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방

미련 곰탱이

설리숲 2016. 7. 21. 01:27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되었다. 시간은 시나브로 흘러가 초목들은 스러지려는 준비들을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앉은 떡갈나무 고사목은 사철 잎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그 영속성이 좋아 늘 거기 올라앉아 시간을 보낸다.

 나는 까마귀다. 오랫동안 숲의 동물들로부터 현자라는 칭송을 들어왔는데 이젠 나도 나이를 먹으니 시력만큼이나 판단력도 흐려지고, 움직이기보다는 떡갈나무 고사목 등걸에 앉아 하루 종일 깨나른히 조는 게 편하니 저 계절처럼 머지않아 내 삶도 끝날 것 같다. 이웃 동무들도 이젠 나한테 지혜를 구하지 않는다. 다만 나이 먹은 늙은이니까 어른으로 대접하는 것이지.

 기력이 쇠한 내게 매일 음식을 가져다주는데, 한편으론 일생 존경을 받던 내가 남의 도움으로 먹고 산다는 게 서글프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이런 그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내가 잘못 살진 않았구나 스스로 대견스럽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도 아직까지는 움직여 기신할 여력이 있으니까 내 먹을 것 정도는 스스로 마련하려 하지. 그게 현자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랬는데 이즈음은 그것마저도 여의치가 않아 오롯이 그들에게 의존하고 있는 처지가 됐다.

 

 

 오늘도 나는 예의 떡갈나무 고사목에 앉아 하루를 보냈다. 며칠을 비가 흩뿌리더니 오늘아침 숲은 온통 안개 세상이었다. 날이 끄무레하니 몸도 개신개신 축 쳐져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냥 떡갈나무 고사목에 시체인 양 얹혀 있었다.

 졸다가는 깨서 개잠을 자고 다시 까무룩 선잠에 들기도 하다가 감은 눈이 환한 것으로 보아 웃날이 들었나 보다고 짐작만 하였다.

 몸은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시장기가 돌았다. 며칠 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연일 비가 오니 찾아와 먹을 것을 주고 가는 동물이 없었다. 이제 나는 잊혀 가는 현자가 되어 버렸다. 맘 같아선 아무것도 먹지 말고 이대로 굶어죽고 싶을 정도로 귀찮았다. 돌아보면 내 평생의 화두는 그것이었던 것 같다. 왜 우리는 하루라도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가. 그것도 다른 생명을 앗아야 내 생명을 유지해야 한다는 진리 때문에 나는 얼마나 많이 고뇌하고 괴로워했는지 모른다. 이 비정한 자연의 먹이사슬을 창조해 내신 절대자 그 누구에 대해 원망도 했다. 해답은 찾지 못했다. 평생의 고뇌와 번민에 대한 대가가 너무 박했다. 아프다. 우리는 여전히, 이 우주와 생명이 지속되는 한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오후도 반나절이 훨씬 지나갔다. 눈을 뜨니 세상이 햇빛으로 가득 차 눈이 부셨다. 먹을 것을 찾아 움직이려고 잠시 몸을 추스르다가 개울 건너 저쪽 기스락 아래 곰 하나가 뒹굴거리며 놀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몸이 늙어 시력이 떨어졌지만 명색 새라서 너무 멀지 않은 것들은 아쉽지 않게 볼 수 있다. 아기 곰이었다. 비난 여름 바람의 능선 너머 용서의 계곡에 사는 곰이 새끼를 낳았다. 그 계곡에 갔다가 배가 바람의 능선만큼 커다란 곰을 보았는데 며칠 후 새끼를 세 마리 낳았다고 내게 놀러왔던 거북이가 소식을 전해 주고 갔다. 그리고 얼마 전엔 여우가 지나가는 길에 들러 이런저런 한담을 나누다가 용서의 계곡 곰이 새끼들이 말썽을 피운다고 하소연하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새끼 중에 드센 녀석이 하나 있어 젖 먹는 시간 외엔 나돌아 다니기를 좋아해서 에미는 늘 걱정거리라고 했다.

