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884

벼랑 위의 연꽃, 산청 정취암

길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다.바다로 바다로 걷다가 더이상 갈 수 없는 곳에 여수 향일암이 있다면산청의 정취암은 산기슭으로 오르다 오르다 벼랑 끝에서 만나는 것이다. 예전에는 천애절벽의 이 암자엘 오르기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지금은 대형버스도 문 앞까지 다다른다.‘벼랑 위의 연꽃’이라는 수식어가 있는 산청 5경 중의 하나라니 관광객이 많이 오나 보다. 암자의 규모에 비해 주차장도 크다. 산청에서 지낼 때는 가까우니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다녀올 여건이었지만마음만 있었지 게으름 피다 한번도 가보질 못했다.이제서 먼 길을 다녀오다.         원래는 正趣寺였다.정취보살(正趣觀音菩薩)을 본존으로 모신 데서 붙인 이름일 거라는 추측이다. 정취보살은 구도의 길을 떠난 선재동자가 스물아홉 번째로 만난 선지식이..

을왕리 해변 노을

사는 게 먹먹해져 밑바닥처럼 타락하고 싶은 날 우리 공항철도 타고 을왕리로 가자 푸른 하늘에 떠 있는 낮달 바라보며 지금까지 끌고 온 길 밑줄 치며 삭제해 보자 파도소리보다 먼저 와 우리를 염탐하고 돌아가는 바람의 뒤통수에 힘껏 고함을 질러 보자 지난날의 패배 미래의 두려움 모두 저 푸른 바다에 수장시키자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절망의 날을 만날 때 공항철도 타고 을왕리로 가자 푸른 바다에 우리를 맘껏 버리고 오자 - 이권 새가 왕성해서 을왕(乙旺)리라던가. 내가 이 섬에 와서 처음 만난 건 갈매기다.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드니 갈매기들도 먹을 게 많아서 해변으로 죄다 몰려드나 보다. 여기도 갈매기 저기도 갈매기. 을왕리 바다. 노을이 궁금했다. 흐리지 않은 날씨라 괜찮다. 평일에도 사람들이 많다..

서산 유기방 가옥 그리고 수선화

유정은 군위 한밤마을을 가고 싶어 했는데 계절적으로 좀 이르다고 대신 선택한 게 서산 유기방가옥이다. 시기적으로 수선화가 한창일 것이었다. 나도 명성만 듣고는 한번도 못 가 본 곳이다. 안날 저녁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아침에 일어나니 여전히 비가 내린다. 예보는 많지는 않아도 하루 종일 내린다고 한다. 꽃구경은 쾌청한 날이라야 하는데 비라니 조금은 설렘이 식었지만 수선화는 노란색이니 이런 우중에서는 더욱 새틋하게 화려하지 않을까. 유기방가옥이란 이름을 대부분 잘 모르는 듯하다. 유기방은 사람 이름이다. 그 일가가 지은 아름다운 한옥이다. 이곳에 오는 관광객들은 가옥보다는 수선화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다. 수선화의 화려함에 묻혀 가옥의 아름다움은 그냥 지나치게 된다. 평일인데다 날도 궂은데 사람들 엄청..

구례 지리산치즈랜드 수선화

나는 노랑색을 참 좋아합니다. 다행히(?) 우리 산내들엔 노랑 꽃이 제일 많아요. 이제 봄철엔 영춘화 산수유 생강나무 개나리 산괴불주머니 민들레 양지꽃 애기똥풀 등 다양한 꽃들이 화려함의 극치를 이룹니다. 그중에서 봄철 노랑의 여왕은 단연 수선화일 듯합니다. 들판에 지천으로 피는 우리 야생화가 아닌 외래종이라 특별히 관리하여 가꾸는 식물입니다. 그래서 전국 곳곳에 수선화 단지를 조성하여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수선화 명소는 많은데 여기는 구례에 있는 치즈랜드입니다. 젖소를 키우는 사유목장입니다. 절정으로 벙근 개화기를 잘 맞춘 덕에 화려한 노랑의 바다를 즐겼습니다. 색도 색이려니와 자기최면에 빠진 꽃미남 나르시스 생각에 더욱 매혹되는 마력이 있습니다. 물론 나는 노랑을 좋아하지만 이 색깔은 오래 ..

단양 사인암

단양과 그 일대를 지나갈 때면 수시로 ‘사인암’이란 관광지이정표가 보이곤 한다. 이름만 많이 들었지 별 관심은 없어 일말의 상식이 없던 나는 암자 이름인 줄 알았다. 얼마나 대단하기에 곳곳에 이정표가 있는 거냐. 몹시 무덥던 어느 주말 그곳을 방문했다. 아하! 암자가 아니라 물가에 병풍처럼 둘러친 암벽이다. 庵이 아니라 巖이다. 지질학 용어로는 수직절리이다. 남조천의 물이 아주 맑고 시원해 여름철 피서객들이 몰려든다. 일대에 펜션과 음식점 등 관광 인프라가 많은 걸 보아 과연 명소인 줄 알겠다. 그간 내가 관심 없이 무심하게 지나쳤다는 생각을 했다. 사인암(舍人巖)이란 이름은 사인 우탁에서 연유했다. 고려 충선왕 때의 학자인 우탁은 중학교 때 공부했던 를 쓴 학자다. 사인(舍人)은 그 당시의 정4품 벼슬..

