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884

찬양하라

어느 음식점엘 들어갔더니 주인이 기독교인이다. 입구 문설주에 십자가와 함께 무슨무슨 성결교회 따위 문구가 있으니 그런 줄 알지. 벽에는 시편 한 절이 쓰인 액자가 걸려 있다. 그거야 뭐. 기독교인도 불교인도 식당을 하는 거야 뭐 못마땅할 리 없지만 이 집은 들어가니 찬송가를 틀어 놓았다. 음식을 먹으면서 내내 찬송가를 듣다 나왔다. 문 닫을 때까지 그럴 테지. 불쾌하다. 신앙 깊은 주인의 성정이야 이해하려 해도 밥 먹으러 온 손님들에 대한 예의와 배려가 전혀 없는 순전히 막가파식 개신교인이다. 싫으면 네가 싫지 내가 싫어? 싫으면 오지마, 이런 식이겠다. 이런 소소한 것들 때문에 그 종교에 정나미가 떨어져 가는 것이다. 한데 그들은 아예 모른다는 게 한심하다. 하긴 그정도 되면 그 집단에선 신앙심이 깊은..

대왕암에서 방어진까지

내가 매 주말 사진 여행을 떠나는 걸 아는 동료가 울산엘 가라고 한다. 물론 울산도 여러 번 갔었지. 어렸을 때의 선입견이 평생을 지배한다. 현대가 세운 공업도시 울산. 예전엔 현대시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 이미지 때문에 울산은 내내 공장굴뚝으로 가득한 삭막한 도시로 각인되어 있다. 태화강 십리대숲이 좋아 몇 번 가보고 장기도보 때 동해안 방어진과 대왕암 일대를 걸었던 기억. 여전히 동구 일대는 정주영의 도시다. 울산을 가라고 추천해준 동료는 남편이 평생 현대중공업에서 근무해서 오래도록 그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자신의 고향처럼 애착심이 대단하다. 지난 봄 동백꽃을 보러 학성공원에 갔다 왔다 했더니 이번에 그가 추천해준 곳이 울기공원이다. 울기공원? 지금은 대왕암공원으로 알려진 곳이다. 단연 울산..

이천 산수유마을

어김없이 봄은 오고. 올봄엔 구례 대신 이천 백사마을. 봄은 왔건만 여전히 역병은 만연해 있어. 산수유마을 주차장을 완전 통제했다. 입구에는 산수유마을에 놀러오지 마시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격세지감이다. 관계자들이야 당연히 매뉴얼대로 시행하는 거지만 주차장폐쇄는 생각해볼 문제다. 어차피 산수유 꽃구경 하러 온 사람들이 주차장 없다고 돌아갈 리 만무요, 이곳저곳 빈 공간마다 차를 들이밀었다. 행길과 마을 농로마다 차들로 가득하다. 목적인 집합금지의 효과도 없고 오히려 인근 마을 주민들만 불편하다. 주민과 광광객 모두 불편하다. 이럴 거면 주차장폐쇄를 왜 하는지 답답하고 안쓰럽고. 그래도 꽃은 피고 노란 산수유꽃이 여보세요들! 봄이예요~ 손짓해 부르는 그 얼굴이 참으로 해사하다. 김윤아 : 봄이 오면

청주 벽화마을 수암골

한때는 꿈이었다. 해거름이면 언제 깨졌는지 알 수 없는 켜지지 않는 보안등 아래로 어둠이 짙어지고 고단한 몸을 이끌고 언덕길을 힘겹게 올라 퇴근하는 아버지 오빠 누나가 비척거리며 지나가던, 날이 가물어 어디서 건 듯 바람만 불면 담장과 바닥의 바스락거리던 시멘트 가루가 날려 눈을 못 뜨던, 조촐한 비라도 내리면 질퍽한 웅덩이를 피해 낡은 우산을 쓰고 새벽 출근을 하던 또 그 사람들. 그들은 어서 이 골목을 떠나는 것이었다. 달동네는 그들의 꿈이 서리어 있던 우리의 둥지였다. 한때는 그 꿈들이 적으나마 아늑해 보이던 달동네들이 시간이 흐르고 나서 보면 꿈들마저 다 사라진 적막이 되어 있곤 했다. 떠나간 그들은 꿈을 이루었는지, 그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인지. 벽화로 알려진 마을들은 대개 이런 달동네다..

정염의 꽃, 오동도 동백

어느 날 문득 꿈길인 듯 여수 앞바다 오동도가 빨간 꽃잎 터뜨리며 내 폐항으로 달려왔다. 김여정 중에서 허공에서 한 차례, 지상에서 한 차례. 두 삶을 치열하게 살고 가는 꽃. 나무에서의 화려한 생보다는 땅에 떨어진 처연함이 아름다워 보는 사람들에게 애잔한 슬픔을 주는 꽃, 동백. 지금 오동도는 그 슬픔이 절정이다. 새벽기차를 타고 와서 내리니 칠흑같은 밤. 시간이 남아 물소리 철썩대는 방파제를 소요하다 보니 먼바다에 벌겋게 동이 터 온다. 비로소 드러나는 오동도의 실루엣. 간밤에 떨어진 꽃송이들이 고스란히 내 차지가 된다. 인적이 뜸한 이른 시각이니 저렇지 관광객들이 밀려 들어오면 저 꽃송이들은 죄다 밟혀 뭉개져 버릴 것이다. 꽃의 운명이란 게 그런 게지. 너무 예쁘면 생이 평탄하지 않다는 진리. 어떻..

양평 용문사

아주 추운 날 용문사. 용문사의 상징 은행나무. 너무 커서 카메라에 다 안 잡힌다. 오지게도 춥다. 경내에 카페가 있어 코피 생각은 별로 없었지만 따뜻하게 몸 좀 녹이려고 들어갔더니. 안에서 드실 수 없다고 한다. 코로나 확진자가 연일 천 명을 넘기던 최악의 상황이어서 모든 카페가 테이크아웃만 허용되던 날들이었다. 쫓나서 한랭한 정원에 오도카니 서서 후루룩 털어 넣고 그대로 내려왔다. 아, 전염병의 시대여. 이 냉랭한 겨울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다른 계절에는 없는 이 판타지아.

삼다도 통신

꼭 목적지를 정하고 가지는 않습니다. 공항에 내리면서 그때 생각나는 곳이 여행지입니다. 제주는 내게 그런 곳입니다. 제주공항 출구로 나오니 관광홍보판에 노란 유채밭이 있습니다. 그렇지 마침 그 계절이니 저길 가보자. 폰 검색을 하니 산방산 유채꽃이 유명하다고 나옵니다. 유채밭 노랑. 노랑 노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 노랑입니다. 사진이나 TV로 볼 때는 대규모 유채밭으로 보였는데 막상 현지에 가니 그렇지는않네요. 내 유년시절에 시골집에서 누에를 키웠더랬습니다. 누에는 오로지 먹는 것이 생의 전부입니다. 밖의 세상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뽕잎만 깔아주면 잠가 밖으로 나갈 줄을 모릅니다. 유채밭의 관광객들이 흡사 잠가 안의 꼬물거리는 누에들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세상의 것은 관심 밖이고 오직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