 

 뒹굴거리며 놀고 있는 아기 곰이 그 녀석일 거라 짐작하며 역시나 소문 듣던 대로 어지간히 외돌아진 녀석이라는 걸 알았다. 여기서 용서의 계곡은 거리가 제법 되었다. 어린놈이 여기까지 왔을 정도면 과연 천방지축 말썽꾸러기임이 틀림없었다. 오늘도 제 에미는 새끼가 없어져 걱정하고 있을 텐데 녀석은 저리도 천진난만하다. 한편으론 저 녀석은 아마도 자유를 갈망하는 성향의 돌연변이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가족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노닐 수 있는 건 웬만한 모험심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어미 곰한테는 안 된 말이지만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아기 곰이 제법 슬겁고 찐덥게 느껴졌다. 그래 너는 누구보다 슬기롭고 자유로운 생을 살겠구나. 내가 더 살 수만 있다면 녀석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치며 더불어 멋진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텐데 나는 머지않아 생을 하직하게 되니 그게 몹시 서운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흐뭇하게 아기 곰의 노는 양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보다 나는 몹시 배가 고팠다. 이러다 정말 굶어죽고 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생명 가진 것의 부끄러움이여!

 요깃거리를 찾으려고 날개를 움직이려는데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아기 곰이 놀고 있는 왼편 끝에 짐승 하나가 보였다. 퓨마였다. 처음부터 아기 곰을 노리고 있었던 듯 진중하게 낮은 자세를 취하고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몸을 튕겨 달려 나갈 듯 잔뜩 투그린 자세였다. 이 계곡은 개울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산기슭에 이르기까지는 엄청 넓고 평평했다. 군데군데 크고 작은 바윗돌이 산재하고 키 작은 관목들도 있었다. 오랜 시간 폭우가 내리면 이 넓은 지역이 물에 잠기기도 했다. 내가 앉은 이편의 떡갈나무에서 시야가 탁 트여 있어 개울가의 넓은 전망이 다 보였다. 그러므로 커다란 바위에 몸을 숨기고 노리는 퓨마의 작은 움직임까지도 볼 수 있었다.

 아기 곰의 안위가 위태로웠다. 나는 다급해져 아기 곰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많지는 않지만 며칠 동안 내린 비로 인해 물이 늘었고 물소리가 한층 커져 내가 지르는 소리는 아기 곰에게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날개를 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물을 건너가 아기 곰에게 경고해야 했다. 물을 건너려다 나는 그만 도로 내려와 앉았다. 공중으로 날아오를 때 퓨마가 드디어 아기 곰을 향해 움직이는 걸 보았다. 이미 늦었다. 내가 지금 날아가서 아기 곰에게 도망가라 소리를 친댔자 이미 달리기 시작한 퓨마로부터 안전하게 피신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아기도 곧 동물 특유의 감지능력으로 퓨마의 존재를 인지했지만 짜장 너무 늦었다.

 

 나는 다시 떡갈나무 고사목에 앉았다. 아기 곰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날기도 버거운 이 몸으로 퓨마에게 달려들어 쪼아댄다고 상황을 바꿀 수 있을까. 난 그저 먼발치서 자연의 순리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 고약한 자연의 순리!

 퓨마를 발견한 아기는 놀랐는지 도망갈 생각도 없이 잠시 얼음처럼 멎었다. 그리고 이내 반대편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린 표정이 보였다. 퓨마는 정말 빠른 속도로 아기를 향해 질주했다. 점점 둘의 간격이 좁아지면서 공포에 질린 아기는 걸음마저 허둥거려 자꾸만 넘어져 뒹굴었다. 자유의 영혼을 가진 한 생명이 그 자유를 알기도 전에 빼앗기는 현장을 나는 보고만 있었다. 이 나이까지 살면서 수태 봐 왔던 일이다. 새삼 동정심을 품을 이유는 없었다. 자연의 순리다. 나는 배가 고팠다. 퓨마 녀석이 아기를 갈기갈기 찢어 배를 채우고 나면 낯반대기에 낭자한 피를 혀로 핥으며 사라질 것이다. 늘 그렇듯이 사나운 짐승 놈들은 고기를 모조리 먹어치우진 않는다. 아마 오늘도 퓨마 놈이 가고 나면 내가 며칠 동안 먹을 고기는 충분히 남아 있을 것이었다. 이 빌어먹을 놈의 욕구. 자연의 순리.

