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의 일이다.
강원도의 한 촌락에서 이상한 여자를 접해 알게 되었는데 그 인연은 자꾸 곱씹어도 치욕적인 흉터로 남아 지금도 등이 스멀거린다.
나는 한때 꽤나 촉망받던 소설가였지만 어느 순간 글에 대한 회의가 들어 머리를 싸매고 번민하던 끝에 절필을 하기로 큰 용단을 내렸다. 호기 있게 ‘용단’이라 하였지만 내심은 꼭 그런 것도 아니어서 비록 지금은 펜을 놓지만 언젠가는 다시 글을 쓰게 될 날이 있으리라는, ‘막연한 유보’라 하는 게 정확했다. 글이란 게 쓰는 사람은 몸의 진을 다 소비하지만 막상 그 글이 읽는 사람들에게 그만큼의 즐거움을 주는가 하면 절대 아니었다. 남들은 고상하고 낭만적인 직업이라 할지 모르지만 글쓰기는 진짜 노동 중의 상노동이다.
먼 후일, 몸의 기력이 쇠해 육신노동을 못하게 되어 살이가 궁핍해지면 그땐 다시 펜을 들어 알량한 글로 호구지책으로 삼아야 할 것이로되 그건 최악의 상황일 때이고 다시 펜을 들 일이 없는 게 바람이었다. 그동안 벌어 놓은 돈도 조금은 있으니 허투루 안 쓰고 절약한다면 환갑 때까지는 그럭저럭 살 수 있으리라.
그렇게 먼 미래를 작정해 놓고 나서 행장을 차려 여기저기 다녔다. 그간 이름만 듣고는 가봐야지 하고는 생각만으로 그쳤던 이름난 관광지나 여행지였다. 남들은 주말이면 너무나도 가볍게 돌아다녀서 흥미조차 없어진 그런 곳들을 나는 그제야 유치원 꼬마처럼 들떠서 다닌 것이다.
그러다가 외진 산촌에서 저녁을 만나 꼼짝없이 밤을 헤매야 하는 난감한 처지가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강원도 어느 높은 준령 고갯마루 근처였다. 이미 6월이라 해가 떨어져도 냉기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갈 곳을 몰라 아스팔트길을 터벅거리고 걷는데 뒤에서 불빛이 따라왔다. 외진 곳에서 만나는 것 가운데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데 사람의 랜턴불빛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닥 무섭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곳에서 나처럼 밤을 맞닥뜨린 동병상린이 있다는 것이 더 반가웠다.
그는 외국인이었다. 벨라루스 사람이라고 했다. 투박하지만 한국말도 잘했다. 간단하게 통성명하여 알렉스라는 그의 이름을 얻어내고 이런저런 수어하다가 자기가 잘 아는 집이 있는데 거길 가면 재워줄 거라고 나더러 같이 가자고 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잠자는 것도 궁박했지만 그것보다는 나는 이미 새장에서 나온 야생 날짐승이 되기를 마음먹은지라 그 어떤 곳도 가보고 싶고 잠도 자 보고 싶었다. 더구나 외국인과의 동행은 왠지 더 기분이 끌렸다. 흔한 일본이나 중국, 미국사람도 아니고 가끔 해외토픽에서 듣던 생경한 벨라루스라니. 한국 땅에서 한국인이 벨라루스인의 신세를 지는 상황도 얼마나 멋진 일인가. 언뜻언뜻 랜턴의 불빛으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싱싱함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건장한 모습이었다. 여름인데도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인해 아주 낭만적인 풍모도 느껴졌다.
그 마을은 의외로 지척이었다. 내가 오르던 고갯길을 올라 꼴깍, 영마루를 넘어 30여분 내려가니 곳곳에 불빛이 산재해 있었다. 그리고 그가 데려간 집에서 나는 그 여자를 만났고 지금 그 이야기를 쓰려 한다.
