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틀 집안에 잔치가 있거나 초상이 나면 많은 음식이 필요하다. 내 유년 때는 큰형과 큰누나 두 번의 잔치가 있었다. 대사에는 모든 것을 다 풍족하게 준비했지만 알알은 역시 국수였다. 시집장가 가는 걸 국수 먹는다는 관용어로 널리 쓰고 있으니. 평시에는 반죽을 해서 밀대로 밀어 칼로 썬 .. 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2014.01.02
개떡에 개는 안 들었다 조금이라도 느루 먹으려고 아무리 아끼고 아꼈어도 해토머리 지나 밭둑에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고들빼기 달래들이 나오기 시작할 무렵이면 식량은 거의 떨어져 간다. 보리와 밀은 아직 집게뼘이라 그게 다섯 살배기 아이만큼 자라 이삭이 패고 여물기를 또 기다려 베어 먹을 때까지는 .. 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2014.01.01
밥 먹는 게 변변치 않으니 밥이라도 많이 먹었다. 없이 살아도 밥에 대한 인심은 넉넉해서 뉘 집엘 가도 고봉밥을 받았다. 지금은 공기가 밥그릇이지만 예전엔 주발이었다. 밥은 주발 국은 대접에 담아 꼭 격을 갖추었다. 그 주발에다 태산을 쌓듯 높다랗게 고봉을 담아 주는 게 상식이었다. .. 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2013.12.31
조반 먹었나 가난하고 척박한 산골마을의 살이지만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으니 그래서 용케도 떠나지 못 하고 게서 묻히는 것이다. 먹는 게 주려도 산과 내와 들에는 자연이 주는 먹을거리가 풍성했다. 두릅 고사리 버섯 따위 산채, 다래 머루 돌배 팥배 등 산으로 들어가면 먹을 것 지천이었다. 삘.. 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2013.12.29
물 동지섣달 추위가 살을 에는 산골에는 물 쓰는 것도 어렵고 또 귀찮기도 했다. 집안에 우물이 있는 것도 아니니 겨울 아닌 다른 철에도 꼭 개울에 가서 물을 길어 와야 해서 풍족하게 쓰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다른 철이라면 두멍을 큰 걸 두거나 아니면 여러 개 두어서 많이 길어다.. 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2013.12.15
콩 타작 산골의 하늘은 말 그대로 손바닥만 하다. 겨울이 일찍 오고 늦게 간다. 쎄가 빠져라 일한다고 하지만 기실 산골 농사꾼이야 짧은 여름 한철 일하는 게 고작이다. 입추가 지나면 벌써 찬바람이 분다. 한 해 계량은 오직 논밭에서 거둔 곡식 밖에 없다. 가을부터 봄까지는 벌이를 하지 않으.. 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2013.11.19
가마솥 산골은 겨울이 길어 고요한 밤 뒷산에서 툭툭 알밤 떨어져 구르는 소리가 귀 곁인 양 명징하게 들리는 무렵부터 이듬해 감자 심을 때까지 건넌방 가마솥은 날마다 부글대며 끓었다. 평소엔 저녁으로 쇠죽을 끓였다. 아버지와 형이 작두로 썬 옥수숫대와 잇짚을 솥에 넣어 물을 붓고 군불.. 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2013.02.23
라디오 산골에 그나마 유일하게 문명의 언저리에 가까이 다가가 있던 것은 라디오였다. 전기가 없었다. 저녁이면 등잔불을 켰다. 그 오래 전에는 어유를 썼다고 하는데 우리 시절에는 세기(석유)를 썼다. 그러고 보니 석유도 문명의 근처에 다가간 물건이긴 하다. 석유도 돈사야 했으니 그 알뜰.. 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2013.02.21
공비였을까 두메산골이었다. 사람들이 읍이라 부르던 춘천 시내로 나가 장을 보려면 꼭두새벽 자릿조반을 먹고 힁허케 도다녀와도 해가 꼴딱 저물었다. 산골에 찾아오는 외지인은 거의 없었다. 생각나는 대로 꼽아 보면 빨간 자전거를 탄 우체부가 그중 가장 빈번한 방문객이었고 계절성으로 찾아.. 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2013.02.19
유년의 쥐 기가 막힌 그 맛이라니. 어쩌다 한 점 먹어 보는 쥐 고기맛은 어느 육고기에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너나없이 모두들 가난했다. 그렇지만 가난한 줄을 모르고 살았다. 경애네도 승호네도 영숙이네도 다 그랬다. 비교대상이 없으니 부자와 가난뱅이의 개념조차 없었다. 굴왕신같은 초가집.. 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2012.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