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유년의 대뜰

콩 타작

설리숲 2013. 11. 19. 01:44

산골의 하늘은 말 그대로 손바닥만 하다. 겨울이 일찍 오고 늦게 간다. 쎄가 빠져라 일한다고 하지만 기실 산골 농사꾼이야 짧은 여름 한철 일하는 게 고작이다. 입추가 지나면 벌써 찬바람이 분다. 한 해 계량은 오직 논밭에서 거둔 곡식 밖에 없다. 가을부터 봄까지는 벌이를 하지 않으니 산골 사람들은 가난할 수 밖에 없다. 대처에 나가 날품팔이를 할 생의도 못 낸다.

 

 농사철은 짧아도 가을밭엔 배추와 무가 꽂혀 있었다. 가난한 살림에 그나마 김치 깍두기가 있어야 먹고 사니 그건 김장용 무 배추였다.

 한 해 농사 중에 가장 늦게 끝나는 게 콩타작이었다. 물론 가을부터는 벌이를 안 한다고는 했지만 사람들은 늘 바빴다. 어머니는 바깥마당에서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하루 종일 참깨를 털었다. 그럴 때 특유의 깨냄새가 코를 찔러 알 수 없는 가을의 서정을 느끼게 했다. 이따금 참깨에서 시커먼 깻망아지가 기어나와 어린 나를 기겁하게 하기도 했다.

 

 이미 서리도 내리고 매운 찬바람이 불어 산그늘부터 겨울의 한기가 느껴지는 때 드디어 콩을 타작했다. 콩이야 두말할 것 없이 쌀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곡물이었다. 식량으로서 뿐만 아니라 한국의 음식에 반드시 들어가는 간장 된장을 만들려면 콩이 있어야 했다. 콩을 갈아 두부도 만들어 먹었다. 여름 밭에는 밥밑콩이 있었고 울타리에는 강낭콩이 기어올랐다. 더불어 동부와 팥도 심어 거뒀다.

 

 그 며칠 전에 베어다 마당 귀퉁이에다 쌓아 놓은 콩 가리를 이른 새벽에 아버지와 형이 마당에다 가득 펼쳐 놓았다. 어깨가 오스스 떨리게 춥다. 집안 식구끼리만 했는지 아니면 이웃의 아저씨들도 불러다 했는지는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어쨌든 하루 진종일 도리깨질을 해댔다. 마당에다 화로를 내다 놓고 손이 시리면 가끔 도리깨질을 멈추고 화로에 손을 쬐고는 다시 도리깨를 잡았다. 콩알이 사방으로 튀어 어린 아이들은 그걸 주우러 돌아다니는 게 일이었다. 아이들의 즐거움의 하나는 화로에다 콩을 구워먹는 거였는데 누나들은 익은 콩을 부젓가락으로 잘도 집어내는데 여섯 살 꼬맹이인 나에겐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날은 추워 입술이 새파랗게 되어도 아이는 그런 날이 좋았다. 어쨌든 그날은 평소엔 먹어 보지 못하는 하얀 이밥에 돼 비계 몇 점 뜬 국을 먹었고 고등어구이와 콩나물 반찬도 먹었다.

 돌아보면 농사꾼의 생활은 참으로 고된 인생이었다. 아이들은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었다. 근심걱정을 인지할 때가 되면 그의 고된 인생이 시작되는 거였다. 그리고 그것은 죽을 때까지 그의 삶을 지배했다.

 

 온종일 도리깨질을 하고 산그늘이 지기 시작하면 타작이 거의 끝났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 아니다. 마당엔 콩이 타작한 콩뿐만 아니라 그 위로 콩대와 콩깍지가 두껍게 덮여 있어 그걸 또 분리해야 했다. 어디서 빌려 왔는지 바람개비를 세워 놓고 돌려댔다. 바람개비 날개 앞에서 삽이나 삼태기로 콩을 흘리면 콩깍지는 날리고 콩알만 떨어졌다. 지극히 원시적인 분리법이었다. 그래도 완전히 분리되진 않았다. 어머니는 또 쉬지 않았다.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키로 나비질을 했다. 내 보기엔 바람개비보다 키가 더 깨끗하게 날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양은 바람개비보다 턱없이 적었다.

 

 땅거미가 지고도 한참 뒤에야 일이 끝났다. 어둔 하늘엔 별이 총총 떠 있곤 했다. 몹시도 추웠다. 벌써 찬이슬이 내리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고단한 몸을 뉘이고 어머니는 저녁밥을 지으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마당에 내놓았던 화로는 오래 전에 불기가 없어 싸늘한 재만 남아 있었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고단하게 일을 해도 늘 먹는 게 주렸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콩 타작만 해도 그날 새벽부터 별이 뜰 때가지 타작을 했건만 살다 보면 늘 양식이 모자라곤 했다. 그 양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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