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방

우리 종수

설리숲 2014. 2. 7. 07:53

 

 양로원에 계시던 큰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장례를 보고 온 어머니가 영 기분이 없어 하면서 아랫목에 누워서는 연해 한숨을 내쉬었다.
 "흐유, 그렇게 허무한 게 사람 한살이지 뭐, 흐이구!"
 내게 큰어머니는 딱 한 가지 모습으로만 남아 있었다. 내가 열한 살이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마을 어귀 개천에 새로 놓은 시멘트 다리에 큰어머니가 서 계셨다. 봄이었지만 때늦은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법수를 잡고 서 계시던 큰어머니가 나를 보시자 종깃종깃 입술을 여짓거리셨다. 그 입술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아부지가 돌아가셨어"
 날리는 눈송이만큼이나 차가운 음성이었다. 나는 큰어머니의 평소와 그 다른 모습에 더 신경을 빼앗겨 멀뚱하게 쳐다만 볼 뿐 정작 당신의 그 말은 흘러 듣고 말았다.
 "어여 가자, 아부지가 기다리시겠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내게 등을 보이시면서 시멘트 다리를 건너셨다. 그날 아침에 아버지는 지병인 고혈압으로 쓰러져서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오랫동안 있고 있었던 큰어머니를 부고를 접하고서야 비로소 떠올린 것이다. 그것도 그 날 눈 내리는 다리에서 눈발 너머로 보이는 그 눈선 모습이 전부인 분을 말이다.
 그 분은 내가 생각해도 참 여한이 많은 생을 보내셨다. 남의 후처로 들어와서 남편을 얼마 안가 여의고, 병든 전처 자식을 수발했으며 그 며느리한테는 갖은 업시름과 구박을 받았으며 종국에는 양로원에서 쓸쓸하게 돌아가셨다.


   

