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책마을해리

설리숲 2020. 11. 12. 23:37

해리는 다비치의 그 해리가 아니다.

고창군 해리면이다.

폐교된 나성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서 책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리모델링이라고는 했지만 폐교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건물의 지붕만 바꾼듯하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는 하는데 내가 읽은 책 속에는 길이 없었다.

그러나 길 아니더라도 다른 것들은 있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다 보면 갈피 안에 라면 가닥이 말라붙어 있은 적도 있고, 그런 류의 음식물 흔적이 많았다.

또 천 원짜리와 만 원짜리 지폐를 득템한 적도 두어 번 있었다.

그러니 책을 읽으면 돈이 생긴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를 지향하는 나는 책 읽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는 게 많아지면 번민과 고통도 많아진다는 나만의 해괴한 논리다.

그렇지 않은가. 아이들은 얼마나 해맑고 순진무구한가. 세상을 잘 모르니 그렇다. 좋아하는 피자나 아이스크림만 입에 물려주면 얼마나 행복해하냔 말이지.

머리가 크고 지식을 습득하면서 사람의 심신은 온갖 스트레스가 축적되고 힘들어진다.

아이의 천진난만은 우리에게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는다.

 

온달이 그대로 바보였다면 어머니와 더불어 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테지만 똑똑해지는 바람에 장군이 되어 전쟁터에서 생을 마감했다.

 

 

 

책마을해리는 비주얼로는 볼만한 건 그닥 없다. 폐교를 책마을로 업그레이드한 독특한 발상이 좋다. 그렇더라도 늦가을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좋아 아무 아무 생각 없이 하루쯤 시간 죽이기 제격이다.

 

 

책감옥

책 한 권 다 읽기 전엔 못 나온다는 설정의 공간이다. 그래서 그런가. 들어가는 사람을 못 봤다.

 

책마을해리는 입장료는 없지만 대신 한 권의 책을 구매해야 한다. 보통 책값이 1만 원이 넘으니 이걸 입장료라 치부하면 제밥 비싼 입장료다. 구비된 책이 많지 않아 선택의 여지가 좁다. 나는 <82년생 지영이>를 샀다.

 

 

진짜 책마을은 옛 폐교의 본교사 격인 건물이다. 도서관을 방불하게 많은 장서가 있다. 이곳에서는 시간만 충분하다면 읽고 싶은 책을 원 없이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기껏해야 하루에 한 권 이상을 읽을 수 없으니 다음 날 다시 들어오려면 또 책 한 권을 사야 한다.

 

 

책도 책이려니와 그보다도 이곳의 명물은 개다. 마당에 터주대감처럼 쉽독 한 마리가 있는데 얼마나 순둥인지 방문객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나처럼 책읽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여행지로서 한번쯤 다녀올만 한 곳이다. 큰 기대만 하지 않는다면.

 

 

 

 

 

 

스카를라티 피아노소나타 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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