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량동 이바구길
기차에서 내려 부산역 광장을 지나 길을 건너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거대도시 부산의 정체를 볼 수 있다.
거미줄처럼 어지러이 난 좁은 골목길. 이곳 사람들의 숙명 같은 계단과 미로, 그리고 아프지 않은 옛 기억들이 고스란히 앉아들 있다.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
방금 지나온 부산역은 최첨단 기술과 예술의 복합공간이 되었지만
'한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잣집이여...'
이 언덕배기는 여전히 개항기 때의 정경으로 남아 있다,
다만 판자가 아닌 번듯한 콘크리트집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초량동이바구길>이라는 이름의 테마길.
조금만 걸어도 숨을 헐떡이는 가파른 골목길들을 허위허위 톺아 보았다.
남선창고 구 백제병원 담장갤러리 초량초등학교 초량교회 168계단 산복도로전시관 장기려기념관 유치환우체통 까꼬막 등을 돌아보는,
여름이라면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을 낯설고 생경한 길여행이다.
겨울이어서 정말 다행이다.
초량전통시장
남선창고 터
옛 백제병원
소림사
초량초등학교
나훈아 이경규 박칼린 등이 졸업했다는 안내와 어린시절의 사진이 학교 옆 담장갤러리에 있다.
초량교회
구부러진 골목
사람 하나 겨우 빠져나가는 샛골목은
어찌 보면 질러가는 길 같으면서도
몇 번을 아프게 굽이쳐 돌고 난 뒤에야
처음 길과 만났다 늙은 골목은
갈라졌다 다시 만나는 일로 환해지지만
담벽에 해를 그린 아이들이 떠난 뒤
구부정해지는 줄도 모르고 허허대며
숨어간 뒤에는 걸핏하면 나오지 않았다.
강영환 <산복도로 76>
악명 높은 168계단
장기려기념관
인술과 청빈과 봉사의 일생을 보낸, 한국의 슈바이처로 칭송받는 의사.
부산 고신대학교복음병원 설립자이며 현 건강보험제도의 초석을 놓은 큰 업적이 있다.
산복도로에 올라서자 비로소 항구와 바다가 보였다.
이곳에서 그 노동자들은 부두로 내려가 하루해를 보내고 고단한 몸을 끌고 올랐을 것이다.
석양 무렵이면 응당 있기 마련인 긴 그림자도 이 골목길엔 없었다.
이곳 사람들의 질기고 긴 숙명 같은 계단.
내 어린시절의 골목들은 아파트의 범람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아 우리들의 추억도 앗아갔고,
이곳 골목들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아이들의 놀이문화조차도 없었을 것 같은 좁고 가파른 골목들뿐이다.
그 아이들은 여기서 어떻게 놀다 갔을까.
산복도로가 있는 초량동 수정동 영주동 일대는 개항기부터 모여든 사람들로 시작된, 부산의 상징이다.
부산은 평지가 적고 산지가 많다. 특히 원도심 지역은 해안까지 산지가 바짝 다가와 있어 일자리를 찾아 들어온 부두 노동자들이 경사진 산지를 따라 올라가며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정착하게 되었다.
8·15해방과 곧이어 6·25를 겪으면서는 더욱더 많은 피란민들이 몰려들어 점점 더 높은 산지로 올라가 무질서한 거대 마을이 되었다.
바다가 보이는 골목길
끊길 듯 끊길 듯 이어졌던 거미줄 같은 초량동 골목길엔
동네사람 엮어준 마을우물, 산복도로, 도랑, 나른한 철길……
유년을 채운 ‘순수한 시간’
- 조갑상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중 : 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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