  큰어머니가 시집오실 무렵에 나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재취자리라 이렇다 할 잔치도 없었고, 가마도 못 탄 채 이십 리가 여린 올미골에서 그 아버지를 후행 삼아 걸어왔다고 한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그 어비딸이 대문을 들어설 때는 집안에 있던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했다고 한다. 물론 원삼 족두리가 아닌, 다홍 옥양목 치마에 초록 회장을 박은 연두빛 화문항라 저고리를 걸쳤고, 코 부분에 남색을 찍은 하얀 고무신, 머리는 반반히 빗어 넘겨 쪽을 지은 그야말로 새색시라고 하기엔 뭣한 맨드리였다. 더군다나 밤나무 잎도 다 떨어져 내린 늦은 가을의 쌀쌀한 날씨라 쌍그런 옷차림이 더욱 을씨년스럽게 보였는데, 새색시의 미목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더란다.
 자그마한 체구에 새초롬한 눈매, 게다가 나이 서른 다섯이 의심스럽게 피부는 또 어찌 그리 야들하고 고운지 구메혼인이라 몇 안 되는 곁쪽들이 팔밀이도 깜박 잊고 넋이 나갔었다고 한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양로원에 가시기 전만 해도 춘추가 일흔이 넘으셨는데도 미목이 끼끗하고 조살하셨던 것으로 보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처녀의 몸으로 우리 김 씨 집안 종손인 큰아버지의 후취로 들어온 큰어머니의 신산한 한살이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때 사촌형은 장가를 들어 이미 며느리가 들어와 있었다.  집은 덩그러니 넓은데 가솔은 큰아버지 내외와 사촌형 내외 이렇게 넷 뿐이었다. 그래서 큰어머니의 안일은 별로 없었고 넓은 집 안팎을 청소하는 게 그 중 일이라면 일이었다.
 사촌 진서 형은 어릴 때부터 심장병을 앓았다. 늘상 방안에만 들어앉아 있어서 이웃들도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이 몇 되지 않았다. 학교를 안 다녀 큰아버지가 깊지 않은 학문으로 한글과 간단한 한자를 가르쳤다.
  약을 달이느라 집안은 늘 한약냄새로 가득했다. 사실 이웃 사람들은 그 집을 약간은 꺼리고 있었다. 집채만 더넘스레 큰데 집안은 조용하여 휘휘한데다가 구들더께를 모셔두고 사철 한약냄새를 풍겨대니 그럴 만도 했다.
 이 형의 배냇병이 큰어머니로 하여금 신산한 생을 살게 만들었다.
 여느 아이들처럼 기고 걷고 할 때까지는 형이 그런 아이인 줄은 몰랐다. 발육도 눈에 띠게 늦되거나 하지도 않았다. 다만 걸어도 오래 걷지 못하고 주저앉는 것이 의아하긴 했지만 대수로운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것이 대여섯 살이 되어도 나아지지 않으므로 더럭 의심이 갔고 그 의심은 불안으로 바뀌어 집안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종숙은 진서 형만 하나 달랑 놓고 더 이상은 생산이 없었다. 씨가 귀한 집안이었다. 내 증조부도 독자였고, 조부도 독자였다. 그나마 조부가 아들을 둘 생산해 내서 내림이 끝나나 보다 하고 잠깐 안도하긴 했지만 역시 씨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내 아버지도 나 하나만을 놓고 가셨으니. 아예 여자는 나오지도 않았다. 그러니 진서 형에 대한 불안과 집착은  당연할 테고, 그러나 아이는 그예 숨을 걀강거리며 주저앉기를 잘했고 그럴 때는 비지껍질이 새파래지며 깨옥깨옥 헛구역질을 해댔다. 가까운 읍으로 나가 의원에게 보였으나 배젊은 의원은 회목을 잡고 앉아서는 연신 고개만 주억거리며 집증(執症)이 안된다고 중중거렸다.
 그래서 데리고 간 곳이 양의병원이었는데 거기서 나온 진단이 심장병이라는 것이었다.
 한해를 넘게 진서 형은 병원에 누워 있었지만 조금도 낫지 않았다. 점점 좋아지고 있다며 번주그레하게 생청붙이는 양의(洋醫)를 뒤로하고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스물 여섯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진서 형은 금대올 밖으로는 한번도 나가 보지 못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이었으니 나는 형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이미 진서 형의 장래를 포기한 종숙(從叔) 내외는 부랴부랴 아들의 혼인을 서둘렀다. 삼대독자의 씨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인근에서는 딸을 주려는 이가 없겠기에 아예 먼 고장으로 손을 놓아 보냈다.
 그러나 그것도 간대로 되지 않아 속을 끓이던 중 한해를 넘기어 드디어 짝을 찾게 되었으니 그래서 들어온 이가 지금의 종수(從嫂)였다. 종수는 아주 외진 궁촌에서 자란 화전민의 딸로 원체 가난한 살림에 입 하나 더는 것도 크나큰 효도라 여기어 두말없이 그 손을 따라 금대올 우리 큰댁으로 시집을 왔다. 그 때 진서 형의 나이 열 여덟에 종수는 스물 하나였다.
 종수는 무던한 여자였다. 나이 어린 병추기 신랑을 지심껏 고수련하는데 한번도 자신의 척박한 정지를 겉에 드러내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큰댁의 남자들은 여복이 있었다. 종숙모가 돌아가신 지 이태도 안되어 훨씬 나이 어린 여자를 후처로 들인 큰아버지나, 이미 죽음을 저만치 앞둔 속절없는 진서 형이 순되기 짝없는 종수를 아내로 맞은 것을 보면 그렇다.
 진서 형 내외는 금실지락이 제법 도타웠다. 자신의 운명을 내다보고 이미 거기에 천사슬로 순응하고 있었음인지 진서 형은 나이보다 숙성해 있었다. 오래 병석에 있으면서도 삶에 대해, 또 세상에 대해 원망이나 두려움 따위를 갖지 않았다. 하긴 담 너머 또 다른 세상을 알지 못했으니 어쩌면 자신이 들어 있는 고작 세 평 남짓한 세계가 전부인 걸로 알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나이보다 슬거운 남편에게 종수는 처음의 서름하고 어색했던 것이 시나브로 못 견디게 그가 좋고 미더웠다.
 진서 형의 병은 심장병 중에서도 협심증이었다. 무엇보다도 안정이 최상이었다. 당연히 동침은 금물이었다. 그러나 며느리를 들인 게 순전히 씨를 받기 위한 것이니 만큼 동침은 피할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종수가 시집온 그 즈음만 해도 진서 형은 비록 센 얼굴과 껑더리된  몸피로 하여 보기 좋은 매골은 아니었어도 아직은 고황이 깊숙이 들진 않았는지 혼인 첫날밤을 거뜬하게 치러내 종숙을 기쁘게 했을 뿐 아니라 그 뒤로도 더러 그것을 하곤 했다.
일구월심 지극정성으로 비손하며 종수에게는 당귀와 작약을 상시 달여 먹였으며 집안은 진서 형과 종수의 약냄새가 버무려져 정신이 어리뜩해질 정도였다.
 지성감천이었던지 아니면 원래 제출물이었는지 종수는 해포 뒤 태기를 보았고 이듬해 종질을 낳았다. 종숙모는 그러나 고대하던 손자를 보지 못하고 그 안달에 이질이 들어 흰 곱똥을 흘리고 피 섞인 설사를 하더니 맹춘 어느 추운 밤에 그대로 세상을 마감하였다.
 종숙모가 돌아가자 진서 형이 그 충격을 못 이기고 까무러쳤다. 전에도 이따금 가슴을 쥐어뜯으며 고로롱거릴 때가 있었으나 그제는 기색이 극에 차올라 거의 죽음 직전에 다가갔다. 겨우 줄초상을 면하고 차차 호흡이 돌아오긴 했지만 진서 형은 더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이 고황이 골수에 스며들었다.
 그런 경황에 새 종손이 나왔으니 기쁨이고 뭐고 집안은 귀살쩍기만 했다. 그래도 종질은 천진하게 젖을 찾아 어미 품으로 파고들며 홀로 오롯했다.

  그 이태 뒤 올미골에서 연을 못 만나 노처녀로 늙어 가던 큰어머니가 종숙의 후취로 들어왔다. 당신이 아버지를 후행으로 모시고 시집오시던 풍경은 앞에서 보았거니와 그런 미인의 일생은 전혀 딴판이었으니, 그런 뒤숭숭하고 휘휘한 분위기로 가득 찬 집으로 들어오신 것은 이미 그 분의 시드러운 한살이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고부간의 사이는 무던했다. 집안 분위기가 무거우니 서로들 언행이 조심스러웠고, 갈등이 일어날 빌미가 거의 없었다. 큰어머니는 집안을 건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 단가살림이었지만 평생 데림추로 살아온 큰아버지를 대신하여 안살림 바깥살림을 도맡아 점차 집안의 기틀을 손에 잡아 나가셨다.
 또한 지심껏 전처 아들인 진서 형의 약시중을 하셨으며 남편 고수련에 고달파 하는 며느리의 등을 토닥이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고맙네. 이렇게 자네 정성이 지극한데 칠성님이 어째 모른 척 하시겠어? 진서는 꼭 일어날 걸 뭐. 인제 알콩달콩 재밌게 살 날이 오겠지"
 "털고 일어나는 건 바라지도 않아유. 저냥 저대루라두 오래 있었으믄 좋겠에유"
사실 진서 형의 앞일은 눈에 보였다. 그럼에도 애써 그런  알심을 주고 받으며 고부는 서로의 마음을 만져 주려고 했다.

