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884

도시투어 서울 한남동 골목

카페 자리가 꽉 찼다. 운 좋게 빈자릴 차지하고 앉다. 월요일이다. 저녁 8시 32분. 웬 여자들만 이래 많지? 남자는 없다. 여자들 소굴에 나만 청일점으로 비비고 앉았다. - 주말에 애인들과 데이트하고 월욜엔 여자들끼리 만나서 애인 자랑도 하고 흉도 보고 소개팅 갔다 바람 맞은 얘기도 하고 수다 떠는 거예요 - 그녀가 제법 그럴듯하게 설명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남자가 어째 하나도 없는 건가. 놈들은 도대체 어디서들 방황하고 있나. 여자들이 지들을 저렇게 씹어대고 있는데... 월요일 저녁 8시 32분이다. 한남동 골목길을 거닐다. 화려하거나 세련된 골목은 아니라도 구석구석 구경하면서 한나절 놀기에 제법 매력이 있다. 인근 이태원 거리와 연계되어 서서히 핫플로 부상하고 있는 이 골목들이다. 여기도 온통 여..

휴휴암

어느 해 연분이었는지. 유치한 치기로 방랑의 길을 다니던 시절이었다. 오색에서 대청봉을 넘어 용대리로 내려간 적이 있었다. 영시암 조금 지난 곳에서 스님 하나와 동행을 하게 되었다. 동행이라고는 하지만 처음 눈 마주쳤을 때 합장한 것 말고는 둘 다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의 뒤를 발맘발맘 말없이 걷는 게 다였다. 신기하게도 묵언이었지만 많은 대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석양이 가까운 무렵이라 곧 어둠이 내리면 혼자 밤길 가는 게 걱정이더니 스님이 앞에서 걸어주니 천군만마 얻은 듯 든든했었다. 백담산장 쯤 왔을 땐 어둑신하게 땅거미가 내렸다. “혹 사시다가 좀 버겁다 싶으면 관세음보살을 부르세요” 말마디 없던 우리 둘 사이에 느닷없이 일방적으로 건너온 말이었다. 생뚱스러웠다. 난데없는 관세음보살이라..

차밭이 있는 풍경 다솔사

다시 다솔사. 몇 년 만에 갔더니 상전벽해가 되어 있었다. 우선은 대규모 주차장이 번듯하게 들어앉았다. 이젠 여기도 관광지가 다 됐구나. 다솔사로 들어가는 길이 아름답다. 선차도량이라 해서 처음에 茶率寺로 알았는데 多率寺다. 이름처럼 소나무숲이 장관이다. 그것보다는 쭉쭉 뻗은 삼나무 편백나무 숲길이 빼어나다. 경내는 털머위로 뒤덮였다. 노란 꽃이 필 무렵엔 이것도 볼만하겠다 싶어 다음엔 언제 올까를 재 본다. 푸르른 나날이다. 사시사철 푸른 차나무의 고고함이 미쁘다. 일주문 없는 들머리는 울창한 나무숲이다. 이 길에 서면 정신이 맑아져 그때 문득 세계 모든 것은 空이다. 대양루는 설법도 하고 다솔사에 대한 자료를 전시해 놓았었는데 이번에 가니 출입을 통제해 놓았다. 적멸寂滅이 아닌 적막寂寞의 공간이 돼 ..

미인폭포를 찾아 심포협곡 속으로

강원도라 심심산천엔 우리가 모르는 비경들이 많기도 하여라. 너무 높아 기차도 힘들어 스위치백이라는 방법으로 힘겹게 태백산맥을 넘었던 추억이 있었다. 그곳에 깊은 협곡이 있다. 심포협곡. 여전히 사람이 드나들지 못하게 험한 지형이다. 뭐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고 관에서는 수식어를 붙였지만 어불성설, 낯간지러운 수식어다. ‘그랜드’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지는 아닐 테고. 그랜드캐니언의 모태끝을 떼어다 놓은 정도라 할까. 그래도 어쨌든 강원도에서만 볼 수 있는 심심유곡의 절경이다. 심포협곡은 역암층 지질이 강물에 침식돼 만들어진 협곡으로 현재 그 깊이가 270여 미터라고 한다. 이 협곡에 장쾌한 폭포와 신비스런 용소가 있어 거기까지 사람들에게 개방됐다. 골벽을 타고 거의 수직으로 내려간다. 친절하게도 나무데..

식물의 낙원, 외도 보타니아

보타니아. 거제 장승포항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가면 외도다. 실제로는 30분 소요되는 뱃길이지만 해금강을 유람하는 선사측의 프로그램 코스라 갈 때는 한 시간이고 나올 때는 30분이다. 나는 장승포에서 배를 탔지만 외도로 가는 배편은 구조라 와현 지세포 도장포 다대항 등에서 출항한다. 어느 곳에서 타든 소요시간, 배삯과 입장료가 동일하다. 외도 자체가 보타니아고, 보타니아가 곧 외도다. 보타니아는 식물의 낙원(botanic + utopia)이란 뜻이다.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정원이다. 오롯이 인공으로 가꾼 곳으로 구석구석 허투루 내버려 두지 않은 섬세한 예술품이다. 초록의 계절인 지금이 가장 아름다운 철일 것 같다. 생전 처음 보는 기화요초들이 즐비하다. 문득 전설의 섬 이어도를 생각했다. St..