본 내용의 분량에 비해 서론이 너무 길었다. ‘그 여자 이야기’라 하니까 어떤 작가든 걸핏하면 우려먹는 낯선 여자를 만나 그렇고 그런 썸씽을 맺는 달달한 연애이야기로 추측할 테지만 서두에 쓴 바처럼 절대 달콤한 남녀 이야기가 아니다. 그 여자는 나보다 열 하고도 여섯 살이나 많은 여자이니 보편적인 ‘여자’라기 보다 30대 후반인 내게는 아줌마, 혹은 사모님이었다. 실제로 나는 사모님이라 불렀고 그녀는 그 집 안주인이었다.
그 집에는 객식구가 많았다. 스무 명에서 서른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이 방 저 방 별채, 지하까지 들어 있었다. 그 주인은 인력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인근에는 온통 산을 깎아 만든 드넓은 토지에 각종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따라서 봄부터 가을까지 일손이 많이 필요했다. 주인인 엄 사장은 사람을 모집해 자신의 집에서 기식을 해주면서 농가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을 파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벌이가 제법 쏠쏠해서 근동에서 소리 없는 재력가로 평판이 나 있었다. 인력들은 어중이떠중이 전국 팔도에서 다 모여들었다. 일이 힘들다고 하루 만에 가는 사람도 있고 저녁에 술 한 잔 걸치고 시비를 붙다가 주먹다툼을 하고는 그 길로 짐 싸서 떠나는 사람도 있고 말 그대로 인간시장이었다. 사회의 밑바닥 따라지들이라 배운 것도 없고 배웠더라도 배운 티가 전혀 안 나는 하루살이 인생들의 집합소였다. 힘들게 하루 일한 삯을 그날 술로 소비하는 사내들의 수용소였다. 엄 사장은 사실 노숙자에게 숙식을 주는 사회복지가라 해도 무방했다. 물론 그들로 인해 많은 수익을 올리는 장사꾼이긴 했지만 그는 보통사람들이 그러듯 그 사람들을 천대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늘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려고 애썼다. 그러므로 하루 만에 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같이 지내면서 엄 사장의 그런 인간미에 사람들은 조금씩 자신의 자존감이 되살아나기도 했다. 물론 일부의 이야기고 태반은 끝까지 개차반으로 지내다 갔다. 저녁에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사내들의 몰골은 땀에다가 옷은 흙투배기였고 몸에서는 땀냄새 농약냄새가 폴폴 풍겨서 일 하려고 왔던 사람이 그 꼴을 보고는 못 하겠다고 선걸음으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알렉스는 그 전 해에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가 달포 남짓 그 집에서 일을 했었다. 달포동안 받은 품삯이 꽤 돈이 되어서 본국의 집으로 송금했다고 하는데 그 액수는 벨라루스에서 보통 노동자 일년 연봉에 값한다고 했다.
주인 내외는 물론 일 년 만에 다시 보는 알렉스를 뛸 듯이 반겼으며 극진한 대접을 받고 이튿날 아침 그는 어디론가 떠났다. 그런 인연으로 해서 이반엔 내가 그 집에 눌러앉아 여느 객식구들과 똑같이 낮에 농가에 팔려나가 일을 하고 품삯을 받는 하류층 노동자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엄 사장에게 편애를 받았다. 처음에는 내 허우대가 허약해 보이고 일이 몸에 배지 않은 어설픈 도시사람 같은 이미지여서 힘들지 않은 일을 골라서 내보냈다. 그런데 내가 겉보기 다르게 힘든 일도 곧잘 견뎌내고 성실하게 하는 걸 보고는 내게 큰 호감을 가졌다. 내가 가끔은 아는 소리도 하고 어쩌다가는 입바른 소리도 하자 그는 다른 객식구들과는 좀 격이 다른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편애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약해 보여서 쉬운 일을 골라 내보냈지만 그제는 격이 다른 사람이라 편한 일을 주었던 것이다. 나이가 있는 사람에게는 김 씨 이 씨 정 씨라 호칭하고 젊은 사람은 아무개야 하고 이름을 불렀지만 나만은 홍림 씨라고 호칭했으며 또 내게만 유일하게 반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핏 눈치가 다른 사람보다 나는 일당이 만 원 더 많이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숙소도 가장 좋은 방으로 배정해 주었으며 담배 안 피는 나를 배려해 그 방엔 죄다 비흡연자만 배정해 주었다. 그쯤 되니 다른 사람도 나를 좋게 대했다. 체구도 작은 놈이 자신들보다 더 일을 많이 하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하려는 배려심도 있으니 그들 역시 나를 진심어린 마음으로 대해주었다. 엄 사장이 하듯이 나는 누구에게나 웃는 낯으로 그들과 대화했으며 힘들어할 때는 빈말이지만 그들 기분 좋게 하는 말만 하려고 하였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올바른 모범생으로 인식되었다. 새로 온 사람들은 모르고 나를 반장님으로 불렀고 나는 짜장 반장처럼 행동했다. 엄연히 반장은 아니지만 엄 사장도 나를 반장에 준하는 위상으로 대했다.