  진서 형의 병세는 조금씩 조금씩 눈에 보이지 않게 죽음을 향해 다가갔다. 그래도 형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큰 충격이 없어도 발작이 찾아왔다. 처음엔 가슴이 답답하고 숨쉬기가 어려운 고통이었으나 세월이 흐르고 병세가 깊어 갈수록 고통은 더끔더끔 더해져 칼로 오려 내듯 아픈 가슴을 부여안고 뒹구는 때가 많아졌다. 그럴 때 종수는 차마 보질 못하고 왼고개를 틀고 앉아 끄윽끄윽 울음을 참으며 남편보다 더 고통스러워 했다. 겨우 눈을 뜬 종질은 영문도 모르고 악악 울어 제꼈다.
 그 즈음 진서 형의 약시시는 큰어머니가 도맡아 하셨다. 용하다는 의원을 듣보아 괄려탕을 지어와서는 날마다 부엌 뒤뜰에 나가 탕약을 달이셨고, 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가 반하탕이니 시호모려탕이니 하는 따위의 약을 사가지고 오셨다. 엔간하면 탕액 짜는 것까지는 당신이 하시더라도, 종수가 있으니 약시중은 며느리더러 하게 하셨으면 좋을걸 큰어머니는 손수 약사발을 쟁반에 받쳐들고 들어가시곤 했다.  또 달개비를 뜯어오라고 며느리를 내보내고는 당신은 종다래끼를 들고 산으로 가 솔잎을 훑어오셨다. 그리고는 그것을 즙을 내어 참기름을 섞어 아침에는 달개비즙을, 저녁에는 솔입즙을 꼬박 환자에게 먹이셨다.
 종수는 직수굿하게 시어머니를 좇았다. 하루는 진서 형이 또 심한 발작을 해 수건을 적셔 가슴을 문지른다 시아버지가 가르쳐 준대로 왼손바닥 한가운데를 꾹꾹 눌러 혈점을 압박한다 하면서 종일을 곁에 붙어 있었다. 그런데 큰어머니가 벌컥 방문을 열고는 냉기 서린 눈으로 종수를 쏘셨다.
 "아 서방 죽일라구 그란! 어여 나가 뜯어 오라믄"
 종일 발작에 시달려 추레하게 녹장나 겨우 숨만 쉬는 산송장을 놓고 종수는 바구니를 끼고 난들로 나갔다. 그 사이 큰어머니는 두 손끝에 잔뜩 힘을 모으고 진서 형의 가슴을 꾹꾹 눌러대셨다.
 "좀 괜찮지? 이렇게 꾹꾹 누르면 염통이 오므라져서 당분간은 기침은 안 하게 된다는구먼. 어때 좀 시원한가?"
 퀭한 눈을 돌려 진서 형은 겨우 그렇다는 시늉으로 이마를 조악거렸다.
 들에서 돌아온 종수가 방안에서 그러고 있는 어이아들을 멀끄러미 툇돌 밑에서 보고 섰다가 안을 향해 말했다.
 "아이참, 저이는 가슴이 답답한데 왜 가슴을 누르세유? 숨을 쉬게 해 줘야지"
 그러자 힐끔 며느리를 돌아보더니 큰어머니가 힐난조로 대답했다.
 "설마하니 아들을 죽일라구! 밤낮 서방 곁에 붙어 앉아 있어 봐야 뭐 실속이 있어야지. 병자는 정성이 지일인데 제 서방 제가 구완해야지 내가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달개비 뜯어 왔으면 어여 절구에다 찧어"
 큰어머니의 종수에 대한 건강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여름도 다 끝날 무렵 큰어머니가 종수에게 뜬금없는 소리를 하였다.
  "저 사람 병이 저 지경이니 이제 방을 따로 쓰게"
 큰어머니의 말씀은 옳았다. 병자는 무엇보다도 자극이 없어야 했다. 자그마한 감정변화에도 예민하게 반응하여 발작을 부르는 것이 협심증이었다. 더구나 이젠 뼛속까지 스며든 병세는 다른 손쓸 방도가 없었다. 그저 편하게 둬 두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간 진서 형 내외는 가끔 잠자리를 갖곤 했다. 그 눈치는 진즉 알고 있어 큰어머니는 말리려 들었으나 큰아버지가 내버려 두라고 했다. 어서 자손 하나라도 더 봐야겠다는 심사였다. 시한부 아들을 장가들인 것도 그 때문이었으니.
 처음에 큰어머니는 그 말을 일리있다 여기며 따르셨으나 언제부턴가 모르게 며느리에 대한 얌심이 슬그머니 가슴에 스며들기 시작해 당신도 제어할 수 없게 점점 심해지는 것이었다.
 큰어머니의 말씀을 그러나 종수는 흘려버렸다. 설마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려니 했다. 그러나 큰어머니는 날마다 며느리를 들볶아댔다.
  "내가 으붓에미라구 그러는 모양인데 그러지 말아. 저 애는 내 아들이야. 저 사람 저대로 놔두면 죽어, 죽는다구. 아 숨도 못 쉬고 다 죽어가는 애를 가지구 그래 지 욕심 채우자고 밤마다 껴안고 그 매닥질을 쳐 그래?"
 순간 종수의 눈에 불이 일었지만 그건 잠깐이고 수치심에 그만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지더니 뒤란으로 뛰어 돌아가 장독대에 쪼그리고 앉아 비죽비죽 비져 나오는 울음을 꺽꺽 삼켰다.
 아직 나이 스물 넷의 한창이었다. 곱고 미더운 남편으로 인해 사랑땜을 알게 되었다. 그 사랑 영원히 함께 하지 못하는 원통함이 간장을 끊는데, 그래서 그 님이 숨을 쉬는 짧은 세월이나마 그 소중한 사랑을 듬뿍 주고 싶은데. 그런데 별거라니. 너무도 매정한 소리였다.
 애원하고 무릎 끓어 애소도 해 보았지만 큰어머니는 요지부동이었다. 어느 밤, 소리도 못 내고 늘키고 앉아 있는 아내를 깜박 잠에서 깬 진서 형이 쳐다보고는 왜 우느냐고 물었다.
  "당신 자는 얼굴이 너무 이뻐유. 근데, 그 이쁜 당신을 막 자랑하고 싶은데 우리 친정집에도 데리고 가서 엄마 아부지한테 보여드리고 싶은데……" 하다가 다시 말을 바꾸어
 "그렇게 되겠지유? 내보매 당신은 할 수 있으면 다 하는 그런 사람이어유. 일어나야지 맘먹으면 금방 벌떡 일어서 나가는 그런 사람이어유. 그럼 우리 꼭 엄마 아부지 뵈러 가는 거지유 네?"
 진서 형은 그러나 마음이 무거웠다. 애써 자신을 독려하며 위로하려는 것인 줄로만 알고 그런 아내가 더욱 마음에 안 됐어서 짐짓 평온한 음색을 갖추려고 애쓰며 말하였다.
  "슬퍼하지 마. 삶과 죽음은 늘 같이 있는 거야. 이봐. 모든 사물에는 그림자가 있지? 그런데 흐린 날에는 그림자가 없지? 그림자라는 건 빛이 있어야 생기는 거거든. 즉 빛과 그림자는 같이 존재하는 거야. 우리네 삶과 죽음도 그와 한가지야. 결국 죽음이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게 아니라 가장 가까운 조치개라고 할 수 있지 않아? 바늘과 실 마냥"
 그리고는 마른 손을 올려 종수의 손을 잡으려다 말고 이내 자신의 앙가슴에 가져다 올려 놓고는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었다.
 
