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비내섬이예요.
섬이라고 해서 웅숭깊은 대양 가운데의 거창한 그런 섬이 아니고
유장하게 흐르는 남한강 어느 물굽이에 하나 떠 있는 평범한 작은 섬입니다.
주말이면 어디로든 가방 메고 떠나곤 하지만 가끔 정한 데가 없거나 혹은 왠지 움직이는 게 귀찮아져 아무 것도 안하고 멍때리고 싶을 때가 있지요.
그럴 때 찾곤 하는 충주의 섬입니다.
집에서 멀지 않아 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라떼커피 사들고는 하루종일 쉬다 오는 곳입니다.
전혀 인공의 손길이 가지 않은 곳.
그래서 세련되고 고상한 걸 좋아하는 보통의 사람들은 오지 않는 곳입니다.
작은 섬이라고 했지만 한바퀴 돌아보는 데 두 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산책도 하다가 풀숲에 앉아 벽공을 보며 오랫동안 멍때리기도 하고,
들고간 책을 읽기도 합니다.
그것도 싫증나면 오카리나를 꺼내 신나게 불러 제낍니다.
올해는 하세월을 비가 잦아 잘 안가게 되다가 잠시 누꿈하기에 오랜만에 찾았습니다.
여름이 끝나가고 있나 봅니다.
들길에 서니 왈칵 가을 냄새가 전해집니다.
그래도 여전히 꽃들은 수더분하게 피어 있네요.
들꽃은 당신을 닮아 한아하고 끼끗합니다.
결코 화려하거나 진한 향기를 뽐내려 하지 않아요.
그저 자기 있고 싶은대로, 피고 싶은대로 음전하게 있을 뿐입니다.
갈퀴나물
개망초
야관문
남자들 거시기 힘 솟게 한다는...
비내섬에 지천으로 깔렸네
기생초.
기껏 어렵게 귀화해서는 기생초라는 이름을 얻었나?
화려한 미모여서일까.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촬영지라고
강아지풀
큰망초
익모초
붉은토끼풀
며느리밑씻개
때늦은 달맞이꽃
개미취
아, 가을이 코앞에
들길은 혼자 걸어도 좋고 둘이라도 좋아요.
특히나 당신처럼 수더분하고 한아한 사람과 함께 걷는 길은 말해 무엇해요.
생각해보면 우리는 얼마나 자신을 속박하며 살고 있었는가요.
한시라도 쉴 틈을 안주려 얼마나 무던히도 자신을 닦달하고 규제를 하고 있는지.
들길에 서면 일상생활이 무의미하고 심드렁해지니
꼭 하루만이라도 들꽃이 있는 길 위에서 이렇게 머리 가뿐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큰 호사라 생각합니다.
갈대숲 저쪽 머리로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그 소녀가 한 움큼 갈꽃을 꺾어 안고 걸어오는 환영, 아니 그랬으면 좋겠는 환영도 보이고요.
혼자만의 아지트는 아니어서 나같은 사람들이 더러 오기도 하지만 번잡할 정도는 아니고 그들도 그저 조용하게 거닐다 가곤 합니다.
주로는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오는 찍사들이 많은 편이지요.
이 들꽃들이 스러지고 나면 텅 비어 버려서 허전할 것 같지만 이곳은 원래 억새와 갈대의 세상입니다.
가을이면 숨이 막히게 처연한 억새와 갈대가 장관을 이룹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때가 그 계절입니다.
서늘한 바람이 불지만 그래도 아직은 여름의 더운 잔영이 가득한
섬
들길
들꽃
그리고 귓전으로 강물이 흘러가는
나의 낙원
여기는 비내섬입니다.
가을이 코앞에 온 게 아니라 이미 가을인가 보오.
황화코스모스랑 흰코스모스.
비내길
들꽃처럼
들을 걸으며
무심코 지나치는 들꽃처럼
삼삼히 살아갈 수는 없을까
너와 내가 서로 같이
사랑하던 것들도
미워하던 것들도
작게 피어난 들꽃처럼
지나가는 바람에 산들산들
삼삼히 흔들릴 수는 없을까
눈에 보이는 거 지나가면 그 뿐
정들었던 사람아
헤어짐을 아파하지 말자
들꽃처럼
들꽃처럼
실로 들꽃처럼
지나가는 바람에 산들산들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삼삼히 그저 삼삼히
조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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