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빨래

설리숲 2015. 10. 9. 10:31

 

 산골 농경생활이란 게 그리 깔끔하지는 못해서 빨래를 자주 해 입지는 않아도 식구가 많으니 빨랫감은 늘 많았다. 그 전엔 어머니 일이었고 내가 태어났을 때는 큰누나가 빨래를 했다. 첫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큰누나는 시집가기 전까지 집안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그리고 형수가 시집온 다음부터는 올케와 그 일을 분담했다. 시대 정서상 집안일은 오롯이 며느리가 해야 했지만 내 큰누나는 전혀 시누이 노릇을 하질 않았다. 오히려 나이 어린 올케를 애처롭게 여겨 자신이 더 많은 일을 하려 했다.

 

 덥고 땀이 나도 여름엔 일도 아니었다. 풍성하게 흐르는 냇물에 치대고 헹구고, 찌든 때는 빨래방망이로 두들겼다. 이 행위는 어쩌면 고된 시집살이에 대한 한풀이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려운 건 역시 겨울이었다. 세상 모든 것이 얼어붙은 혹독한 추위에 고무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하는 빨래는 고통 그 자체였다. 방안에 있어도 오돌오돌 떨리는 엄동설한이라고 빨래를 안 할 수는 없었다. 냇물도 꽁꽁 얼어버려 빨래를 할 때면 늘 도끼를 들고 나가 얼음을 깨곤 했다. 워낙 추운 날이면 개울가에 모닥불을 지펴 놓고 손을 녹여 가며 빨래했다. 여자들에겐 참으로 신산한 세월이었다.

 

 겨울은 빨래를 말리는 것도 용이하지 않았다. 빨랫줄에 널면 곧바로 얼어버리니 며칠을 널어도 전혀 마르지 않았다. 그래도 저녁이면 꽝꽝 얼어 딱딱한 빨래를 걷어 들였다. 우리는 그걸 개'라고 했다. 개를 죽여 그슬리고 났을 때의 뻣뻣하게 굳은 개의 시신이 꼭 그 모양이었다.개'를 방에 잠시 놔두면 녹아 흐물거리는데 물기는 전혀 마르지 않았다. 그걸 시렁에다 널었다. 그렇게 해서 겨우겨우 말려 입었다.

 때로는 저녁에도 걷지 않고 이튿날까지 그냥 빨래줄에 널두는 때도 있었다. 밤중에 오줌이라도 누러 나가면 어둠 속에 희끗희끗 흔뎅이는 것이 보여 그 얼마나 무섭던지. 꼬마에게는 밤의 모든 것이 공포의 대상이라. 한번도 번 적 없는 도깨비거나 두억시니, 또는 엊그제 보았던 장례행렬의 만장 같이도 여겨지는 것이다.

 

   

   김홍도 <빨래터>

   방망이로 두들겨대는 우리나라 고유의 빨래풍경. 내용에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바위 뒤에서 선비는 왜 훔쳐보고 있을까. 그림에는 몰래 볼만한 정경은 없는데.

 

 

 첫 조카가 나오자 방은 늘 기저귀 빨래로 그득 찼다. 기저귀는 부지런히 빨고 말려야 해서 빠는 즉시 방에다 널었다. 조카가 태어난 게 섣달 그믐날, 가장 추운 한겨울이었으니 그 빨래를 감당했던 형수는 참말 혹독한 살이를 한 셈이다. 열여덟 어린 나이였다.

 

 아버지는 평생 한복을 입었다. 마고자에 조끼, 읍에 나갈 때는 중절모에 두루마기를 입었다. 논일 밭일 할 때도 바지저고리였다. 다른 식구는 몰라도 아버지의 옷은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바지저고리라 빨래를 하고 다듬이질도 하고 외출복 같은 경우에는 빳빳하게 풀도 먹였다. 이 다듬이와 다듬이소리는 유년시절을 추억하는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어머니와 형수가 마주보고 앉아 두들기는 풍경과 그 리듬감은 불가사의였다. 음악을 배우지도 않았건만 전혀 불협화음 없이 매끈한 소리. 가장 불편한 관계라는 고부가 어울려 두들기는 아이러니한 정경.

 나는 다듬이방방이로 뚝딱거리는 장난을 하다가 지청구를 먹곤 했다.

 때로는 다림질도 했다. 겨울에 화로에는 늘 인두가 꽂혀 있어 깃동이나 바짓단 등 좁은 부분을 다릴 때 요긴하게 인두를 썼다. 전기가 없을 때라 다리미에는 불잉걸을 담아 썼다. 그리고 깃고대에 동정을 달아 붙였다. 이런 여러 공정을 거쳐 비로소 아버지의 저고리가 완성되었다.

 

 

     

         천 양진당에서

 

 

 찌든 때는 아무리 빨래방망이로 두들겨도 빠지지 않았다. 솥에다 넣고 삶거나 그래도 안 빠지는 빨래는 잿물이나 양잿물에 삶았다. 내 유년시절에는 잿물 쓰는 걸 본 기억은 없다. 양잿물에 삶는 것을 더러 본 기억이 있다. 잿물은 천연세제였고 양잿물은 화학세제였다. 삶이 고되어 먹고 죽는다는 게 바로양잿물이었다. 그만큼 독성이 있는 물질이었다. 이제 돌이켜보면 양잿물에 옷감을 넣고 삶는다는 건 참 무지의 행위들이었다. 사람의 피부에 닿는 옷감에 독성 약품을 묻히다니.

 

 이제 세탁기 없는 가정생활은 없다. 장가 안 가고 떠꺼머리로 사는 사내들도 고급스럽게 의생활을 할 수 있게 세상은 참 많이도 바뀌었다. 그래도 난 여전히 세탁기 없이 산다. 냇물에 쪼그리고 앉아 치대고 있다. 과거로의 회귀일까. 마는 빨래방망이로 두들기지도 않고 다듬이질도 하지 않으며 인두로 다리지도 않는다. 푸새질도 않으며 더군다나 깃고대에 동정도 붙이지 않는다. 그냥 이도 저도 안 되면 버리고 새로 사 입는다. 그것만 해도 나는 굉장히 문명화 된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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