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의 소설을 다시 읽어 본다. 겨우 4장 분량 정도의 짧은 소설이지만 읽을 때마다 전에 못 보았던 문장이나 구절이 새록새록 발견된다.
장돌뱅이 허생원이 청주 사람이면서도 늘 평창과 그 일대의 장을 돌아다닌 이유가 있었다.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의 아름다운 강산이 그대로 그에게 그리운 고향이었다"
직업으로서의 숙명의 길이 아닌 여행의 길로 강원도의 산천을 택한 것 같다.
언제부턴가 도보여행에 대한 현대인들의 인식이 새롭게 변했는데 허생원은 이미 그때 ‘길 위의 여행’을 즐겼던 것 같다.
메밀은 예전에 가난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렇다 할 땅뙈기 없는 강원도 산골의 무지렁이들이 평생 가난을 벗지 못하고 땅에 엎디어 심어 먹은 게 그저 감자요 옥시기요 메밀이었다. 척박한 자드락 돌밭에서 거둘 수 있는 건 대개 그런 것들이니까.
질곡의 고단한 삶은 뒤안길로 가고 메밀밭은 이제 낭만과 서정적인 풍경이 되어 관광지가 되었다.
당시에는 팍팍한 현실이었을 소설 속의 이야기가 이제는 누리는 ‘문학의 향기’가 된 셈이다.
코로나 첫 해였던 작년 가을에는 사람들 오지 말라고 죄다 갈아 버려 허허벌판이더니 올해는 다시 하얀 소금꽃이 가득하다. 이제는 ‘위드코로나’로 전환된 듯하다.
평생 여자를 모르고 살 줄로만 알던 허생원에게 인생의 바람이 돌풍처럼 달려들었다. 기억도 가물거리는 옛적 어느 하룻밤의 사랑.
그리고 지금 동행이 되어 걷는 청년이 그 아이라니!
생각해보면
자유로운 고독을 누리고 살다가 뜻밖의 일, 즉 나도 모르는 자식이 있다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쿵,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말 그대로 멘붕이 올 것 같다.
누굴 원망하지도 못하고 원하지 않은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마이클 잭슨은 노래 <Billy Jean>에서 그 여자는 내 연인이 아니라며 부정하고 따라서 그 아이도 내 아들이 아니라고 발뺌하고 있다.
모든 운명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거의가 필연이라는 걸 깨단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솔직히 메밀꽃 너는 그렇지 않다.
메밀꽃이 예쁠 필요는 없다. 너의 의미는 곡물이지 예쁨이 아니다.
예전에 메밀은 우리 식생활에 중요한 곡물이었다. 유년시절의 우리 집에서도 메밀 농사를 지었다.
지금의 봉평 메밀은 농작물을 수확하기 위한 농사라기보다는 관광객 유치용의 목적이 크다.
메밀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닥 예쁜 꽃은 아니다. 멀리서 보는, 소금을 뿌려 놓은 것 같은 밭을 보아야 예쁘다.
살다 보면 때로는 가까운 것보다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진리인 경우를 절실하게 느낄 때가 있다.
꽃이 지고 나면 붉은 열매가 열린다. 비로소 메밀이다.
붉은색이었다가 여물어 가면서 검어진다.
오늘은 봉평장.
길을 좋아한 허생원이 고단한 발걸음을 쉬고 도붓짐을 내려 놓았던,
인생 단 한번의 사랑이었던 여인을 만났던,
오랜 세월 후에 다시 그 자식을 만났던……
메밀로 적을 부치고 전병을 싸고 국수를 뽑고 정월에는 만두를 빚었다.
때로는 묵을 쑤기도 했지만 묵의 재료로는 도토리가 있었기에 귀한 메밀로는 거의 쓰지 않았다. 기실 쌉사름한 도토리묵이 더 맛나기도 했다.
맷돌에 메밀을 타면 껍질이 나온다. 시골에서는 이 껍질도 요긴하게 쓰여 베갯속으로 넣으면 아주 그만이다.
새 껍질로 채운 베개를 베면 귓전에 사르락거리는 소리가 얼마나 기분 좋은지.
베개에서 세월이 가는 소리를 듣는다고 어른들이 그랬다.
과연 뒤울 기슭에서 알밤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한 가을밤이면 이 메밀베개에서 세월이 오는 소리를 듣곤 했다. 왠지 덧없는 인생을 느끼며 까닭 없이 슬프고 허전하다. 어린 꼬마에게도 그런 헛헛한 인생무상을 일깨우는 그런 날이 더러더러 있었다.
그 메밀베개의 사르락거리는 소리.
세월이 오는 소리. 세월이 가는 소리.
어느 카페 통창 앞에 있는 붉은색 메밀꽃.
변종인가.
어느덧 가을이 왔다. 소금을 뿌려 놓은 듯 숨막히던 메밀꽃도 끝물이다.
지금쯤은 다 졌으리.
김영동 : 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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