  각방을 쓰게 된 뒤에도 종수는 낮에는 늘 형의 방에 있었다. 그것까지는 말리지 못하고 큰어머니는 더욱 더 종수를 감시하며 두 사람의 띠앗머리에 관계하셨다.
 종수를 형에게서 떼어놓을 정도로까지 큰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하셨는가는 아무도 얘기하지 못한다. 또한 부부간의 잠자리를 철저히 금지하려는 큰어머니의 행동 역시 잘못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 지금의 내 생각이다. 그 때 진서 형의 병세는 극을 향해 치닫고 있었고, 조금이라도 형의 생명의 연장에 지장을 주는 거라면 당연히 제거하는 게 옳은 것이다.
 훗날 큰어머니가 종수로부터 업시름과 토심을 받으며 뒷방에 내몰려 사실 때, 늘 귀거칠게 들은 소리가 그거였다.
  "아무려믄 내가 더 애끼지 아무려면 재취로 들어온 계모가 더 애낄까? 뭔놈의 늙은이가 등치는 쪼그만 게 고집통이는 시어서 밤낮 저 하자는 대루만 하자구 말이야. 아 멀쩡한 음식두 못 넘기는 사람을 그래. 그 더러운 태는 왜 줏어다 멕여? 그래서 그 잘난 아들 살려냈나? 내가 밤중에 궁금해서 그 방에 건너가서 좀 들여다볼라치면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내달아와서는 되지도 않는 말을 씨부렁거리더니 그래서 아들 오래 살았나? 대답 좀 해봐 이 노친네야!"
 그래도 큰어머니는 평생 자신의 행동을 떳떳하고 찐덥게 여기고 사셨다. 종수가 그렇게 족대기며 포달을 부리면 큰어머니는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리곤 하셨다. 내가 저 미워서 그랬나. 아들 살리자고 그랬지.

  종수의 사설처럼 큰어머니는 종수가 진서 형 가까이 가는 걸 매몰차게 막으셨다. 진서 형이 죽기까지 이악스럽게 감시의 눈을 거두지 않으셨으니 종수의 평생의 한은 그리 맺힌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수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더 낳았다. 어떻게 감시의 눈길을 피해 그랬는가 보다는 이미 죽음이 턱 밑에 다다른 진서 형에게 어찌 그런 능력이 있었는지 그게 희한하고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어쨌든 어지간히도 무던했던 종수의 가슴에 시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곰비임비 덖기 시작했고 진서 형이 죽은 후에는 쌓인 증오가 실타래처럼 풀리기 시작하여 그 한풀이는 평생을 두고 이어졌다.
 진서 형이 죽는 날은 엄청나게 무더운 날이었다.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며칠 전부터 얼굴에 어른거리는 걸 보고 있었기 때문에 종수는 조마조마한 가슴을 두근거리며 이제나저제나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큰어머니도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달걀을 까맣게 볶아 그 가루를 잉어 기름에 타서 먹이던 것을 그만두신 지 오래였다.
 그날 큰어머니는 무슨 낌새를 아셨는지 환자를 보고 나와 댓돌에 내려서는 종수를 보고 말씀하셨다.
  "나오지 말고 있어, 밥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의붓에미보다야 예펜네가 낫겠지 뭐" 그러는 큰어머니의 얼굴은 사위스런 표정으로 어두웠다.
 기식이 엄엄하던 진서 형은 그날 자정을 못 넘기고 숨을 거뒀다. 종수는 숨진 그의 손을 잡고 입을 앙다물었다. 애통했으나 슬픔은 가슴으로 흘러 정작 눈물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착 침잠하여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왁시글덕시글하던 장바닥이 파장(罷場)이 되어 텅 빈 것 같았다. 그네의 눈앞에는 시어머니가 어른거렸다. 다음 장을 기다리는 심정이 되어 입술을 감쳐물었다.


