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도 절정을 막 지났으니 더위도 한풀은 꺾이겠지.
사나사로 가는 길은 여전히 무덥다.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선 용문산이 연무가 끼어 부옇다. 멀어 보인다.
이렇게 연무 가득한 날은 영락없이 찜통이다. 이미 윗도리는 후줄근히 젖었다.
사나사는 마을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게 적당한 거리에 앉아 있어서 좋다.
휴가철이라 좁은 길의 연도는 주차장 자리를 못 차지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사나사는 봉선사의 말사다.
말사 치곤 규모가 제법 크고 당우도 여럿이다.
담장 옆으로 등산객과 자전거라이더들이 있어 인해 그닥 고적한 느낌은 없다.
사나사의 주불은 비로자나불이다.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신 사찰의 대웅전은 대적광전이라 한다.
사나사( 遮那寺)라는 절 이름도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에서 가져왔다.
비로자나불은 일종의 절대자이다. 기독교의 하나님 여호와가 창조주이자 세상을 주재하는 전지전능 절대자이듯 신이 없다는 불교에서도 비로자나불은 그런 상징적인 존재이다.
절보다는 여름 바캉스의 명소로 알려진 계곡이다. 이 계곡 때문에 사나사 이름이 널리 알려졌을지도 모르겠다.
명성대로 계곡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예전 유모어 '식인종의 물에 만 밥'이 생각났다.
이젠 저 풍경도 얼마 남지 않았다.
찬바람 나면 좀 고적한 길이 될까.
길에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있다.
집이 있고 물이 있다. 산과 숲이 있고 사람 짐승 일용할 양식과, 햇빛과 그늘.
고뇌와 우수, 희로애락.
명상과 철학이 있고 그로부터 문학 미술 음악이 생겨났다.
우리가 향유하는 예술은 그러고 보면 길 위에서 왔다는 것에 절대 공감한다.
사나사 일주문을 나서 마을을 지나며 보이는 풍경들에서 그런 것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전엔 무심했던 상념이었다.
언젠가부터 생각이 많아졌다. 나이 든다는 증거인지.
철이 들고 있는 거면 다행이지만.
여전히 폭염의 날들이지만 시골집들의 남새밭이나 담장 밑은 가을의 느낌이 물씬하다.
가을 되면 여기저기 갈 곳을 많이 정해 뒀는데 계절이 너무 짧아 날이 모자라니 아마 태반은 내년으로 미룰 게 뻔하다.
로드리고 :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
'서늘한 숲 > 햇빛 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보랏빛 가을꽃, 봉천사 개미취 피다 (1) | 2024.10.06 |
---|---|
오근장 메타세쿼이아와 정북동토성 (0) | 2024.10.06 |
어르신 (1) | 2024.09.26 |
금당실의 여름? 혹은 가을 (0) | 2024.09.13 |
[골목투어 삼척] 정라진 나릿골 (0) | 2024.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