보라색 평원, 정읍 허브원

작년 고창 청농원의 보라색에 마음을 주고 와서는 올해는 정읍 허브원을 갔다. 고창의 그것보다도 훨씬 규모가 커서 거의 네 배 정도 될듯한 넓이다. 당연 예상되는 인파를 피해 평일 아침 일찍 방문하니 한산해서 좋다. 질펀하게 보랏빛 깔린 풍경이 근사하다. 라벤더는 하필 보라색일까. 내가 좋아하는 노랑이나 주황색이 아니고 보라색을 제 색깔로 선택했는지. 사람들은 보라 꽃을 좋아할까. 기실 보라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노랑이나 빨강 흰색 꽃들은 우리가 흔히 보는 꽃들이라 흔하지 않은 보라꽃이 인기가 있을 테다. 그래서 라벤더나, 맥문동 혹은 핑크뮬리 농원들이 핫플이 된다. 내년에 또다른 라벤더농원엘 가게 될지. 강수지 : 보라빛 향기

팀 동료들과 1박 2일

보현사 강문해변 휴휴암, 숙소인 외옹치해변 속초중앙시장 작년 봄에 벚꽃놀이 간다고 한 달에 만원씩 적금을 했는데 아직까지 한번도 쓰지 않았다. 그 돈 쓰자고 장마 오기 전 1박 2일 스케줄 잡다. 가기 전엔 유명 관광지 여러 곳을 선정했지만 늘 그렇듯이 여행이란 길 떠나면 그런 계획들이 다 의미 없다. 밥집 찾아 먹는 것 이외에는 바닷가 잠깐 거닐고 사진 찍고, 숙소에서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그냥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시간을 보내는 게 좋은 거지. 이매진 드래곤 : Believer

빗 속으로... 평해길 5길

무슨 조화인지, 주말과 휴일만 되면 내리는 비. 오늘 같이 이쁜 비, 폭우가 아닌 이런 가랑비는 덥지도 않고 운치도 있고, 더구나 남한강변 신록을 더욱더 새뜻하게 해 줍니다. 자전거 타는 사람도 적으니 호젓하고 고즈넉해서 그 또한 좋습니다. 초여름의 수채화 같은 비 풍경을 누리고 돌아왔습니다. 시골 처마 밑에서 낙숫물을 보고 있자니 공연히 객수. 어제 나는 사랑에 젖고 오늘 나는 비에 젖네 바람 한 점 옷깃을 스쳐도 상처 받는 이 가슴이 오늘은 비에 젖고 외로움에 젖네 카메라를 새로 개비했습니다. 오늘 그걸 개시하는 나들이였는데 기능도 모르고 조작매뉴얼도 숙지하지 못하고 뷰파인더에 보이는 대로 허명대고 찍었습니다. 구 도구에 밴 습관 때문에 새 도구가 영 손이 설고 찍은 사진도 썩 맘에 들지 않습니다. ..

중국 전통 정원, 수원 월화원

수원 태생인 여류화가 나혜석을 시는 문화인물로 선정하고 기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인계동에 ‘나혜석거리’가 있다. 나혜석거리의 끝에 효원공원이 있고 공원 안에 중국 전통 정원이 숨어 있다. 월화원 (粵華苑). 2003년 10월 경기도와 중국 광둥성이 체결한 '우호 교류 발전에 관한 실행 협약'의 내용 가운데 한국과 중국의 전통 정원을 상대 도시에 짓기로 한 협약에 따라 2005년 6월 15일에 착공하여 2006년 4월 17일에 개원했다고 한다.. 중국 전통 정원인 영남 정원과 같이 건물 창문으로 밖의 정원 모습을 잘 볼 수 있게 하였고 후원에 흙을 쌓아 만든 가산(假山)과 인공호수 등을 배치하였다. 또 인공폭포를 만들고 배를 본떠 만든 정자를 세웠다. 곳곳에 한시와 글을 새겼고 하얀 가루로 푸른 벽돌과 ..

한국 속의 불국토, 천불천탑

사흘 내내 비가 흩뿌렸다. 을씨년스럽다. 천불천탑이라 한다. 워낙 많아 세어 보진 못하지만 아마도 천불 이상이고 천탑 이상일 듯하다. 우중충하고 좀은 음산한 날씨에 보이는 풍경은 자못 기괴한 느낌도 있다. 홍콩 무협영화나 류의 고전판타지영화 같은 데서나 접한 이색적인 풍경이다. 안개라도 자욱했으면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여긴 합천에 있는 허굴산이다. 관음보살이 강림했다는 설이 전해져 오는 일종의 성지인 이곳에 한 스님이 10여 년 동안 주위의 돌들을 모아 탑을 쌓았다고 한다. 탑 쌓는 것도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보다도 불상들은 어찌 모았는지 불가사의다. 불상들이 모두 다 정교하다. 이걸 손수 제작하지는 않았을 터. 한 관광객이 사찰은 어디냐고 내게 물어 온다. 사찰은 없다. 여긴 그냥 ‘천불천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