 

  진서 형이 죽고 나서 이태 뒤 종숙마저 돌아가신 후 큰댁의 고부 사이는 왕청되게 달라졌다. 자신이 당했던 냉대를 보복하려 함인지 큰어머니에 대한 종수의 구박과 업시름은 모질게 시작되었다..
 대번 큰어머니는 뒤란 별채로 쫓겨나셨다. 별채에는 종숙이 거처하던 방이 있었는데 그 방에 잇대어 헛청으로 쓰던 까대기에 엉성하게 구들을 놓아 거기에 큰어머니를 모셨다. 말이 모셨지 실은 감금이었다. 물론 집안의 일은 모두 종수가 거머쥐었다.
 커다란 집채에 식구라야 고작 시어머니와 며느리에 애들 셋이 전부였다. 늘 휘휘하고 고적하기만 한 집안에서 큰어머니는 더욱 괴괴한 까대기에 내몰려 거기서 이십 년 이상을 사셨다.
 종수는 하루 두 끼만 드렸다. 음식이 실할 리 없었다. 보리 섞인 조밥 두 주걱에 반찬은 김치에 무장아찌였다. 그나마 큰어머니는 그것마저도 다 잡숫질 못하셨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막힌 당신의 신세였다. 깔깔한 조밥을 입안에 떠 넣지만 그만 목이 콱 막혀 넘길 수가 없었다.
 이른 가을 건들마만 불어도 밤으로는 냉랭한, 허술하기 짝이 없는 방은 기나긴 엄동설한을 나기가 여간 대근한 게 아니었다. 불은 땐 둥 만 둥 미지근하고 외풍은 세어 아침에 일어나보면 사발에 담긴 밤잔물이 꽁꽁 얼어 있었다.
 그럼에도 종수는 이따금 생각난 듯이 뒤채로 가 쓸데없이 장작만 많이 쓴다고 건트집을 잡아 한바탕 상말을 섞어 해대고 왔다.
 뒤채 까대기에서 큰어머니는 그렇게 어둡고 비참한 세월을 보내셨다. 아이들이 제법 할머니를 따랐으나 종수는 일체 아이들이 뒤채로 가는 것을 금했다. 이따금 큰어머니가 밖으로 나와 손주들과 노닥거리는 때가 있으면 차마 떼어놓진 않아도 눈을 한껏 모들뜨고 매몰차게 쏘았다.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 때만 해도 큰어머니는 기껏 사십대 중반이어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독립하셔서 사실 수도 있었다. 물론 수중에 가진 것 없어 맨 몸으로 나가 산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겠지만, 절대 그 분을 욕되게 하는 말은 아니지만 하다못해 어디 남의 후취로라도 들어가시거나, 혹은 어느 집 드난살이를 하시거나 아니면 어디 술집의 찬모라도 되셨다면 괴괴한 까대기 골방에서 받는 그 모진 구박보다야 백번 나았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는 것이다.
 본바탕은 어디 가지 않아 그 많은 날을 시드러운 생활에 대끼면서도 전혀 그런 태가 없고, 시집올 때의 그 곱다랗고 끼끗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계셔서 그것 때문에 더 미움을 받으셨을 정도이니 하는 말이다.
 그건 물론 내 좁은 생각일 뿐이고 그러나 큰어머니로서는 그래도 후처이긴 하지만 엄연한 양반가의 며느리로서의 처신은 잃지 않으려 하셨음이 분명하다. 나중에 양로원의 친한 노인들에 의하면 생전에 늘 하시던 말씀이 "그래도 여한이 없어. 평생 숯가마 하는 아버지 곁에서 시집도 못 가고 끝날 줄 알았는데 그런 양반집을 꿈이나 꿨겠나. 조금 섭섭하다면 내 몸으로 자식 하나 못 낸 게 서운하긴 하다만"
 아이들이 점차 자라면서 재잘거리는 소리 높자 오랫동안 집안을 휘감고 있던 휘휘한 적막감이 비로소 사라지고 그런대로 영이 돌기 시작했다. 할미손자의 사이는 워낙 각별한 것이라 아이들은 종수의 금고를 무시하고 시시때때로 뒤채로 드나들며 재롱을 떨었다. 큰어머니의 유일한 낙이 그것이었다. 종수는 더 이상 아이들을 말릴 재간이 없어 눈을 흘기면서도 그대로 보아 넘겼다.
 종수는 말투도 반말로 하기 예사였다. 분이 나면 욕하는 것도 비루했다. 길카리나 이웃의 누가 놀러 오기라도 하면 에멜무지로 뒷방늙은이를 초들어 망발을 하기 일쑤여서 객은 얼른 눈치를 보아 빠져 나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사설은 대충 이랬다.
 "저놈의 늙은인 생전 가두 늙지두 않아. 뭘 그리 잘 처먹는지 나보다두 얼굴이 팽팽하다니까"
 "으유 지겨워! 비누 한 장 못 대는 늙은이가 뭔놈의 빨래는 그리 많은지 허구헌날 내논다니까 글쎄. 늙은이가 가만히 앉아 주는 밥이나 먹지 어쩜 그리 깨끗한 척 하는지 몰라"
  "내 저 늙은이한테 구박 받은 걸 생각하면 아직두 가슴이 뭉쳐진 게 꽉 막혀 숨을 못 쉬겠어, 숨을"
  "아 글쎄 내가 무슨 철천지 웬수라구 밤잠도 안 자구 지켜 지키길. 밤에 자다가 애들 애비 혹시 물이라도 찾을까 그 방으로 건너가다가 보면 저 늙은이가 문틈으로 내다보고 있는 거야. 을마나 몸이 오싹하는지 몰라"
 젊은 날 신랑한테 접근하지 못하게 말리던 걸 이르집으며 하는 말이었고,
  "새끼두 못 낳은 게 별수 있나. 미워두 늘어붙어 있는 게 상책이지. 어디 가서 밥 벌어먹겠어. 양로원에두 안 간다구 삐댈걸"
 이건 이미 더 이상 큰어머니를 집안에 두고 보기 싫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객한테만 하는 사설이 아니었다. 큰어머니를 면전에 두고 똑 같은 사설을 퍼부어 댈 땐 보는 사람 누구도 정나미가 떨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견디어 오신 한살이였다.

