록 안에서 거닐며 유유자적 힐링하기엔 정말 좋은 여행지다. 멘델스존이나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 딱 좋을..

호로고루의 해바라기와 함께 여름은 가 버렸다

호로고루는 고구려 사적지다. ‘호로’라는 이름서껀 역사적 의미와 가치는 차치하고 오로지 유명한 해바라기를 보러 갔었다. 보통 염천 8월이 제철인 해바라기인데 호로고루는 국내에서 가장 늦게 피는 곳이다. 매년 9월이면 노란 해바라기 질펀한 명소로 유명해서 올해는 우정 이제나저제나 때를 기다려 갔더랬는데. 이게 뭐니. 해바라기 밭은 생각보다 규모가 훨씬 작아 대가집 화단 같은 수준으로 유명세가 민망했고, 해바라기가 피긴 했지만 어설프고 빈약하고. 게다가 심은 종자는 키도 작아 겨우 사람 무릎에 닿는, 우리가 아는 그 해바라기와는 근본이 달랐다. “해바라기가 참 성의가 없네” 동행인과 이런 농담을 하면서 실망감을 나눴다. 그래도 명색 ‘해바라기축제’라고 관광객들은 많이 밀려들고 있었다. 다들 실망한 표정들이다..

달성 하목정의 배롱나무

올해도 목백일홍이 피었습니다. 달성에 있는 정자 하목정(霞鶩亭)에도 목하 백일홍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곳은 정열적이라기보다는 청초한 느낌의 꽃송이들입니다. 이 정자에 드러누워 도끼자루 썩는 것 모르고 여름 한 철을 보내고 싶지만 시간은 유수라 긴 여름 낮도 어느새 저물어 땅거미가 밀려옵니다. 내게 더위는 쥐약이지만, 더구나 올해 같은 폭염은 거의 지옥이지만 정열의 배롱나무꽃이 주위에 있어 여름은 아름다운 계절이기도 합니다. 이름이 ‘백일홍’인만큼 그녀들이 내뿜는 이 황홀한 아우라는 9월까지 세상을 지배할 겁니다. 하롱하롱 마지막 꽃잎이 지는 날은 가을입니다. 내년엔 또 어디로 가서 그들을 만날까 벌써 마음은 그 여름 속으로.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

하늘재를 넘어 덕주사로

신라 경순왕은 나라를 들어 왕건에게 바쳤다. 마의태자는 신라 중흥의 여망을 안고 궁을 떠났다. 덕주 공주가 동행했다. 그들은 문경에서 월악산으로 향했다. 남매가 넘었다는 고개가 하늘재다. 하늘재는 조령과 이화령 훨씬 이전부터 영남과 경기를 잇는 가장 오래된 교통로라고 한다. 하늘재를 넘어 태자는 미륵사에, 덕주 공주는 수안보 근처에 머물며 신라의 중흥을 발원하며 기도를 드렸다. 태자는 미륵입상을 세우고 공주는 덕주사에 마애불상을 새겼다. 석공도 아닌데 미륵입상을 세우고 여자인 덕주는 마애불상을 새기다니! 옛날 사람들은 죄다 능력자다. 옛 역사를 접하다 보면 불가사의하고 의문이 생기곤 하는 대목들이다. 아무개 대사가 무슨 절을 지었다는 건 허다하고, 선덕여왕은 황룡사 목탑을 세웠다. 거북선을 정말로 이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