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책보를 아세요?

설리숲 2016. 2. 17. 01:17

 

 저녁 나절 쯤 되면 우리집 앞 올래나 아니면 개울 건너 농로에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났다. 핵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었다고 하지만 물론 내게는 형들이고 누나들이었다.

 미취학 꼬마들은 핵교에 댕기는 게 제일 부러운 일이었다. 특히 벤또 소리. 아이들이 내달릴 때 빈 벤또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학교 안 가는 우리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산골에서야 책가방이란 게 따로 있는 줄도 몰랐고 그저 핵교는 책보를 메고 댕기는 걸로 알았다. 보자기를 펴고 책과 공책을 대각선으로 말아 동여매고 남자아이들은 한쪽 어깨에 비스듬하게 엇메고 여자아이들은 허리에 매고 핵교를 댕겼다.

 

 

 60년대였으니 우리나라가 가장 경제적으로 궁핍할 때였다. 해마다 힘겹게 넘던 보릿고개의 전설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미국 등 외국에서 구호물품이나 식량을 원조해주던 정말 가난한 시절이었다.

 ‘고마우신 우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그 이름 길이길이 빛내오리다~~’ 또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하면서 여자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하던 시절이었다.

 

 누나들이 핵교에서 돌아오면 책보에서 우유가루를 꺼냈다. 그것도 역시 미국이 원조해준 것이었다. 그 이름이 따로 있었는지 모르지만 난 이름을 모르겠고 우유가루로만 알고 있다. 무지한 시골사람들이라 아이들이 핵교에서 그걸 가져와도 어떻게 먹는지조차도 몰라 그냥 맨 가루를 숟가락으로 떠 입에 털어 넣는 게 고작이었다. 사래가 들려 허옇게 가루를 뿜어내며 캑캑거리던 풍경들. 아이들이 가지고 오는 것은 가루였으나 어느 때는 그것도 덩어리로 응고가 돼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먹는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이 대접이나 주발에 담아서는 밥을 짓고 마지막 뜸을 들일 때 밥 위에 얹어 놓으면 빵처럼 되어 그걸 칼로 잘라 먹었다. 따뜻할 때는 그런대로 먹을 만했지만 일단 식으면 돌덩이처럼 딱딱해져 그냥 버리기 일쑤였다.

 

 누나들이 가지고 오는 게 꽤 되는 것 같았는데도 보면 늘 동이 나 있곤 했다. 그렇다고 집안 식구 누가 찔름거리며 많이 먹는 것도 아닌데 그게 참 희한하기도 했다. 나중 생각이지만 못 먹고 딱딱해져서 버리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라는 짐작이다.

 

 

 

 

책보

                                           

 

 내가 도시에 나와 입학을 했을 때는 이런 책보 풍경이 완전 사라지고 모두 란도셀을 메고 다녔다. 남자아들은 까만 란도셀, 여자아이들은 빨간 란도셀.

 그리고 신발도 고무신에서 운동화로 바뀌고 말았다.

란도셀은 70년대 모든 국민학생들의 책가방이었으나 왜색일제문화잔재로 인식되어 어느 때부턴가 자취를 감추었다.

 

선망했던 빈 벤또 소리는 그러나 정작 학교에 다닐 때는 그 소리가 너무도 창피해서 나는 일부러 숟가락을 따로 넣어가지고 오곤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진 란도셀.

일본 초등학생들은 여전히 란도셀을 애용한다.

질이나 디자인 등이 우리 국민학교 시절과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되게 세련되고 고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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