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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바다 전설

내륙의 산골은 그 아침에도 싸늘했다. 약속시간을 한 시간이나 늦춰야 되게 늦잠을 잤는데 그제도 마당에 하얀 서리가 덮여 있었다. 그의 얼굴을 오랜만에 본다. 늘 가까이 있는 느낌이지만 실상 1년만이다. 묵호항... 오들오들 떨 정도로 추운 산골의 아침과는 확연히 다르게 따뜻하다. 잔잔한 바다. 고요한 바다. 항구에 가면 사람의 냄새가 난다. 비릿한 생선냄새가 아닌 활기차고 부산한 삶에의 의지로 가득한 인간 냄새. 아직은 새벽어둠이 푸르스름할 때 거친 파도와의 비장한 게임을 마친 고깃배들이 돌아오면 선창과 어판장은 이미 생활의 가장 중심에 들어 왁자지껄 부나하다. 아침놀을 날개에 얹은 갈매기떼 어지러이 날고 몇 놈은 밤새 일한 어부보다 제가 더 고단한 척 배의 이물에 앉아 있다. 바다는 그렇다. 더구나 항..

홍주, 그 붉은 유혹

술을 아주 좋아한다고 구라를 친다. 그러면 내가 억병 주태백인 줄 안다. 기실 소주 두 잔이 적량이고 그 이상은 못 마신다. 까무라치는 게 아니라 속에서 받아주질 못해 토악질을 한다. 그러므로 여태 필름이 끊긴다는 걸 경험해 보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그러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구라는 아니다. 술 엄청 좋아한다. 많이 마시지 못할 뿐이다. 맥주만 말고 모든 술을 다 좋아한다. 진도 홍주. 빨간술. 다른 음식들도 그렇지만 술도 역시 비주얼이 좋은 걸 선호한다. 맛이야 다 거기서 거기고 우선은 강렬한 유혹의 마력이 있음. 맥주는 싫어한다. 우선은 맛이 싫고 비주얼이 그렇다. 꼭 오줌 같다. 거품이 덮이면 더 그렇다. 맛도 오줌 같다고 하면 맥주 비하일까. 홍주. 알코올 40% 독주다. 한 잔만 마..

강릉 월화거리 커피거리

KTX가 들어오고 구 영동선이 폐쇄됐다. 강릉 시내를 지나던 옛 철로를 걷어내고 새로 조성한 테마거리가 월화거리다. 청춘시절에 청량리에서 출발하여 해돋이 무렵에 정동진에 도착하는 열차가 있었다. 특별히 운행한 게 아니라 운행배차의 하나였고 청춘남녀들이 많이 타던 노선이어서 토요일의 그 열차는 늘 매진이었다. 서울이 아닌 강원도에 살던 나도 그것을 타려고 일부러 애인이랑 청량리로 가곤 했었다. 연인과 1박 2일 보내곤 싶지만 모텔을 가기는 어색하고 부담스러웠던 젊은이들의 차선의 선택지였던 셈이다. 이젠 가버린 추억이다. 낭만은 사치고 고속질주가 진리다. KTX는 순식간에 우리의 여행문화를 바꿔 놓았다. 근래 다시 토요일 밤에 그 열차를 운행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어쩐지 김이 빠진 모양새여서 옛 추억이 그립..

가을비 우산 속에

우요일 雨曜日인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나뭇잎도 젖고 포도 위도 젖고 우산 머리카락, 입술... 내 가슴도 젖고 카메라도 젖었다. 웬 가을비가 이래 마이 오노. 비 비 또 비... 우산 우산 그리고 우산... 봉화산 둘레길과 경순선 숲길 걷다. 이렇게 빗속을 걸었던 때가 언제였나 그것도 가을비를. 잔뜩이나 가을을 타는 내가 이렇게 촉촉이 비까지 젖으면 차마 감당하지 못하게 센티멘털해진다. 우리는, 또 나는, 거침없이 가을의 깊숙한 한가운데로 들어가고 있었다. 묵동천이 삽시간에 범람하여 아슬아슬하다. 이미 길 위로 물이 넘쳐 더이상 가지 못하고 우리는 되돌아서야 했다. 뭔놈의 가을비가 이래 억수로 퍼붇노. 이 가을이 고 최헌님의 10주기 되는 계절이다. 님은 갔어도 노래는 남아 이토록 사무치게 가슴을..