  큰어머니는 종종 십리가 좀 여린 길을 걸어 우리집을 오시곤 했는데 다리를 건너오시는 것이 울타리 사이로 보이면 내가 제일 먼저 뛰어나갔다. 우리 집에 오시면 큰어머니는 아주 유쾌하게 보내셨다. 모진 고생살이를 하고 계신다고는 누구도 상상 못하게시리 아주 곱살하고 생기찬 분이셨다.
 그런데도 막연히 그런 기억만 있지 내게는 그 분의 얼굴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 단지 생각나는 건 눈 내리는 초봄의 그 어느날 다리에 서서 "아부지가 돌아가셨어"하시던 그 모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결국 큰어머니는 양로원으로 가셨다. 양로원으로 떠나시던 날 종수는 시위라도 하듯이 곱게 한복을 차려 입고 마당에 나와 활짝 번 꽃잎을 달고 휘 늘어진 능소화 넌출을 어루만지며 곁눈으로 큰어머니의 뒷모습을 흘끔거렸다.
 유난히도 할머니를 애틋하게 따르던 종질이 큰어머니를 모셨다. 양로원에 할머니를 두고 나오며 두껍다리 난간에 앉아 어깨를 흔들며 흐느껴 울었다.
 커 오면서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살았는지 모른다. 또 어머니가 어째 그리 포악하게 구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모진 수모를 참으면서도 그런 태 보이지 않고 손자들을 여낙낙하게 귀여워해 준 할머니가 가여웠다. 그런 할머니를 말년에 편안히 모시기 위해 그토록 마음을 썼건만 종내 자기 손으로 양로원에 고려장을 시키고 나오는 비통과 슬픔이란.
 아내 보기도 민망했고 더구나 어린 자식에게 나중에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할지도 막막했다.
 그날 저녁에 종수는 며느리를 신칙해 가며 고기를 굽고 전을 붙였다. 침울한 분위기 속에 저녁을 마치고 뿔뿔이 제 방으로 흩어지려 할 때 연거푸 술을 들이켜 눈가가 벌개진 종수가 종질에게 말했다.
  "별소리 안 해 줘서 고맙구나. 이 에미를 실컷 욕해두 할 수 없다만 이제 어쩌겠니"
 이번엔 며느리를 보고,
  "너한테 면목이 없다. 이제 너하구 나하구 맘 맞춰서 한번 살아보자"
 그날 밤 종수는 목놓아 울었다. 가슴의 응어리가 확 풀리도록 목을 놓았는데 그래도 얽히고 설킨 오만가지 심사는 여전히 목울대에 걸려 울음소리만 공허하게 밤 공기를 타고 나갔고 거기 화답하듯 호랑지빠귀가 밤새 목을 놓았다.

  큰어머니는 양로원에 가신 후 꼭 십 년 만에 돌아가셨다. 장례를 보고 온 어머니는 울적한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아랫목에 누워서 한숨만 내쉬었다.
 이제 비로소 파장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인총이 모여들어 물 끓듯이 복대기치던 장바닥이 헤실바실 쓸쓸하고 휘휘하게 사람이 다 빠져 버렸다. 장은 그렇게 파해 버렸다.


    
              
