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보를 아세요? 저녁 나절 쯤 되면 우리집 앞 올래나 아니면 개울 건너 농로에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났다. 핵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었다고 하지만 물론 내게는 형들이고 누나들이었다. 미취학 꼬마들은 핵교에 댕기는 게 제일 부러운 일이었다. 특히 벤또 소리. 아이들이 내달릴 때 빈.. 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2016.02.17
꼬마 목동 참 순한 동물, 양 염소. 염소도 순하긴 하지만 가끔 성깔이 있어 날뛰기도 하고 사람이 가까이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아 언제나 슬금슬금 물러나 거리를 유지하곤 한다. 워낙 빨라 사람이 잡는 것도 쉽지가 않다. 양은 순함의 대명사다. 나는 양을 대해 본 적이 없다. 대관령목장 등에서 멀찌.. 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2015.10.16
빨래 산골 농경생활이란 게 그리 깔끔하지는 못해서 빨래를 자주 해 입지는 않아도 식구가 많으니 빨랫감은 늘 많았다. 그 전엔 어머니 일이었고 내가 태어났을 때는 큰누나가 빨래를 했다. 첫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큰누나는 시집가기 전까지 집안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그리고 형수가 .. 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2015.10.09
타작 벼 타작을 하면 한 해 농사가 끝난다. 물론 참깨 들깨도 있고 콩도 있고 김장 배추 무도 있지만 쌀이 식량인 이상 시골의 생의는 벼에 집중돼 있을 수밖에 없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모든 일을 품앗이했다. 품앗이할 만큼 소출이 많은 것도 아니다. 아끼고 아껴가면서 느루먹어도 이듬해 봄.. 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2015.09.23
문에 대한 애옥살이 촌가들이지만 화단을 가꾸는 여유들은 있어서 집집이 마당 한 귀퉁이에는 꽃을 심었다. 꽃은 거기서 거기라 다 똑같았다. 채송화 봉숭아 금잔화 과꽃 백일홍 맨드라미 분꽃 나팔꽃 장다리꽃 해바라기. 채송화는 늘 맨 앞자리였고 장다리꽃이나 해바라기는 맨 뒤에 섰다. 여기다.. 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2014.08.26
메주 새벽엔 싸늘한 무서리가 내리고 울 뒤 벗밭 떡갈나무 잎도 이미 고드러져 서북풍이 건듯 불 때마다 서걱서걱 을씨년스런 소리를 해댔다. 이미 설핏 첫눈도 지나갔고 여차하면 엄동 추위가 몰아칠 것 같은 초겨울이다. 계절이 그럴 즈음에 메주를 쑤었다. 역시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날.. 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2014.08.24
이유 없는 집착 햇수로 24년 입은 옷을 드디어 버렸다. 낡아서가 아니라 하도 싫증나서다. 옛날 같지 않아 옷감이 워낙 질겨 도무지 해지지가 않는다. 시원하다. 섭섭함은 조금도 없다. 24년은 그래도 약과다. 스무 살 때부터 입은 옷이 있다. 이건 싫증이 안 난다. 아직도 새 옷처럼 흠집 하나 없다. 입어 .. 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2014.08.23
떡 치기 집안에 큰 행사가 있으면 떡이 많이 필요했다. 그때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떡을 쳤다. 큰 솥에다 찹쌀을 쪄내 안반에다 쏟아놓으면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준비된 장정 둘이 떡메를 들고 달려든다. 주인 여자나 다른 아낙네가 하나 안반 옆에 붙어 앉아서 수시로 고르거나 뒤집어준다. .. 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2014.08.21
액막이 다래끼가 나면 눈썹 몇 올을 뽑아 작은 돌무더기를 만들어 그 안에 넣어 놓았다. 지나가는 누군가에게 밟히거나 걷어차여 돌무더기가 무너지면 그 사람에게로 다래끼가 옮아갔다. 공기 좋고 물 좋은 청정지역이어서 요즘 시점으로 보면 다들 건강하게 살았어야 하지만 그러나 시골사람.. 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2014.08.16
화로 계절이 바뀌어 건들바람이 불고 추석도 지나고 나면 헛간에서 화로를 꺼냈다. 우리 지방에서는 ‘화리’였다. 겨울 추위가 워낙 혹독한 강원도 산골에서 화리는 가장 요긴한 가재였다. 전문가가 지은 것도 아닌 손수 지은 초가들이야 집 모양만 갖추었지 허술하기 짝이 없어 매운 겨울바.. 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2014.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