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 2391

[도시투어 서울] 쌍문동

전에 낡은 컴퓨터를 쓸 적에 오랫동안 집을 비우게 되면 전원코드를 뽑아 놓곤 했다.그런데 다녀와서 컴퓨터를 다시 켜면 매번 컴퓨터의 시간이 1988년으로 돌아가 있곤 했다. 현재시간으로 수정을 해 주어야 정상으로 시스템이 가동되었다.왜 1988년으로 돌아가 있는 것이며 그런 오류를 일으키는 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1988년에 우리에게 무슨 일들이 있었나. 추억을 회상하면 좋은 추억이건 흑역사든 현재의 우울함을 잠시나마 잊게 되는 치유의 효과가 있다.흘러간 노래, 그때는 내가 어떤 옷을 입었지. 부모님은 아직 돌아가시기 전이라 그 품안에 안겨 많이 든든했었지.화려한 올림픽의 뒤안길에는 유전무죄무전유죄의 지강헌이 홀리데이를 들으며 세상을 하직하고 있었다.미모의 브룩 쉴즈는 지금은 어떻게 늙어 있을까.내..

가을 은비령

은비령(隱秘嶺).은밀하게 세상으로부터 숨어 있는 고개. 원래는 없는 고개였다. 소설 속에 설정된 가공의 무대다.작가 이순원이 은비령으로 설정한 곳은 필례령이다. 소설의 성공으로 사람들은 이제 그 고개를 은비령이라 한다.한계령 바로 밑에 있다. 왠지 겨울이어야 어울릴 것 같은 곳. 은비령.소설에서는 봄인데 폭설이 내렸고 지금은 가을이다.  소설로 인해 지도에도 은비령이 등재됐고 이제는 숨은 고개가 아닌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원래는 필례령이었다.이곳의 필례약수가 유명하였지만 지금은 약수는 폐쇄되었다.대신 가을이면 단풍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언제던가 백설 만건곤하던 겨울날, 비에 흠뻑 젖어 넘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예년 같으면 잎이 이미 다 질 시기지만 올해는 아직도 단풍이 덜 들었다.불타는..

청도 운문사

사찰이라면 으레 비탈진 산길을 올라 닿는 외진 것이다.속세와 더 멀리 떨어져 있길 바라서 깎아지른 절벽 위에 되똑 올라앉은 작은 암자들은 물론이고,때론 수종사처럼 큰 가람도 허위허위 땀 흘리며 올라가야 만나는 것이다. 청도의 운문사는 조금의 경사 없이 평지로 걸어 들어가 부처를 만나는 몇 안되는 절이다.내가 아는 한 아예 속세로 나와 마을 가운데 앉은 실상사와대도시 빌딩 숲속에 비집고 들어앉은 조계사,봉선사 신륵사 등등.그리고 여기 운문사 정도다. 사찰 순례를 하고는 있지만 나는 불자도 아니고 그저 어중이떠중이 관광객일 뿐이다.당우 건물이나 담장을 넘겨다보며 뭐 볼만한 게 있나 하고 눈요깃거리나 찾는 호기심 외엔 별다른 의미는 없다.그런 점에서 운문사는 관광하기 좋은 절이다.  산문에서부터 소나무 숲의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서정시인이다. 정지용 나는, 아니 우리는 학교에서도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그 이름을 들어보질 못했다.서정주 노천명 모윤숙 최남선 박목월 김동환 등 학교에서는 줄창 친일의 오욕을 지닌 사람들만 가르쳤다. 그들이 쓴 시와 소설을 공부하고 대입시험을 치렀다. 정권과 위정자들이 친일 그 자체였으니 여전히 완전한 독립 조국을 가지지 못한 채 우리들은 살고 있는 것이다.  정지용의 사망에 대한 정확한 사안은 아직도 미상이다. 친일 친미정권은 6.25때 북으로 넘어갔다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만으로 정지용을 월북인사로 낙인찍고는 영원히 묻어두려 하였다.   내가 정지용이란 위대한 시인의 이름을 처음 접한 건 이동원이 부른 노래 때문이었으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힌 노릇인..

양평 사나사

여름도 절정을 막 지났으니 더위도 한풀은 꺾이겠지.사나사로 가는 길은 여전히 무덥다.손에 잡힐 듯 가까이 선 용문산이 연무가 끼어 부옇다. 멀어 보인다.이렇게 연무 가득한 날은 영락없이 찜통이다. 이미 윗도리는 후줄근히 젖었다.   사나사는 마을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게 적당한 거리에 앉아 있어서 좋다.휴가철이라 좁은 길의 연도는 주차장 자리를 못 차지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사나사는 봉선사의 말사다.말사 치곤 규모가 제법 크고 당우도 여럿이다.담장 옆으로 등산객과 자전거라이더들이 있어 인해 그닥 고적한 느낌은 없다. 사나사의 주불은 비로자나불이다.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신 사찰의 대웅전은 대적광전이라 한다.사나사( 遮那寺)라는 절 이름도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에서 가져왔다.비로자나불은..