  그 후 큰댁은 육 대를 살아 온 금대올 그 집을 버리고 홍천 읍내로 이사를 나갔다. 게다가 나는 건설회사에 취직이 되어 현장관리자로 한군데 붙어 있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편력하고 다녔기 때문에 자연 큰댁의 소식은 오랫동안 내 관심 밖이었다.
 가끔 휴가차 집에 들러 며칠씩 머물고 있을 때면 어머니가 큰댁 이야기를 하곤 했지만 나는 그저 풍문처럼 흘려 들었다. 아마 종수와 그 맏며느리 - 곧 내게는 종질부가 되는 - 가 사이가 좋지 않은가 보다 하는 그저 남의 일같이만 여겨졌다.
 그러다가 중앙고속도로 춘천과 제천 구간 공사를 우리 회사가 따내면서 나는 이번엔 홍천으로 오게 되었다. 기숙사에는 이미 인부들이 들어차 내가 들어 갈 여유가 없었고, 어머니가 계신 춘천 집에서 출퇴근하기는 거리가 멀어 홍천 읍내에다 하숙을 얻을 생각을 했다. 
 읍내에 있는 큰댁에서 기거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머리를 낸 건 아내였다. 처음엔 머리를 흔들었다. 우선 큰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별로 왕래가 없어 친척이라고는 하지만 어쩐지 섬서했고, 읍내로 이사한 집에는 한번도 가 본적이 없어 내가 거처할 방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또 설사 방이 있어 번죽 좋게 들어가 산다고 해도 공사가 적어도 삼년은 걸릴 것이므로 그것도 당치 않아 이것저것 요량해 보니 뜨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럴 때 읍내 거리에서 종질을 만났다. 근 십 년 만이었다. 항렬은 낮아도 그는 나보다 다섯이나 위였다. 빈방이 있으니 자기집으로 오라고 그는 한사코 우겼다. 그렇게 해서 그 집으로 들어간 거였는데.
 "아이구 아재! 이게 얼마만이우!"
 종수가 반갑게 뛰어나와 내 손을 부여잡았다. 그전에도 종수는 특히 나이어린 사촌 시동생인 내게는 누구보다 친절하고 오사바사하게 대했었다. 내 손을 움켜쥐고는 오랜 회포라도 풀려는 것처럼 말보를 한참 늘였다. 언뜻 그네의 눈가에서 어두운 그늘을 보았다.
 그리고 현관문 앞에서 낯선 여자가 다소곳이 숙여 인사하기에 얼결에 마주인사를 하면서 누군가 했다.
 "애들 엄마예요"
종질의 소개에 나는 놀라 무르춤했다. 아니 그럼 종질부라고? 예전의 종질부가 아닌 다른 여자였다. 그제서야 전에 어머니가 전해주던 큰댁 소식의 어렴풋한 편린들, 종수와 종질부 사이가 좋지 않다던 것을 비로소 깨단했다. 그렇다면 그 종질부는 이혼해 나가고 그 여자가 새로 맞은 종질부였던 것이다.
 세상일이란 가끔은 그렇게 뜬금없는 경우를 맞닥뜨릴 때가 있는 것인지. 정신이 혼란해 잠시 둥개고 있다가 겨우 수습해 종수를 따라 들어갔다. 안에서는 계집아이 두엇이 엎드려 무언가를 하다가 내가 들어가자 조삣조삣 일어나 섰다.
 "우리 애들이에요. 작은 할아버지다, 인사 드려"
 종질이 시키는 대로 아이들이 고개를 까딱했다. 내게는 육촌이 되는 아이들이었다. 물론 그때서 처음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
 내게 배정해 준 방은 이층이었다. 이층도 방이 셋이나 돼 큰 살림집이 들어와도 좋을 만 했는데 그 중의 한 칸을 내가 차지하게 되었다. 봄의 한가운데여서 부드러운 훈풍이 창으로 들어왔다. 창가에 서서 나는 어쩐지 꺼림칙한 느낌을 떨어 버릴 수 없었다.
 언뜻 스치는 기억으로 종질은 아들만 둘 놓은 걸로 들은 것 같았다. 그런데 사내아이들은 없고 아래층의 그 계집애들은?
 그러나 궁금증은 오래 가지 않았다. 종수가 운두 높은 모반에다 코코아를 받쳐들고 올라왔다.
  "무슨년의 팔자가 이렇지유?"
 한 삼십 년이나 어린 나에게 댓바람에 신세타령으로 말을 내는 것이었다.
  "내가 죄가 많아유. 젊은 서방 잡아먹구, 시에미 잡아먹구유, 며느리 쫓아내구, 생때 같은 손주 새끼들 다아 뺏기구……"
 나는 코코아를 목구멍으로 넘기다 말고 잔을 내려 놓았다. 손바닥으로 무릎을 연신 쓸어대면서 종수는 금방 울 듯한 얼굴이었다.
  "지 새끼는 키워 남을 주고 엉뚱하게 남의 씨를 데려다가 저러고 있으니 이게 뭔 개 같은 지랄이유 응?" 분이 뻗쳐 오르는지 금새 목덜미가 불그레해졌다.
  "저 지집년들이 이 집에서 늘어붙어 있는 게 도대체 말이나 되냔 말이우, 이게 누 집인데. 저 지지배들이 집안을 버젓이 돌아댕기는 걸 보면 그만 절구깽이루 확 후들겨 팼으면 하구 하루 열두 번두 더 그런다니까유"
 대충 얼거리가 잡혔다. 그랬었구나. 나는 심상히 종수를 건너다 보았다. 참 기박한 사람이었다. 어찌 저렇게 파란만장할까. 황파 같은 인생은 한 인간을 끝까지 진대붙여 편안한 끝막음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아무 말도 낼 수 없이 나는 창밖, 바람꽃이 부옇게 서린 산줄기를 쫓고 있었다. 그대로 더 있다간 번열증이 날 것 같이 답답한 분위기였다.
 다행히도 때맞추어 종질이 와 주었다.
 "엄닌 그만 내려가요. 난 아재 하고 술 한잔 할거니까"
 밤이 이슥토록 술잔을 기울였다. 나는 건성으로 시늉만 할 뿐 시종 종질만 술을 들이켰다.
 그는 한숨을 안주로 해서 더 들을 필요도 없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어렴풋이 귀동냥으로 듣던 대로 종수와 종질부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수더분하고 말이 없던 종질부는 세월을 따라 변하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말없이 꿍심을 품고 있었는지 모르게 시어머니와의 알력이 깊어져 갔다.
종수와 사소한 충돌이라도 있을라치면 입버릇처럼 양로원의 큰어머니를 바르집으며 벋섰다. 그네는 시집오는 날부터 종수가 큰어머니에게 대하던 행티를 낱낱이 지켜보았다. 자나깨나 종질이 큰어머니와 종수 사이에서 속을 끓이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본 그네였다.
 그네로서는 터무니없이 행포하는 종수가 마땅하지 않았다. 다만 천성이 꿍한 성격이라 속에만 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종수와의 관계가 시뻐지고 점점 더 악화됨에 따라 속심이 거침없이 드러나게 되고, 종내는 종수에 지지 않게 그악스러운 포달을 부리며 맞섰다. 그게 하루 이틀이 아닌 십 몇 해를 쌓고 쌓았으니 엔간히들 잘도 참은 셈이었다.
 종질부는 아예 그 집이 정나미가 떨어졌다. 종수는 그렇다치고 남편까지도 덧정이 없어졌다. 그런 눈치가 확연히 드러나 종질이 그네를 타일러도 보고 을러도 보고 또 아이들까지 들먹여 가며 그네의 마음을 돌리려 했으나 한번 식은 여자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다.
 진즉 갈라설 마음을 먹은 종질부는 부지런히 서울을 오가며 살 자리를 징그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이혼을 요구했다. 종질은 이미 지레채고 있어 그네의 뜻을 좇으려 했으나 종수는 억지공사로 우겨댔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악감만 남을 뿐 쓸데없는 일이었다.
 종수는 부아가 나서 끝까지 틀개를 놓을 뱃심으로 까탈을 부렸으나 다 부질없는 일이었고 그예 종질부는 자취를 감췄다. 두 아들을 데리고였다.
 한동안 종수는 얼이 빠져 헛소리까지 했다. 그러고는 종질을 드잡이하며,
 "어여 에미 데리고 와! 내 새끼들 데리고 오라니까. 가서 그래. 내가 잘못했으니 지발좀 들어오라고 응?"
 그네가 서울 친정집에 있다는 걸 알았을 때도 그러나 종질은 눈만 부릅떴을 뿐 이젠 이쪽에서 싸늘히 정이 식어 버려 찾을 염을 안 했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종수는 날마다 손자들을 찾으며 속절없이 안달복달해 댔다. 분하고 원통하기야 종질에 댈까만, 그래도 종질은 내색하지 않고 종수의 골풀이를 진득히 받아 주었다.

