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메산골이었다. 사람들이 읍이라 부르던 춘천 시내로 나가 장을 보려면 꼭두새벽 자릿조반을 먹고 힁허케 도다녀와도 해가 꼴딱 저물었다. 산골에 찾아오는 외지인은 거의 없었다. 생각나는 대로 꼽아 보면 빨간 자전거를 탄 우체부가 그중 가장 빈번한 방문객이었고 계절성으로 찾아오는 뻥튀밥 아저씨, 어느 집 제사 때 먼곳의 친척이 왔다. 세련된 모던걸 사촌누이는 가끔 택시를 타고 들어오기도 했고 어느 골짜기 산판이 있어 제무시 트럭이 개울 바닥을 기어 가끔 오가곤 했다. 차에 주린 아이들은 택시나 트럭이 올라오면 너도나도 구경하러 뛰어나와 모여들곤 했다. 한 달에 한번 꼴로 보부상 부부가 들어왔다. 우리는 ‘서울장사’라고 불렀는데 진짜 서울에서 왔는지는 알지 못한다. 신기한 건 아내 되는 이의 얼굴 외모는 ‘서울’이라고 발음할 때의 표정이고 남편 되는 이의 얼굴 외모는 ‘장사’라고 발음할 때의 표정이었다. 그래서 서울장사라고 하는 줄 알았다. 겨울이면 엽총 든 사냥꾼이 우리 집에 와 사랑방에서 하룻밤 자고 가곤 했다. 아버지랑 무슨 친분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사냥꾼이나 가끔 오는 외부인은 거개가 우리 집에 와서 신세를 지고 가곤했다.
너무 궁벽해서 꿩조차도 재미없다고 날아들지 않을 것 같은 이런 산골에 어느 때 또 하나의 낯선 사람이 찾아들었다. 박제한 듯한 표범을 한 마리 옆구리에 끼고 있었는데 표범의 뱃구레를 열면 여러 가지 잡동사니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사내 역시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사진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는데 표범 뱃구레 안에서 진짜로 사진기를 꺼내 보였다. 아무리 궁벽한 산골이어도 뉘 집 잔칫날이면 어김없이 사진사들이 와서 플래시를 터뜨리며 찍는 것을 보곤 했고 집집이 천장 아래 가꾸(액자)를 사선으로 세워 거기 가족사진 등을 넣어 올려다보곤 했으니 사진기가 그리 신기할 것은 못 됐다.
이튿날 아침에 사내는 잘 자고 잘 먹었다고 인사치레를 하며 대신 사진을 찍어 주겠다며 우리더러 마당을 나오라 했다. 누이는 냉큼 부엌으로 가 머리에 물을 바르고 나왔고 나는 안 찍는다고 떼를 부렸다. 사진이 싫은 게 아니라 사실은 사내가 옆구리에 끼고 온 그 짐승이 무서웠다. 그래 안날 저녁부터 줄곧 겁에 질려 있었던 것이다. 나 다섯 살이었다. 결국 악장부리며 울어대는 통에 나는 사진을 안 찍었다. 막내누이는 의젓하게 표범 잔등에 올라앉아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이 여전히 남아 있어 누이는 가장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비록 흑백이지만 당시의 누이의 옷 색깔이 연보랏빛 블라우스였던 것이 생생하게 눈에 남아 있다. 사내가 역시 표범 뱃구레에서 꺼내 준 장난감 권총을 엇메고 참말 의젓하게 찍은 어린 소녀의 사랑스런 모습이다. 다른 식구들은 찍었는지 안 찍었는지 기억에 없고 사진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나는 어서 빨리 무서운 아저씨가 그 무서운 짐승을 가지고 빨리 가기만을 바랬다.
그 후에 떠도는 풍문으로 그 사진사가 이북에서 넘어온 간첩이라고들 했다. 진위는 여전히 알 수 없으나 그때의 정세로 보아 그럴듯한 풍문이기도 했다. 60년대 말, 강원도 산악지역에 왕성하게 무장공비가 출몰하던 그 때였다. 울진삼척의 무장공비 이야기는 나중에 국민학교 들어가서도 교과시간에 배우기도 했거니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외치다 처참하게 입을 찢겨 죽은 평창 이승복의 이야기도 그때였다.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한 것은 그 절정이었다. 사람들은 사진사의 표범 뱃속에 무전기와 총이 들어 있다고 확인되지 않은 추측들을 하며 치를 떠는 척들을 했다.
내 큰형수는 열일곱에 시집을 왔다. 그 당시도 어리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그런 조혼유행이 한시적으로 있었다. 무장공비토벌 명목으로 큰형수의 집이 있는 갈기터 너머에 군인들이 들어와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군인들이 산골처녀에게 수작을 붙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꼭 수작이 아니더라도 어쩌다 이런저런 말마디를 건네다 보면 가령 그 처녀를 좋아하는 총각이 있어 그 광경을 본다면 곱게 보일 리 없다. 실제로 군인들에게 시비가 붙어 싸움을 벌인 경우도 있었다. 당연 잘 훈련된 군인들에게 무지렁이 산골촌놈은 상대가 안 돼 작신 두들겨 맞고 끝났지만 그런 불미한 일이 앞으로도 계속 벌어질 불씨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 내 형수를 비롯한 어린 처자가 있는 집은 서둘러 시집을 보냈던 것이다. 형수는 열일곱 나는 다섯. 지금으로 치자면 여고 1학년 뻘이니 그게 뭘 알겠는가. 그저 시집이라고 오긴 했지만 그냥 어린 소녀였다. 애기 같은 막내 시동생은 왠지 형수가 좋아 하루 종일 따라다니며 장난을 치고 짓궂게 차근덕거리고 형수는 또 역시 철부지 소녀라 같이 웃고 장난치고. 생각하면 우리는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무구 어떤 나날들이 가장 행복한 시절임을 새삼 깨닫는다.
공비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우리 집하고 인연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공비들에게, 아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게 감사를 드려야 하나.
그때는 그렇게도 살갑고 친밀했는데 나이가 들며 왠지 모르게 점점 형수가 어려워지고 점점 멀어지더니 지금에사 마음은 또 한없이 친근해서 다가가고 싶은데 여전히 몸은 그렇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