 

 내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아기 곰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여차하면 닿을 듯하게 퓨마는 가까워졌고 그제서 아기는 공포에 가득 찬 비명을 질렀다. 어린 녀석이었지만 처절한 소리가 바람의 능선까지 들릴 듯 번져 갔다. 절체절명의 순간이 왔다. 퓨마는 크게 뛰어올라 아기를 덮치려는 순간이었다. 물가 둔치까지 쫓긴 아기는 마침 상류에서 떠내려 오는 썩은 나뭇등걸을 발견하고는 철벅 물속으로 들어가 그 나뭇등걸에 올라앉았다. 아기는 너무 무서워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물살에 휩쓸려 나뭇등걸과 함께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고기를 놓친 퓨마는 그러나 포기 하지 않고 내쳐 하류 쪽으로 내달렸다. 아기보다 빠른 속도로 내려가서는 바위들이 엉기정기 늘어서 있는 곳에 멈춰 섰다. 그곳은 다른 데보다 얕은데다가 돌과 바위들이 두두룩하게 쌓여 있는 여울나들로 가끔 사람이 징검다리 없이 건너가기도 하던 곳이다. 물이 늘었지만 아기 곰만 한 바위들이 엉기정기 물위에 드러나 있어 퓨마는 한결 여유롭게 그곳에 들어서서 아기 곰이 떠내려 오는 걸 이윽히 바라보았다. 당장은 위험을 모면했지만 나뭇등걸에 얹혀 떠내려가면서 아기 곰은 다시 공포를 느꼈다. 퓨마께로 가까워지며 아기는 비명을 질러댔다. 수태 겪어온 일이지만 죽기 전에 터져 나오는 그 비명소리는 너무나도 처참해 그때마다 내 가슴을 무두질하며 내 호흡마저도 가빠지곤 했다.

 

 이윽고 아기가 탄 나뭇등걸이 퓨마가 기다리고 섰던 바위에 부딪고 죽음 앞의 아기는 결사적으로 물로 뛰어들었다. 다행히 여울나들이라 깊지는 않았지만 그건 상관없는 일이었다. 바야흐로 퓨마가 앞발만 뻗으면 아기는 비참하게 생을 끝내는 것이다. 퓨마는 지체없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앞발로 아기를 후려쳤다. 아기는 처참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피가 흘렀다. 그래도 아기는 결사적으로 몸을 뒤틀며 도망가려 했다. 다시 한번 퓨마의 앞발이 허공을 갈랐다.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피가 튀었다. 이미 모든 게 끝나가는 걸 느꼈지만 아기는 본능적으로 몸을 꿈틀거렸다. 아직까지는 살아 있었다. 비명을 질러댔지만 그 소리도 아까보다는 낮아졌다. 얼굴에서 흐른 피가 물에 떨어져 자취 없이 흘러내려갔다. 이제 퓨마가 그 이빨을 들어 물어뜯기만 하면 또 하나의 자연의 순리가 실행되었다. 덩치는 아기가 퓨마보다 더 컸지만 포식자 앞에서 곰은 너무나 나약했다.

 그러나 퓨마는 바로 실행에 옮기지 않고 잠시 아기의 모양을 지켜보았다. 포식자의 악랄한 사디즘이랄까. 아니면 최후의 선한 동정심일까. 그 앞에서 아기는 절망적으로 울부짖었다. 그때였다.