참 신나는 날들이었다. 책상물림으로 세상엔 글 쓰는 일 이외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줄 알았던 내가 강원도 산촌에서의 그 하류 생활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남들은 힘겨워하는 일들이 나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나의 또 다른 재능을 발견한 보석 같은 나날들이었다. 이런 경우를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고 해도 될까.
따라서 그 여자, 즉 엄 사장의 부인도 역시 나를 미쁘게 보고는 다른 사람들과의 응대와는 달리 지지한 이야기들을 나와 나누었다. 엄 사장이 없을 때 방안의 전구를 교체한다든지 저녁에 면소재지 나가서 부식거리라도 사올 일이 있으면 자동차 키를 내어주며 동행을 요구하곤 했다. 누가 보면 나는 엄 사장의 들때밑이요, 그 여자의 개인비서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다른 사람은 당일치기 품삯을 받았지만 나는 일주일 단위 주급을 받았다. 일요일 저녁 그 여자가 방으로 불렀다. 다른 때와 달리 그날 저녁은 엄 사장은 없고 그 여자 혼자였다. 수고하셨어요, 삼촌. 그녀가 봉투를 내밀면서 웃었다. 호칭도 처음엔 인천아저씨였다가 어느 때부터 삼촌이라 불렀다. 봉투를 받고 일어서려는데 잠깐만, 하더니 경대 위에 있던 병을 집어 들었다. 와인이었다. 이거 한 잔 하세요. 미리 준비해 뒀던 듯 크리스털 잔에 포도주를 따라 주었다. 평시 스스럼없었지만 단둘이 와인 잔을 놓고 독대한 상황은 어쩐지 민망하였다. 삼촌 작가예요? 불편한 심정으로 어쨌든 와인을 홀짝거리고 앉았는데 그 여자가 물었다. 내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게 그리 놀라울 건 없었다. 내가 일부러 숨기려 한 것도 아니고 내 정체가 탄로 났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 여자가 신문지 한 장을 펼쳐 보였는데 내가 전에 어느 신문사와 인터뷰를 한 기사와 함께 대문짝만한 사진이 실린 신문이었다. 그냥 예전에 잠깐 쓰다가 말았어요. 지금은 안 씁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둘러댔고 그 여자는 그럼 그렇지 하는 득의양양한 표정이었다.
“우리 집에 오는 인간들은 다 막장인생 같은 놈팽이들이라 같이 상종할 수가 없어요. 남편이 워낙 귀히 여기고 살뜰하게 하니까 나는 티를 안내는 거지. 물론 그 사람들이 우리 일을 해주어서 우리도 먹고 살죠. 따지면 고마운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들 하는 짓거리들 보면 정나미가 떨어진다니까. 삼촌 이해해 주셔야 해요, 사람이 좋고 나쁜 건 누가 뭐라 할 수 없잖아요. 그래도 나는 겉으로는 한번도 무시하거나 천대하는 내색을 안했어요. 앞으로도 그럴거구.