마음의 거리

근래 어느 날 이범학의 노래 를 듣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태까지 ‘거리’가 street인줄 알았다. 그런데 잘 들으니 street이 아니고 distance였던 것이다. 어색한 느낌의 연인과의 보이지 않는 거리다. 젊었을 때는 막연히 따라만 불렀지 그 노랫말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돌아보니 모든 노래를 다 그렇게 가벼이 지나쳤다. 나이 들어서야 비로소 그 노랫말을 곱씹고 음미하게 되는 것이다. 다섯손가락의 는 도시를 떠나 훌훌 낯선 곳으로 여행한다는 다분히 낭만적인 가사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사랑하는 연인이 죽은 내용이다. 아, 이렇게 처참하게 아픈 노래인 걸 이제껏 모르고 있었다. 하나더 예를 들면 김광석의 에는 “너의 목소리가 그리워도 뒤돌아볼 수는 없지”라는 노랫말이 있다. 연인..

드디어 으름을 먹어 보다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게 있었다. 사진으로도, 직접 숲에서도 수없이 봐 왔던 것. 으름이다. 이걸 한 번 먹어보는 것이엇다. 수없이 본 것은 덩굴이나 잎, 또 꽃이었고 가을 초입에 열매도 보아 왔지만 아직 익기 전이었다. 그래 그 흔한 걸 여직 한번도 먹어보지 못하였다. 회사 옆댕이 숲에도 으름덩굴들이 있어 작년 가을에 보니 제법 많이 달렸다. 올커니, 올해는 먹어 보겠구나 했더니 어쩐 일인지 그냥 까맣게 잊어먹고 있다가 퍼뜩 생각나 가 보니 이미 다 떨어져 없어진 뒤였다. 스스로 게으른 건 늘 자인하고 있는 터지만 이건 좀 아니다 싶다. 어쨌든 작년은 게을러서 못 먹어 보고 올해도 보니 또 작년처럼 달려 있다. 이번엔 잊어 먹지 말자고 집중해서 염두에 두고 있다가 드디어 오늘 탐스럽게 벌어진 으름 하나..

삼강주막과 회룡포

한국의 복고풍이 조금은 짙은 곳이 예천이 아닌가 한다. 금당실에서부터 더러더러 눈에 띄는 누각과 정자들. 현재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주막이 풍양면에 있다. 물론 옛 건물은 아니나 그래도 초가지붕을 씌우는 등 옛것과 비슷하게 조성해 놓았다. 삼강주막에서 사림재를 넘으면 회룡포다. 낙동강의 지나면서 만든 독특한 지형이다. 영주의 무섬마을 안동의 하회마을과 함께 회룡포가 유명하다. 이런 곳은 대개 모래사장이 넓다. 물이 휘돌면서 강변에 모래를 쌓아 놓기 때문이다.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시에 적절한 적절한 풍경이다. 이 길을 카페 정기도보로 다녀왔다. 처음은 아니다. 그날밤 열대야가 이어질 정도로 무더운 날이었다. 추석도 지난 청풍명월의 계절에 열대야라니. 아무튼 사나흘 이상 고온이 맹..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광고카피 하나로 매출이 대박을 터뜨리고 그 기업은 주가가 올라 대성공을 거두지요. 이제껏 히트를 친 명 카피를 모아 봤습니다. 당신은 어느 게 가장 기억에 남나요. 여보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놔드려야겠어요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여자라서 행복해요 산소 같은 여자 너구리 한 마리 몰고 가세요 여러분 부~자 되세요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 잘 자 내 꿈꿔 감기 조심하세요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국물이... 끝내줘요 또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화장은 하는 거보다 지우는 게 중요합니다 가자 해를 따라 서쪽으로 짜장면 시키신 분~ 니들이 게맛을 알어? 가슴이 따뜻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사랑과 정열을 그대에게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나는 이 카피가 가장 좋습니다. 주말..

김포 금빛수로

계절은 분명히 가을인데 무척이나 더웠다. 안날부터 감기 기운이 돌더니 이 날 아침엔 맑은 콧물이 흐르기 시작. 시절이 시절인지라 혹시 코로나가 아닌가도 했지만 증상으로 보아 그건 아니다. 게다가 회사사람 말고는 누구랑 접촉한 적이 없으니 코로나 바이러스를 들이마셨을 가능성이 적다. 라는 이름의, 원래는 '김포대수로'였던 물길을 걷다. 그닥 길지 않은 거리를 걷는데 뜨거운 햇볕에 숨은 턱턱 막히고 감기가 더해 몹시 불편하다. 땀도 흐르고 몸 상태도 찌뿌드드한 게 영 좋지 않다. 콧물은 쉴 새 없이 흐르고 잠깐잠깐 쉬기를 반복한다. 이 금빛수로는 원래는 농사용 하천으로 비가 안 오면 물이 없는 건천이었던 것을, 김포시가 ‘한국의 베니스’를 표방하며 야심차게 기획한 프로젝트다. 팔당댐에서 물을 끌어와 흐르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