 

 포효소리가 인근 숲을 진동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산만 한 검은 덩어리가 개울가로 구르듯이 달려가는 것이었다. , 곰이었다. 용서의 계곡의 그 곰. 아기의 어미였다. 나도 놀라고 퓨마도 놀라고 최후의 비명을 토해내던 아기도 놀랐다. 어미는 산을 무너뜨리기라도 하려는 듯 엄청난 소리로 포효하며 아기와 퓨마가 있는 물가로 다가갔다. 그 덩치와 분노의 기세로 보아 퓨마는 단 한번의 발길로 몸이 으스러질 운명이었다. 너무 놀라 퓨마는 도망갈 엄두도 못 내고 엉거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어미가 앞발을 들어 퓨마를 향해 갈겼다. 하지만 겁만 주어 쫓아 버리려는 의도여서 허공만 갈랐다. 그 서슬에 퓨마는 몸을 솟구쳐 뒤로 물러났다. 어지간히 겁을 먹었는지 슬금슬금 떨어져 나갔다. 다쳤는지 뒷다리 하나를 절뚝거리며 퓨마가 저만치 멀어지자 그제야 아기가 어미에게로 달려들어 몸을 비벼댔다. 어미는 한번 더 크게 포효하여 퓨마를 윽박지르고 아기의 얼굴과 입가에 흐르는 피를 핥았다. 아기는 좋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생사의 경계선을 넘나든 후 맞은 평화와 행복이었다. 멀리 있는 내겐 보이지 않았지만 아기도 어미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실망했다. 퓨마 놈이 아기 곰을 사냥해 그 고기를 남겨주길 바랐는데 뜻하지 않은 어미의 출현으로 허사가 되었다. 상황이 바뀌어 이번엔 어미가 퓨마를 갈기갈기 도륙을 내 주기를 바랐다. 꼭 그렇게 될 줄 알았다. 나는 너무나도 배가 고팠다. 저 포악한 퓨마 놈의 고기를 먹어야 했다.

 그러나 어미 곰은 아기의 얼굴과 입만 핥을 뿐 슬금슬금 멀어져 가는 퓨마를 더 이상 쳐다보지 않았다. 제 개끼를 해코지한 놈을 아무런 보복도 없이 상처 하나 입히지 않고 고이 돌려보내다니. 혹간 그런 걸 두고 용서와 자비라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그건 단지 미련 곰탱이의 우유부단함에 지나지 않았다.

 어린 곰을 도륙하지 못한 퓨마 놈과 또한 퓨마를 절단 내지 못한 곰탱이에게 분통이 터졌다. 나는 먹을 것이 없어졌다.

 

나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리라는 걸 깨달았다. 오랜 세월 동물들로부터 현자로 존경받아 온 내가 이렇게도 볼품없이 생을 마감한다는 게 서글프고 속상했다. 나는 죽는 순간에도 고상하고 싶었다. 늘 그것을 꿈꾸었다. 하필이면 굶어서 비참하게 비틀어진 시신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퓨마는 몹시 기운이 빠진 듯 비척비척 물이 개개는 둔치를 따라 다리 하나를 절룩거리며 멀어져 갔다. 한참을 물고 빨며 사랑을 나누고는 곰 모자도 천천히 물가를 떠났다. 이제 저 아기 녀석도 함부로 어미 곁을 떠나지는 못하리라. 생래 자유로운 영혼을 지녔지만 이 불의의 사고로 그 영혼이 다시 살아나지는 못 할 것이다. 모든 짐승들의 삶이 그렇다. 느닷없이 만나는 어떤 계기로 인해 그의 운명이 바뀌는 것이다. 우리는 삶을 선택할 능력이 없다. 그저 오늘 먹잇감을 찾아 나서 그것만 취하면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진정 행복한 삶일지도 모른다. 인간들처럼 비현실적이기만 한 목표라는 걸 세워놓고 거기에 도달한답시고 평생 버둥거리며 고생하는 건 참말 어리석다. 그간 내가 이들에게 전해준 지혜라는 것도 실은 별 소용없는 것들이다. 그들은 그 자체로도 행복하다. 나는 지식이 많아 필요 없는 상념들도 많다.

 

 물가를 떠나려던 어미 곰이 고개를 돌렸다. 짐승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비척거리며 둔치를 따라 올라간 퓨마가 물에 휩쓸려 떠내려 오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비명이었다. 절박한 최후의 운명을 예감한 처절한 울부짖음이었다. 버둥거려보지만 한번 물에 휩쓸린 몸은 별수 없다. 어미 곰은 그 모양을 물끄러미 보고 섰고 아기는 행여 떨어질까 어미 가슴 아래 바싹 들러붙어 역시 물끄러미 원수의 모양을 지켜보았다.

