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엔 싸늘한 무서리가 내리고 울 뒤 벗밭 떡갈나무 잎도 이미 고드러져 서북풍이 건듯 불 때마다 서걱서걱 을씨년스런 소리를 해댔다. 이미 설핏 첫눈도 지나갔고 여차하면 엄동 추위가 몰아칠 것 같은 초겨울이다.
계절이 그럴 즈음에 메주를 쑤었다. 역시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날이 아니라 며칠 전부터 바빴다. 장작을 패 쌓아 올리고 잇짚을 골라 깨끗이 닦았다. 골안에 가서 메주틀, 절구도 빌려 왔고 콩을 까불러 잡티를 골라냈다.
가마솥 하나 가득 콩을 삶았다. 수시로 덮개를 열어 잘 물러지고 있는지 확인했다. 덮개를 열 때마다 뽀얀 김이 피어올라 검댕이 더께진 천정에 잔뜩 서리곤 했다. 뽀얀 김만 보아도 그 집안이 훈훈해지는 것 같았다.
이윽고 콩이 다 삶아지면 절구에다 넣고 빻아야 했다. 당시 동리에서 유일하게 우리 집에 디딜방아가 있었다. 동리에서는 빻을 것이 있으면 죄다 우리 집에 와서 디딜방아를 쓰고 가곤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메주는 디딜방아를 안 쓰고 절구에다 찧었다. 이것도 몹시 힘이 드는 작업이라 주로 남자들이 했지만 전적으로 다 맡기지는 않고 어머니는 당신이 거의 반 이상을 절구질을 했다.
절구질을 하면서 한편에선 찧은 메주를 틀에 넣어 모양을 만들었다. 메주틀 안에 광목 따위 천을 깔고 그 위에 메주를 넣고는 올라서서 자근자근 밟아 다졌다. 이건 비교적 힘이 안 드는 일이라서 누나들이나 어린 사람들이 했다. 꼬맹이도 역시 그게 하고 싶어 몇 번을 보채 밟아 보기도 하나 이내 싫증을 느껴 공연히 쿠사리를 먹었다.
네모지게 틀을 잡은 메주덩어리는 워낙 잘 다져 밟아 딱딱하니 보기가 좋았다. 그것을 잇짚으로 얽어 매 방안 시렁 밑에 줄지어 매달아 놓음으로써 한 해의 일이 대충 마무리되었다.
방에서 메주는 겨우내 떠 이듬해 입춘과 설이 지나고 왠지 훈훈한 기운이 도는 그러나 여전히 추운 그때쯤 걷어 비로소 장을 담근다. 시골 사람들의 속신은 그중에서도 말날(午日)에 하는 것이다. 미신이겠지만 장에 대한 사람들의 경외는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대한 그러고 보면 이 메주가 우리가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하고 요긴한 존재였다. 그것으로부터 먹을 것이 시작되는 것이다.
전 세계에 오직 우리에게만 있는 음식이고 그로부터 우리의 문화가 형성되어 있기도 하다.
가을
김지헌
눈부신 가을날
수건을 즈려 쓴 아내와
고무장갑을 낀 남편이
정성스레 장 담그고 있는.
오지항아리에
묵은 그리움을 꾹꾹 눌러
된장 담그는 날
노부부 얼굴 위에 햇살처럼
작은 평화가 내려앉습니다
세월 걸러내니
그들의 미소도
잘 익힌 장맛 같습니다
어느 지하철역 스크린도어에 이런 시가 적혀 있는 걸 보았다.
시를 잘 모르고 잘 읽지도 않지만 윗글을 보면서 딴지를 걸고 싶은 심보가 생겼다.
눈부신 가을날에 장을 담근다니. 작가의 관념이 너무 얕아 보였다. 장은 2월에 담그는 것인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아름답게 쓰면 글이라고 생각하는 것 아니냐. 조선시대 글줄깨나 쓴다는 작가가 중국 시인들 쓰듯이 조선에는 있지도 않은 원숭이를 등장시키듯 말이다.
그렇지만 내 상식도 완전히 정확하다는 확신은 없었다. 가을에도 장을 담글 수는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연한 기회에 항골 어느 집에 놀러 갔었는데 거기 나보다 나이 많은 아지매들이 있어 뜬금없이 물어 보았다. 장을 가을에도 담그나?
그랬더니 조금 생각하면서 그렇다고 한다. 누가 그러는 걸 보았다고 한다. 대답은 그리 들었지만 그들도 별로 확신은 없어 보였다.
의문은 일단 그쯤에서 접어 두었다. 그게 뭐 머리에 담아두고 있을 만한 거리도 아니다. 내가 담글 것도 아니고. 그 시인이 보았다면 그런 거겠지.
그랬는데 이 글을 쓰려고 추억을 반추하다가 다시 의문이 스멀거렸다. 가을에 장을 담그려면 여름에 메주를 쑤어 띄워야 하는데 그게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습하고 무더운 철에 메주가 잘 뜰 리 없을 테고, 한 해 농사 중 가장 늦게 수확하는 게 콩이다. 겨울을 목전에 둔 11월 추운 때 콩을 거둬들여 그때 메주를 쑤는 것이다. 여름엔 콩이 없다.
물론 전문적인 시설을 갖춘 공장에서 메주를 사다가 장을 담글 수 있다. 콩도 안 해의 것을 쓴다고 하면 트집을 잡기도 무안하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장은 아닐 것이 분명하다. 콩도 묵은 콩일 것이요 발효도 자연적인 발효가 아닐 것이다. 그 장은 분명 무언가 맛이 부실할 것이다.
짧은 상식으로 생각해도 장은 11월에 수확한 콩으로 메주를 쑤어 겨우내 띄워 2월에 담가야 정상적인 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