근데 삼촌은 첨부터 그 사람들 하고는 달라 보였어요. 그날 밤에 알렉스 - 그 소련 사람말이예요 - 랑 같이 왔었다는 것부터 막장인생은 아니라는 걸 알아봤죠. 역시 그랬구나.”
그로 인해 알렉스가 이 부부에게 각별한 사람이었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내일 저랑 시내 갔다 옵시다. 병원도 가야하고 장을 봐야 하는데……”
시내란 한 시간 거리의 인근 H시였다. 그 여자는 운전을 못하기 때문에 앞에서 썼듯이 나를 운전기사로 대동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렇담 나는 다음날 농가 일을 안 나가도 되었다. 일은 잘했지만 그렇더라도 일하는 것보단 쉬는 게 좋았다.
그 즈음 엄 사장은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다. 인력들은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도 많았기에 외국인들을 고용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골칫거리인 불법체류자 문제였다. 인근의 어느 누가 찔렀는지 모르지만 엄 사장은 그 일로 경찰서와 법원을 출입하고 있었다. 그것 아니더라도 엄 사장은 시나브로 근동에 저명인사로 부각되고 있는 터여서 그를 알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짐에 따라 외출하는 날이 더러더러 있었다.
엄 사장이 없는 때에는 그 여자가 농가 일을 분배했다. 따라서 나는 그 여자의 직권으로 일을 면제받은 것이다.
병원을 가고 장을 본다던 그 여자는 그 두 가지 모두 하지 않았다. 대신 강원도 경계를 넘어 경상북도 어디쯤으로 이끌었고 절경이라는 계곡을 들어가고 삼화사라는 절 구경도 하고, 나와서는 계곡 입구 커피점에서 커피를 마셨다. 나는 충실한 운전기사 노릇을 하며 그 여자가 먹여주는 대로 밥을 먹고 커피를 먹고 한복집에 들러 그 여자가 사준 코발트색 고급 스카프를 목에 둘렀다. 그리고 저녁이 되기 전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인력들 품삯도 결제해야 되고 내일 농가의 일도 분배를 해야 했다.
잠자리에 눕자 오만가지 상념이 머릿속을 드나들었다. 이 여편네가 나를 진짜 몸종으로 부려먹는구나. 그러면서도 내게 전해지는 그 여자의 온기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도 이상하였다. 코발트색 스카프.
이것도 쓰잘데기없이 길어졌다. 내가 그 여자와 어떻게 관계가 맺어졌는지 그 시작을 이야기하려니 지루한 잡설이 필요했다.
이야기를 빨리 진행시켜 본론을 말하자면 나는 그 여자와 관계를 했다. 정확하게는 속된 말로 따먹혔다.
그 여자는 조금씩 나를 자신의 새장 속으로 유인했고 나는 바보같이 그 추이와 낌새를 느끼지 못한 채 어어 하다 어느 날 보니 그 여자의 새장 속에 들어가 있었다.
야생의 날짐승이 되고자 새장을 나온 나는 너무도 안일해졌고 스스로 그것을 느끼지 못할 만큼 길들어 있었다.