 절규하며 떠내려가던 퓨마는 자신이 아기 곰을 겁탈하려 했던 여울나들께 이르러서는 속도가 느려지며 턱, 하고 바위에 부딪쳤다. 정신을 잃었을까. 미동도 없더니 잠시 후 발을 버둥거려 일어나려 애를 썼다. 물은 얕아도 물살은 세어 그대로 놔둔다면 놈 역시 필경 오늘밤을 넘기지 못할 것이었다.

 세상은 무변하여 늘 그대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그 안의 구성원들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 움직임들이 이 자연과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또 죽어 사라져 토양이 된다. 오늘만 해도 이 개울가에서는 생사를 가누는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오늘 밤 죽을 것이다. 아기 곰은 죽음을 모면했으며 퓨마는 용서의 힘으로 사지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분명 그의 운명인 듯 다시 그 죽음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운명이라고 해서 반드시 따라야 하는 건 아니어서 구성원간의 교류와 상호관계로 언제든지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던 어미 곰이 어슬렁거리며 퓨마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여울나들로 들어섰다. 아기는 행여 어미와 떨어질까 쪼르르 따라붙다가 퓨마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고는 슬금 멈춰 섰다. 나는 다시 기운을 차렸다. 그럼 그렇지. 어미가 퓨마를 끝장내려 한다고 생각했다. 곰의 행동 여하에 따라 내 목숨과 운명도 달라지는 것이다.

더 이상 떠내려가지는 않았지만 퓨마는 센 물살에 휩쓸린 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버둥거리기만 했다. 다리 하나가 온전하지 못한데다가 몹시 기력이 떨어져 있었다. 어미 곰이 머리를 박고 퓨마를 물속으로부터 밀어내고 있었다. 머리와 앞발로 번갈아가며 버둥거리는 퓨마를 둔치께로 밀어내 놓고 곰 부자는 유유히 산기슭으로 사라졌다. 숲정이에 떨어지던 저녁햇살도 거두어갔다.

 아 나는 어찌 이 욕됨을 견딜까.

 

 땅거미가 지고 사위가 어두워졌다. 초저녁달이 물웅덩이에 비치고도 오랜 시간을 나는 내내 떡갈나무 고사목에 앉아 있었다. 몸도 까라졌지만 그것 아니라도 감히 움직일 엄두도 염치도 없었다.

 나는 현자다. 아니 현자였다. 아니다. 현자인 척 했다. 평생을 세 치 혀로만 살아 왔다. 내 삶은 그 세 치만큼의 가치도 없는 삶이었다. 스스로 부끄러운 염치조차도 사치다. 그 아기를, 슬겁고 싱그런 그 아기 곰을 먹겠다고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퓨마고기를 먹겠다고 그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고 곰을 비난했다. 사랑하는 새끼를 겁탈한 퓨마를 그 어미는 용서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나는 얼마나 더러운 늙은인가. 기껏해야 멀떠구니 하나도 채우지 못할 양의 고기에 대한 탐욕도 다스리지 못한, 오히려 자기합리화하는 속물근성이라니.

 돌아보면 이 자연의 구성원들은 죄다 나보다 슬기롭고 현명하고 고상하다. 그들에게 나는 얼마나 부끄러운 세 치 혀를 놀렸던가. 가식의 가면을 쓰고 그들 위에 군림하며 실제로는 각다귀처럼 빌붙어 살았다. 기껏해야 저 나뭇잎이 누렇게 물들 때 까지도 살지 못할 비렁뱅이 늙은이가 탐한 소량의 고기. 나는 추하고 저급한 위선자였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한 밤이 지났다. 온갖 생명의 기상과 함께 숲이 싱그럽게 깨어났다.

 개울가 서덜에 넓적한 바위 하나가 있다. 바위에는 온몸의 털이 다 뽑힌 까마귀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이곳저곳 부리에 쪼인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 나왔고 그 피마저도 검게 말라붙었다. 사체는 너무나도 작고 볼품없었다. 평생을 현자로 존경받은 자의 육체는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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