남원 약수암

해탈교를 건너면 실상사다. 해탈. 인간들의 궁극의 목표다. 하지만 그곳에 도달한 자는 없다. 해탈이란 굴레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번뇌 근심 없는 평안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깨달은 자다. 부처가 된 그도 해탈에는 이르지 못했다. 번뇌와 근심 없는 해탈은 죽어서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해탈은 열반의 다른 말이기도 하고 곧 죽음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약수암은 실상사의 부속암자다. 암자를 가려면 실상사를 지난다. 우선은 저 해탈교를 건너야 한다. 죽음으로 가는 다리일까. 실상사는 전에도 여러 번 방문했고 앞으로도 여러 번 찾아올,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찰이라 우정 약수암을 찾아온 이번 길엔 그냥 지나간다. 약수암으로 가는 오솔길엔 노란 산수유 꽃이 한창이다. 암자 사립문 앞까지 차가 올라..

통리장을 가다

태백 통리에는 여전히 장이 선다. 과거 흥성했던 영광은 통리역 폐역으로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5일장이던 것이 현재는 매달 5, 15, 25일에 서는 10일장으로 운영된다. 이 통리장이 생각보다 규모가 상당히 크다. 지난 2월 말에 통리장엘 갔었다. 폭설이 내린 다음 날이었다. 일대는 한 길이 넘는 눈이 쌓여 도로만 간신히 제설이 되어 있을 뿐 거의 대부분이 마비상태로 보였다. 당연히 그날 장은 서지 않았다. 몇몇 주민들의 차가 오갈 뿐 적막 속에 갇힌 마을에 불도저 한 대가 제설을 하고 있었다. 겨울이 긴 강원 산골의 눈만 실컷 보고 돌아왔다. 지난 주 다시 통리를 찾았다. 아주 화창하고 따스한 날이었다. 이곳에도 봄은 가까워서 날은 푸근했으나 풍경은 여전히 한겨울이다. 1년중 반 이상이 겨울인 강..

제주 세화 해변

여전히 바다를 동경한다. 깊은 산골 태생인 내게 그는 늘 신비스러운 경외의 대상이다. 드넓은 무한의 세계. 거침없이 달리는 바람. 수려한 산협에 머물고 싶지만 때로는 광활한 바다를 꿈꾼다. 이름도 예쁜 세화 해변. 제주 북동부의 아름다운 바다. 몹시 춥고 냉랭한 날이었다. 외로운 여행자를 날려버릴 듯이 진종일 세찬 바람이 불어댔다. 옷차림이 허술해 따뜻한 방이 그립기도 했다. 맹렬한 바람은 미웠지만 맑은 날씨 덕에 바다는 내내 짙은 코발트 빛이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멋진 색이었다. 내 이름 불러줄 아무도 없는 이 땅 끝에서 나는 들불처럼 외로웠다 나를 스쳐간 바람은 빈들을 건너며 하루의 허무를 흔들고 가지만 바람길에 갈리는 먼 길 그 막막함이여 한기팔 중에서 한 쌍의 예비부부가 웨딩촬영을 하고 있었다...

매화와 기차, 강이 있는 풍경 - 양산 원동마을

원동역 플랫폼에 내리니 짙게 땅거미가 내려와 앉았다. 그래도 어른어른 사물은 눈에 들어왔다. 트랩을 건너 역광장으로 나오니 그 잠깐 사이에 완벽하게 어두워졌다. 겨울 끝이지만 어둠 내린 역광장은 제법 쌀쌀했다. 철길 너머는 바로 낙동강이다. 강에서 넘어오는 바람이 가세해 을씨년스러운 저녁이었다. 원동역에서 내린 사람은 나 혼자였다. 아직 일곱 시가 안된 시각이지만 어둠에 쌓인 거리는 적막했다. 시골은 일곱 시가 되면 사람들이 다들 제집으로 들어가 어둠과 고요함 일색인데, 도시는 반대로 그때부터 사람들이 기어(?) 나오며 휘황해진다. 그래서 즐비하게 많은 상점들이 죄다 문을 닫고 어둠이다. 저녁을 먹어야 했다. 이곳엔 편의점도 없어 밥 한 술 못 먹으면 이튿날까지 굶을 수밖에 없다. 불현듯 불안해졌다. 아..

영주 소수서원과 선비촌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애매한 계절 2월. 햇볕은 시나브로 따뜻해져 가고 대지는 메마른... 사람들 가슴에서도 버석거리는 소리가 난다. 수양버들에 물이 오르려면 아직은 더 있어야겠다. 영주 부석사를 들어가는 연도에 위치한 선비촌이다. 국사시간에 배웠듯이 주세붕이 안향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그 유서 깊은 서원과 연계하여 선비문화를 앙양고취하려는 취지로 조성했다. 단순히 관광용 눈요기가 아닌 옛 고택을 고증하여 건물들을 지었고 숙박도 한다. 겨울의 쓸쓸한 풍경이 운치 있다. 담장과 들마루 툇마루에 내려앉은 오후의 양광은 봄 느낌이 완연하다. 우도불우빈 憂道不憂貧 가난해도 가난에 구애받지 않고 바른 삶을 추구한다고. 거무구안 居無救安 사는 데 있어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