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한국의 아름다운 길

화양구곡에 내리는 비

설리숲 2024. 9. 11. 19:48

 

괴산 화양구곡입니다.

몇 년 전 한번 가보긴 했지만 나뭇가지에 눈도 틔지 않은 3월이라 계곡은 메마르고 쌀쌀했었습니다.

여기 여름 숲은 어떨까 궁금해하면서도 가까운 곳이라는 안일함으로 이후 한번도 가보지 않았어요.

 

더 먼 곳 충주로 옮기고 나서야 비로소 찾아봅니다.

여름 끝자락이라지만 숲의 초록은 한참 더 지나야 퇴색합니다.

 

곧 비 뿌릴 것 같이 하늘이 낮게 내려앉아 있습니다.

뽀얀 이내가 서리고 습기 가득해 역시나 무더운 날입니다.

소나기 한바탕 내렸으면 좋겠는 습윤한 숲입니다.

 

 

 

명산은 명산이라 속리산에서 내려온 계곡의 수려함이 명불허전입니다.

겨울의 적막도 말할 것 없고 여름의 무성함도 역시 좋습니다.

혼자 걷는 길도 고적하지 않고 풍성합니다.

 

평일인데다 날도 궂은데 구곡으로 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예 빗방울이 내립니다.

계곡 숲에 떨어지는 아련한 빗소리가 마치 어릴 적 누에들의 뽕잎 갉아 먹는 소리와 흡사합니다.

세상은 삽시간에 다른 풍경이 됩니다.

잠깐이지만 더위도 수그러졌어요.

빗속에 보는 카페 풍경이 아늑해 보입니다.

 

 

 

 

우산을 쓴 사람도 있고 비옷을 입은 사람도 있고

준비 안 된 사람은 맨몸으로 흠뻑 비를 맞습니다.

 

어릴 적의 드라마 한 장면이 다시 소환됩니다.

유명한 <수사반장>에서 사창가의 이야기를 다룬 에피소드였습니다.

아가씨들은 왜 저 세계에 몸담게 되는지의 질문에 최불암 반장의 대사가 평생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막 뛰잖아.

남의 처마밑이나 건물 안으로 피신하지.

근데 필사적으로 뛰었어도 비 그을 곳을 못 찾으면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지.

그러면 더 이상 뛸 필요가 없어. 되레 흠뻑 맞는 게 더 시원하지.

그래서 포기와 체념이라는 게 생기는 거고.

그게 어쩌면 삶의 한 처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저들이 하는 일이 떳떳하지 않아도 우리가 저들을 혐오하고 조롱할 수는 없다구.

저 일이 좋아서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거리에 비가 내리면 늘 최 반장의 그 대사가 떠오르곤 합니다.

포기와 체념, 달관.

비를 맞고 걸어가는 사람의 외향은 똑같아 보이지만

피하지 못해 체념한 사람과

첨부터 비를 즐기기로 한, 달관한 사람의 삶의 질은 천양지차입니다.

 

 

 

 

요즘은 길을 걷다 비를 맞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곳곳에 흔한 게 동네 마트요 편의점이니 우산을 사도 되고

그 안에 들어가 피를 피해도 되니까.

지하철 역사도 있고, 도처에 널린 게 카페고, 버스정류소도 다 지붕이 있고.

 

그 때문에 나는 우산이 참 많습니다.

여행길에서 비를 만나면 우산을 사곤 해서 한때 장사를 해도 될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걸 버리진 못하고 비가 오는 날 우산 두 개씩을 갖고 나가 전철역이나 화장실 등 공공장소에 하나를 슬쩍 두고 오곤 합니다. 누군가가 요긴하게 쓰기를 바라면서.

물론 반대로 잃어버리고 오는 일도 허다하지만.

 

 

 

화양구곡의 비를 맞는 사람들을 보고 오만가지 상념이 들었습니다.

나는 달관의 삶을 살고 싶었는데

비를 맞지 못하고 매번 우산을 사는 걸 보면 제법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어쨌든 계절은 이쯤까지 왔네요.

길고 지루한 여름이 이 비를 맞고 떠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여자친구 : 여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