연보랏빛 가을꽃, 봉천사 개미취 피다

절 주위에 꽃을 심은 게 아니라 꽃물결 바다 위에 사찰을 띄운 것 같다.   암자와 사찰을 순례하고 있는데 여기는 사찰이 아닌 개미취를 보러 갔다.연보랏빛 화해(花海). 문경 봉천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절이다.인터넷에 검색을 해도 절 이야기는 없고 온통 개미취 이야기다.네이버 지식백과에는 대한불교 조계종이란 정보는 나오는데 단지 그것뿐이고 여기도 개미취 이야기다.봉천사는 개미취요, 개미취 하면 봉천사가 되었다. 잘 모르는 사찰이니 평소의 참배객은 거의 없을 듯하고 한 해에 한번 이 화려한 꽃의 바다를 보러 오는 사람들의 입장료로 제법 수익을 올릴듯하다. 입장료는 1만 원이다. 개미취는 가을 이맘때면 우리 산내들에서 아주 흔하게 보이는 들국화다.이 흔한 꽃들을 이렇게 한데 모아 군락을 만들어 놓으니 그야..

오근장 메타세쿼이아와 정북동토성

더러 기차를 타고 대전 쪽으로 가는 때가 있는데 오근장을 지날 무렵 멀리 메타세쿼이아가 줄지어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언제 한번 와 보리라 요량하고 있다가 우정 오근장역으로 표를 끊었다.별로 특별할 것 없는 시골 촌동네다. 그래도 청주 시내로 들어가는 방법은 이 곳에서 내리는 게 가장 가깝고 빠르다.예외없이 엄청 더운 날이다.          다른 것들은 볼 것도 없이 곧장 메타세쿼이아 길로 들어섰다.길이 짧긴 해도 과연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뿜어내는 특유의 아우라는 명불허전이다.  길은 어디든 이어져 있다고 하지만 이 길이 끝나는 곳엔 공군부대가 있어 막다른 길이다. 참 멋진 나무들이다.원수 같은 폭염만 아니면 즐거운 풍경인데.     웬 매미가 그리도 많은지 나무 등걸마다 다닥다닥.         ..

어르신

예전에 나는 나이 많은 어른들에 대한 극존칭은 ‘어르신’이라고 생각했었다.가령 길을 물을 때 ‘어르신! 삽다리는 어느 쪽으로 갑니까?’할아버지라고 하면 기분 나쁠 것 같고 아저씨라 하면 건방지다 할 것 같아 내 딴에는 최고의 존칭이 어르신이었는데. 아직 극존칭을 받을 만큼은 안됐지만 이제 이만큼 나이를 먹으면서 다시 돌아보니,어르신이라는 존칭이 그닥 기분이 좋지도 않았고 그 상대 젊은이가 예의 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해 주지만은 않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어느 때 누가 나더러 어르신이라고 부르면 과연 그렇겠다고 절감한다. 이제 딜레마가 생긴다. 나이 많으신 할아버지들에 대한 적당한 호칭이 뭐가 좋을까.적당한 답이 없다.그러네!길을 물을 때 어떤 호칭이 상대 어른에게 가장 좋은 건지 여태 그것 하나 정립되지..

금당실의 여름? 혹은 가을

언젠가는 기후로 인한 대재앙이 올 것이라고 예견들은 해 왔지만서두디드어 폭염 속의 추석을 맞는 시대가 왔다.  경북 예천 금당실 마을의 추석 밑 풍경들.    사람만 덥지 자연은 제 루틴대로 도래해산내들과 시골마을은 가을 풍경이 완연하다. 어느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기 마루에 어머니가 누워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그 팔베개를 누워 여름의 단잠을 자던 시절이 있었다.툇마루에는 갓 따온 봉숭아 꽃잎을 찧어 손가락에 처매는 누이들의 정경도 눈앞에 암암하다.                      김상희 : 팔베개

화양구곡에 내리는 비

괴산 화양구곡입니다.몇 년 전 한번 가보긴 했지만 나뭇가지에 눈도 틔지 않은 3월이라 계곡은 메마르고 쌀쌀했었습니다.여기 여름 숲은 어떨까 궁금해하면서도 가까운 곳이라는 안일함으로 이후 한번도 가보지 않았어요. 더 먼 곳 충주로 옮기고 나서야 비로소 찾아봅니다.여름 끝자락이라지만 숲의 초록은 한참 더 지나야 퇴색합니다. 곧 비 뿌릴 것 같이 하늘이 낮게 내려앉아 있습니다.뽀얀 이내가 서리고 습기 가득해 역시나 무더운 날입니다.소나기 한바탕 내렸으면 좋겠는 습윤한 숲입니다.   명산은 명산이라 속리산에서 내려온 계곡의 수려함이 명불허전입니다.겨울의 적막도 말할 것 없고 여름의 무성함도 역시 좋습니다.혼자 걷는 길도 고적하지 않고 풍성합니다. 평일인데다 날도 궂은데 구곡으로 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