  그러고 지금의 새 종질부가 들어온 것이다. 벌써 한 해가 다 돼 간다는 것이다. 덤받이로 계집애들만 주렁주렁 셋이 딸려 왔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네들에게 정이 있을 리가 없었다. 종수는 종일을 방안에 들앉아 내다보지도 않고 새 종질부가 손댄 음식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부러 새 종질부 들으라고, "에미 연락 없냐? 인제 올 때 됐지야? 오구 싶어두 저것들이 저렇게 진을 치구 앉아 있으니 어디 오겠냐. 야야 전화 한번 해 봐라!" 따위로 왜장쳤다.
 충분히 예상하고 단단히 심지를 가진 터라 새 종질부는 아랑곳없이 집안을 꾸려나갔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어우러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었다.
  "사실 말이지 지금 애들 엄마가 훨씬 나아요"
 눈자위가 벌건 종질이 게슴츠레 나를 건너다보며 말했다.
  "저 사람한테 면목이 없어 늘 죽을 맛이지요. 자신의 처지가 떳떳치 못하다고 밤낮 죽어라고 일만 해요. 전남편한테 제대로 사랑도 못 받았는데…… 근데 여기 와서도 저 모양이니. ……울 엄니도 참 불쌍하지요"
 몇 번 코를 홀짝이더니 찔끔 하고 눈물이 비쳤다.
  "울엄니 불쌍해요. 손자 새끼들 다 뺏기고 남의 기집애들이 눈앞에서 왔다갔다 하는 걸 봐야 하니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알지요, 알아. 근데 내가 어떻게 해야 되지요? 예 아재요?"
 나이보다도 훨씬 노창해 보이는 종질부가 나이 어린 아재에게 어린애처럼 응석부리는 품이 너무 안됐어서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이 고작,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이적지 마음고생 했으니 이젠 좀 펴지지 않겠습니까. 보니까 당질부가 참 수더분하겠든데요"
 내가 들어도 낯간지럽고 멋대가리 없는 말을 주절거렸다.
  "그렇지요? 예, 그래야지요"
 종질은 그렇게 주억거리더니 그대로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아까부터 비릿하게 비냄새가 나더니 번쩍 하고 번개가 일었고 잠시 후 먼데서 우레가 울었다.

 
      

  큰집에서 기거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연 이틀을 푸지게 봄비가 오더니 눈부신 햇살이 정원에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공사가 모레부터 시작하므로 나는 사무실로 첫 출근을 하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계집아이들이 곱송그리고 서 있기에 낌새가 이상해 가만히 살피니 삐끔 열린 문으로 종수와 종질부가 마주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러니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나두 사람인데 싫은 걸 억지루 좋다고 할 수 있겠니"
 방안의 공기는 사뭇 긴장되고 진지했다. 종질은 출근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전 괜찮아요. 이 집 식모로 여기셔도 좋고, 미우시면 욕을 하셔도 좋고 때리셔도 좋아요 어머님. 또 가라고 하시면 가겠어요. 그렇지만, 어머님. ……애들은, 애들은 냉대하지 말아 주세요 네? 사랑해 주시는 건 바라지도 않아요. 그냥 이웃 꼬마들에게 하듯 그렇게만 해 주시면 돼요. 애들이 무슨 죄가 있겠어요. 애비한테 버림받은 애들이에요. 애들이 매일 울어요. 눈치가 이상하면 여기서 쫓겨나는 줄 알고 울음부터 터져요. 어머님! 네? 제발 저 애들 홀대하지 말아주세요, 네?"
 울음 섞인 목소리로 간신히 여기까지 말을 맺고는 종질부가 풀썩 종수 무릎 위로 엎드렸다. 그리고는 어깨를 들먹이며 엉엉 울었다.
 나도 모르게 울대가 꿀럭 움직였다. 더 서 있기가 뭣해 나오려고 발길을 떼려는데 종수의 손이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손이 천천히 종질부의 등으로 올라가더니 살며시 그 등을 쓸었다. 그리고는 토닥토닥 두드렸다. 종질부의 울음소리가 더욱 섧게 높아졌다.
 그 풍경을 뒤로 하고 마당으로 나왔다. 블록 담장에 바투 선 살구나무에 툭툭 꽃망울이 터지고 있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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