그 여자의 농간대로 나는 걸핏하면 농가 일을 쉬었고 그 여자와 단둘이 집안에 있는 날이 많았다. 그런 날 나는 그 여자의 수컷이 되었다. 미친 짓이었다. 이성은 시퍼렇게 살아 펄떡대고 있어도 그 이성이 무뎌지게 하는 기술이 그 여자에게는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은가. 그 여자는 나보다 열여섯 살이나 많고 삼십대 후반인 내게 아줌마 혹은 사모님이지 여자라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랬지만 나는 속절없이 그 여자의 수컷이 되었고 몹시 당황스러운 건 오십대의 그 여자의 몸에서 여자를 느끼곤 했다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끼면서도 그 집을 떠나지 않고 더 머물렀다는 건 내게도 일말의 감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도 애써 부정하는 건 그 여자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애정 비스름한 감정은 없었다는 것이다. 단지 나는 수컷이었을 뿐이다. 사내들만 20~30명 득시글대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이성이라곤 그 여자 하나뿐이었으니 애정이고 뭐고 성적인 궁박은 남자로서 궁색하나마 변명거리가 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도저히 변명조차 할 수 없는 것은 화대를 받았다는 것이다. 농가 일을 안 나갔음에도 그날 일당을 오롯이 받았으며, 그 여자는 대가로 돈을 더 얹어 봉투에 넣어 주었다. 나는 돈에 궁색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돈이 필요해 성상납을 했다는 비난을 받고 싶지 않다. 그러나 냉정히 거절하지 못한 건 길래 가책을 느꼈으며 일생 가장 치욕적이고 굴욕적인 일이었다. 나는 사회적으로 매장되어도 싼 저주스런 놈이다.
그 여자와의 은밀한 사생활은 그러나 은밀할 수는 없었다. 집안에 사람들이 그리 많은데 그들은 하류층 노동자지 바보는 아닐 터, 눈치만 봐도 느낌 같은 거야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어느 입에서도 그런 말이 나오지는 않으니 여전히 일상은 전과 다름없었다.
일꾼 중에 성훈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나보다 두 달 먼저 그 집에 왔다는 사람이었다. 나보다 대여섯 살 위, 키가 크고 환속한 중처럼 짧은 머리에 인물이 준수했다. 틀거지가 있어 늘 말이 없으면서도 상대방이 함부로 까불지 못하게 하는 위엄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반장 격이었지만 사람들을 점잖게 리드하는 건 성훈이었다. 그의 드레진 행동거지와 합리적이고 사리판단이 명확한 인품에 나는 존경의 호칭으로 그를 선배님이라 불렀다. 그 역시 내게 호감을 보여주었고 다른 사람과는 말을 잘 안 섞으면서도 나와는 친밀하게 가까웠다.
그런 그가 내게 진심으로 충고를 하였다. 하루 빨리 여기를 떠나라고. 나와 그 여자의 관계를 말함이었다. 그의 충고가 아니라도 당연 나는 나의 죄과를 알고 있었다. 그가 진정으로 날 위해 하는 말이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나는 당시의 생활에 너무 길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새로운 생활이 주는 낯선 즐거움에 이성이 무디어져 있었다. 앞날을 보려는 혜안은 흐릿해지고 그저 하루하루의 생에 빠져 있었다. 야생의 날짐승이 되고자 새장을 나온 나는 너무도 안일해졌고 스스로 그것을 느끼지 못할 만큼 길들여져 있었다. 적어도 나를 위해 빨리 떠나라고 한 성훈의 충고를 한번 숙고만이라도 했어야 했다. 그러나 난 그러지 않았다. 내 무뎌진 이성, 흐릿해진 혜안은 무서운 참사를 낳았다.
그 여자와의 관계가 백일하에 드러나고 엄 사장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성을 잃은 엄 사장의 폭행에 나는 몸을 피하거나 방어할 겨를도 없이 고스란히 뭇매를 맞았다. 성훈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반송장이 되어 병원신세를 졌다. 내 죄과와는 상관없이 엄 사장은 폭행죄로 치도곤을 당했어야 하지만 나는 그를 선처해달라고 부탁했다. 치료비도 다 내가 감당했다. 나의 죄는 돌이킬 수 없이 무거운 중죄였다. 간통이 문제가 아니라 엄 사장의 나에 대한 진정한 믿음과 후의를 배신했으니 설사 그가 나를 때려서 죽게 했어도 원망도 하면 안 되었다.
