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1학년 때.
겨울방학이 끝나고 방학숙제 검사가 있었다.
숙제 중에 아마 동시짓기도 있었나보다. 선생님이 한 아이의 동시를 낭독해 주셨다. 그 여자아이의 이름은 누구라도 기억할 수 있다. 당시 대통령과 이름이 같았기 때문이다.
엄마랑 엄마랑 같이 갈래요
숲길을 지나면 호수가 보이고
어여쁜 새들이 노래 불러요
언제나 그리는 낙원을 찾아
엄마랑 엄마랑 같이 갈래요
엄마랑 엄마랑 같이 갈래요
낮에는 숲길에 꽃들이 반기고
밤에는 호수에 별이 빛나요
마음에 그리는 낙원을 찾아
엄마랑 엄마랑 같이 갈래요
어느 누가 보아도 참 빼어난 동시였다. 그러기에 단박에 선생님의 눈에 들었겠지.
어쩌면 국민학교 1학년짜리의 작품이라 어쩌면 너무 수작이다. 선생님은 그걸 간파하시지 못했나 보다.
하지만 난 저 동시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선생님이 동시를 낭독해 내려가는 동안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건 당시의 대통령과 이름이 같았던 그 아이의 작품이 아니라 하춘화의 노래 가사였던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우리 집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떡하니 전축이 들어와 있었다. 새파란 청년이던 큰형이 열심히 레코드판을 사들였다. 조미미 나훈아 김상희 최희준 김상진 하춘화 등등.
저 위의 노랫말은 하춘화 음반 중 뒷면 마지막 노래다. 그 앨범에 다른 어떤 히트곡이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저 노래만 길래 기억되고 있는데, 아마 별 유명한 노래는 없는 앨범이었을 게다. 동시를 제출한 그 여자아이도 설마 저 노랫말을 누가 알랴 싶어 당당하게 써냈을 거다.
이후로 어른이 돼서 남의 것을 제 것인 양 후무려서는 명예와 이권을 누리는 소위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의 후안무치를 접할 때면 꼭 그 아이가 생각나곤 한다.
그 아이야 남을 속여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불순한 의도 없는 순수한 꼬마였으니 다시 보면 귀엽게 봐줄 수도 있다.
그런데 뻔뻔한 어른들의 추태는 참담하고 삶의 회의를 느낀다.
예전에 조용필의 노래 <바람이 전하는 말>을 엄청 좋아했었다. 멜로디도 멜로디려니와 그 가사가 참말 감성이 한창 예민했던 내게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데 나중에 마종기 시인의 시를 우연히 보고는 진짜로 충격을 먹었다.
그 아름다운 가사가 마종기의 <바람의 말>과 같은 게 아닌가. 부분 부분 글자 몇 개 다르게 표현하긴 했지만 표절 내지 도용한 게 역력해 보였다. 작사가인 양인자의 해명의 말이 있긴 했지만 구차한 변명 이상으로는 아니 느껴지는 것이다.
당시 대통령과 이름이 같았던 그 여자아이도 문득 떠오르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동시의 비밀을 알고 혼자 얼굴을 붉히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그 날의 일이 바로 조금 전인 듯 생생하다.
바람의 말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마종기 -
백영호 작사 작곡 하춘화 노래 : 엄마랑 같이 갈래요
'서늘한 숲 > 음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끄러움 (0) | 2018.09.17 |
---|---|
음악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0) | 2018.09.07 |
설렘, 겨울에서 봄으로 (0) | 2018.03.01 |
열아홉이예요 (0) | 2018.02.18 |
아티스타 콘서트 (0) | 2018.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