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한국의 아름다운 길

호반의 가을, 청남대

설리숲 2020. 6. 1. 23:24

가을은 그냥 침잠한다.

햇살이 눈부신 날에도

갈색 나뭇잎에 가슴은 내려앉고 마는 것이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사람에겐 아주 좋은 계절이다. 아무 데나 갖다대고 눌러도 그림이 된다.

 

청남대 호수에 가을빛이 절정으로 무르익었다.

대통령의 휴양지라는 선입견만 빼면 최고의 가을호수 풍광이다.

이런 곳에서 휴가를 보낼 수 있는 대통령이란 지위가 지고한 존재임을 딱 한번 절감해 본다.

 

사전 예약으로만 입장이 된다.

전날 열심히 두드려서 예약을 하고 결제도 완료된 것으로 믿고 갔는데 청남대 정문에서

예약이 안 됐다고 한다. 내가 어설프게 잘 못했나 보다.

그래도 박정하지 못한 게 사람 사는 사회라 미적거리며 되돌아 나오려고 하는데 이왕 오셨으니 지금 매표하시고 들어가시라 한다. 그렇지 원리원칙만이 미덕은 아니니 이런 배려가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다.

작년 가을이었다.

 

 

 

 

 

얼마 전 이 청남대에서 전두환과 노태우의 동상을 철거한다는 뉴스가 있었다. 더불어 전두환길 노태우길이란 이름의 산책로도 그 이름을 삭제한다고 한다. 현재 박근혜에 관한 전시물도 없는 걸로 봐서 정치이념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실감한다. 만약 이후로 보수주의 세력들이 정권을 잡는다면 앞서 세 사람의 지위가 다시 복권되고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이 삭제될지도 모르겠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서 다시 쓰이는 법이니까.

나와는 먼 세상의 일이지만 잠깐 권력의 무상과 폭력을 생각한다.

 

어쨌든 가을은 이처럼 아름답고 호수는 푸르니 그저 그 감상에 취해 가을을 만끽하면 그만이이지. 나 따위가 대통령을 걱정할 깜냥이나 될까 보냐.

 

 

 

가을이 가득 찬 이곳에서 딱 한 달만 살아봤으면. 낙엽 다 지고 황량해진 오솔길을 걷다가 첫눈을 맞으며 이 호수를 떠나는 영화 같은 꿈.

 

 

 

 

 

          패티김 : 호반에서 만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