간통죄로 나를 응징하는 일을 엄 사장은 하지 않았다. 나를 위한 일말의 동정이 아니라 엄청난 사건을 맞닥뜨린 그로서는 그런 법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분노를 폭발해 연놈을 두들겨 팼으니 그것으로 응징은 한 거고, 뒷일은 스스로 가정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지근거리에 살던 그의 아들은 눈이 뒤집혀 칼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와 악다구니를 쓰며 난동을 부리다가 창피해 못 살겠다고 연을 끊자고 한 뒤 집을 정리하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엄 사장은 이혼을 했다.
아침안개를 사진 찍으려고 나섰던 것인데 바람대로 안개가 짙어 한 치 앞이 안 보이게 천지는 운무였다. 햇살이 퍼지고도 꽤 오래 지난 후에야 조금씩 안개가 사라지며 고개 아래로 가득한 산과 안개의 장엄이 내려다 보였다. 비로소 원하는 사진을 몇 커트 담고 차에 올랐다. 그리고 탄성을 내뱉었다. 낯설지 않은 그 길, 그 고갯마루. 5년 전 여름밤 벨라루스인과 함께 넘었던 그 고개가 아닌가.
아련히 저 너머로 사라져 잊고 있었던 벨라루스인, 그 집, 엄 사장, 성훈, 그리고 그 여자. 잊고 있었다는 건 거짓말이다. 거울을 볼 때마다 보이는 얼굴, 그날의 상흔들. 흉터가 보일 때마다 다른 것들은 생각나지 않고 유독 그 여자만 떠오르곤 한다. 어떤 해석을 해얄지 모르겠다.
고개를 넘어 그날밤 벨라루스인과 동행했던 그 길을 따라 내려가니 눈에 익은 그 집이 바로 보였다. 엄 사장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하지만 그를 만날 수는 없었다. 집 앞을 지나가며 살펴보니 예전의 정경 그대로다. 마당에 약차가 한 대 서 있고, 구석구석 일꾼들이 벗어 놓은 장화와 장갑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거나 처박혀 있고 옥상엔 빨래들이 바람에 건들거렸다. 엄 사장은 여전히 그 일을 하고 있구나. 내 처지를 잠시 잊고 들어가 오랜만의 안부인사를 나누고픈 생각이 이는 것을 간신히 억제하였다. 그냥 내처 가던 길을 차를 몰아 달렸다. 그러나 이건 또 무슨 조화인지 뒤가 자꾸 당기는 것을 어찌하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와 그 집 마당에 차를 세웠다. 다시 죽도록 매를 맞아도 억울하진 않았다. 아니 차라리 그래야 더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하고 두어 번 부르니 문 여는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사람이 나오는데 혼절할 만큼 놀랐다. 그 여자였다. 그럼 엄 사장은 어디로 갔나. 또 머릿속이 귀살머리스러웠다. 물론 그 여자는 나보다 더 놀랬다. 잠시 표정이 얼어 있더니 어떻게? 간신히 그 말을 내었다. 나라고 뭐 할 말이 있겠는가. 같이 당황하여 굳어 있을 수밖에. 그러고 있는데 안방 문이 열리며 또 사람이 나왔다. 기함할 일이었다. 예전에 엄 사장이 나오던 그 방에서 나온 건 성훈이었다. 키가 크고 짧은 머리 여전히 똑같은 모습의 성훈. 그가 그 방에서 나왔다. 나는 참말 정신이 혼미해졌다. 성훈 선배가…… 세 사람 모두 불의에 맞닥뜨린 어색한 광경이었다.
황망한 지경인데도 그의 목에 두른 코발트색 스카프만은 선명하게 보였다. 아, 저 스카프! 신기한 것은 그 순간 그날 밤 고갯길을 같이 넘던 벨라루스인의 목에 둘러진 스카프가 떠오른 것이다.
알렉스의 스카프도 코발트색이었나. 그 집을 떠나 최대로 빠른 속도로 질주해면서 내 머릿속을 감도는 건 생뚱하게도 벨라루스인의 스카프 색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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