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친구가 하나 있는데 이 친구는 필기구에 몹시 집착한다.
김유정의 소설 <떡>에 나오는 계집아이 같다. 잔칫집에서 떡에 집착해 꾸역대고 떡을 먹다가 결국은 떡으로 죽고 마는(아니다 죽진 않는다) 그 아이를 생각하게 한다.
편리하고 빠른 디지털이 일상화한 요즘에 이 친구는 굳이 구식 종이편지를 고집한다. 후덕한 몸을 엎디어 편지를 쓰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자꾸 기분이 좋아진다.
영광스럽게도 이 산골짝에도 그의 정성어린 이쁜 편지가 무시로 올라오곤 한다. 한 자 한 자, 어느 때는 그림까지 그린, 고운 정성이 가득한 그의 편지를 받으면 자꾸만 가슴이 설레고 그 즐거움은 아주 오래 간다.
그러니 필기구에 집착하는 그의 마음을 감히 건드릴 수 있을까.
이 친구가 황금횃대다.
같은 또래인데도 그는 내게 큰누이 같다. 같은 동안의 세월을 살아왔건만 내게는 늘 부족한 삶의 지혜를 그는 풍부하게 갖추고 있다.
백수로 혼자 사는 것도 내겐 그리 만만하지 않건만 그는 시부모와 대가족을 시솔하면서도 결코 무겁거나 힘겨워하지 않는다.
그라고 해서 힘들거나 속상한 일이 왜 없겠는가. 날마다 부딪고 깨지는 게 사람 사는 세상인데.
그렇지만 혼자 삭일 줄 알고, 다른 이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그러니 본인은 얼마나 속상할까.
그럼에도 늘 툭툭 털어 내고 평온을 잡아내는 깊은 지혜.
그러면서도 문학소녀의 감수성을 곱다랗게 간직한 여자.
내가 늘 존경하고 배우고 싶은 그의 인간미다.
오늘도 그의 편지를 받았다.
그의 편지에는 예외없이 필기구 이야기가 등장한다.
오늘도 지인으로부터 'Rotring Pen' 세트를 선물 받았다는 거와 그 펜으로 정선행님한테 편지 써 보낸다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숲에 소담스럽게 눈이 내리고 있다. 그의 편지를 들고 나가 눈을 맞히면 그 고운 정성이 어룽어룽 번져 나올 것 같다.
그의 막내 제씨(弟氏) 말마따나, 환갑이 넘어도 저렇게 엎디어 편지를 쓰고 있을 아름다운 고집에 나는 찬탄을 보낸다.
친구,
그 집착을 놓지 마시라.
난 당신의 그 고집과 집착이 참 좋아라.
정선행님.
2004. 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