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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사 가는 길

강천사를 처음 찾았던 게 2002년 12월이었다. 공동체마을에 축복하지 못할 결혼식이 있었다. 축복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결혼이 있었다. 감히 말리지는 못하고 그냥 나와 버렸다. 그들의 결혼을 부정하는 내 알량한 의사표시였다. 날은 왜 그리 추운지 전라도 일대는 눈 내리고 며칠이 지나도록 녹지 않고 그대로 설원이었다. 차창 밖의 설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낭만적인데 그 정취를 즐기지 못하게 마음은 얼어 있었다. 이름 모를 산협 모퉁이의 암자들을 찾아다녔다. 훗날에야 일종의 ‘암자순례’로 포장했지만 사실 당시는 왜 그러고 싸돌아다녔는지 알 수가 없다. 실은 그 며칠 전부터 정찬주의 포켓용 책을 일고 있었던 참이었다. 책에 소개된 암자들을 찾아 전라도 일대를 헤메 다녔다. 시시각각으로 그때의 소회를 적은..

갑사 가는 길

다시 또 가을. 그것도 만추. 어김없이 자연은 그대로 순환하는데 변하는 건 사람의 일이다. 조금씩 늙어 가면서 똑같은 가을을 맞다가 가뭇없이 소멸한다. 그 뒤를 다른 사람들이 살다가 역시 소멸하고. 어떻게 보면 이것도 끝없는 순환의 반복이긴 하지만. 갑사는 처음이다. 춘마곡추갑사. 우정 가을에 방문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이것도 때를 못 맞춰 빨간 단풍이 흐리마리 끝나 가고 있었다. 그러나 만추의 풍정이 곳곳에 가득하니 진짜 가을을 실감하겠다. 곧 이 길에 눈 내리고 겨울 오겠지. 드라마 중, Return To Love

책마을해리

해리는 다비치의 그 해리가 아니다. 고창군 해리면이다. 폐교된 나성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서 책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리모델링이라고는 했지만 폐교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건물의 지붕만 바꾼듯하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는 하는데 내가 읽은 책 속에는 길이 없었다. 그러나 길 아니더라도 다른 것들은 있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다 보면 갈피 안에 라면 가닥이 말라붙어 있은 적도 있고, 그런 류의 음식물 흔적이 많았다. 또 천 원짜리와 만 원짜리 지폐를 득템한 적도 두어 번 있었다. 그러니 책을 읽으면 돈이 생긴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를 지향하는 나는 책 읽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는 게 많아지면 번민과 고통도 많아진다는 나만의 해괴한 논리다. 그렇지 않은가...

영동 백화산 계곡길

11월. “모든 것이 다 사라지지는 않은 달” 모든 달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인디언들의 11월에 대한 개념이다. 그렇군. 들판도 텅 비고 나무도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하고, 버석거리며 말라 가는 우리네 휑한 가슴. 다 사라져 간 것 같지만 집 밖 어디든 서 보면 11월은 텅 비어 있지 않다. 오히려 풍성해 보이는 것은 내 기분 탓이겠고. 충북 영동 백화산 계곡의 석천을 따라 걷는 길은 한 해중 이맘 때가 가장 아름답다. 벼르고 별러 떠난 가을 도보여행. 11월 첫날. 가을 반야사, 가을 계곡, 그리고 낙엽 그리고 비. 새초롬히 내리는 비와 함께 11월이 시작되었다. 촉촉이 물기 머금은 풍경이 운치 있어 맑은 날이 아닌 게 더 행운이었다. 가뿐하니 머릿속도 한결 상쾌하다. 별로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데..

이화동 골목

탐방객의 눈은 낯설고 이국적인 풍취를 즐기려고만 하지 그곳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의 척박한 불편한 생활은 전혀 생각해 보려 않는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한국의 몽마르트’라고 불리는 낙산공원 언덕 그리고 골목길. 주민들의 불편을 도외시하면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이 있는 명소이긴 하다. 대학로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빠져나와 언덕을 오르다 보면 모던과 포스트모던의 그 어름에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몽마르트를 가 보진 않았지만 과연 그럴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본다. 예술가들에게 창작의 욕구와 영감을 줄만도 하겠구나. 나도 목에 건 카메라가 있으니 이것저것 찍는다. 내로남불 나 역시 주민들의 눈엣가시 중 하나다. 시인은 시상을 떠올리겠고 음악가는 악상을 떠올리기도 하겠다. 이미 미술가들은 한바..

꽃잎 날리던 벼랑에 서서, 낙화암

거기 노총각들 내 얘기 듣고 고대로 함 해봐. 올해 안에 장가가게 될꺼야. 거왜 충청도 가면 낙화암이라는 데 있잖아. 예전에 삼천 궁녀가 떨어졌다 하는데 요즘도 거기 여자들이 떨어지러 많이 온다더군. 그니까 그 밑에 기다리고 있다가 떨어지는 여자를 받아서 살려내는 거지. 그 여자랑 사는 거야. 누가 몸으로 받아 내라는가? 같이 죽을라고? 왜 소방구조대원들이 불이 나면 밑에다 쿠션이나 뭐 그딴거 설치하잖아. 매트리스 몇 개 깔아놓고 기다리면 돼. 아 장가갈라믄 그 정도 투자는 해야지. 언제 떨어질지 모르니까 텐트를 쳐 놓고 당분간 기거하면서 지내는 거지. 그런 노력과 인내심도 없이 거저 여자를 얻을라구? 기껏 받아낸 여자가 늙수그레한 할머니라도 어쩌겠어. 이게 내 팔자구나 하며 델꼬 살아야지. 어차피 우리..

설악산 주전골

지리산을 좋아하지만 역시 설악산이 명산이다. 북쪽의 금강산이나 칠보산은 못 가봤으니 말할 건 없고 남한에서는 설악산이 갑이다. 피를 토한듯한 단풍을 기대하고 들었지만 좀 이른 건지 올해의 단풍이 이런 건지, 혹은 내 기대치가 높아서인지는 모르나 절정의 붉은 단풍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설악의 절경은 명불허전이어서 감탄이 절로 나온다. 예전에도 몇 번 가보지 않은 건 아닌데 그때는 도대체 뭘 보고 다녔는지 지금의 황홀한 감상이 없었다. 사물을 보는 눈도 연륜이 붙어야 진면목을 알아본다는 걸 짐작한다. 수없이 마주쳐 지나가는 아이들은 그저 계단 깡충깡충 오르는 것에 더 흥미가 있지 산세를 감상하지는 않는 것이 느껴지니 짜장 나의 그 짐작이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사람들의 예상에 이 주말이 단풍절정인데다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