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벽서(壁書)

설리숲 2005. 7. 17. 22:44

 

 

 

   황금횃대 왔단다

  청산에 별곡 묻히리!

 
토루군 왔음 아싸! 좋구나

  아름다운 두이노의 문원
  정말 숲속의 숲이 되고 싶다.
                         -두이노의 숲


  이곳에서 내가 피어나리라
                                 -한상훈

  우리 참 멋있게 살자
  아름답게 그렇게

  誠於中形於外
  뭐를 열심히 하는 가운데 밖으로 이루어지리라


 


 이와 같은 방명록들이 적혀 있다.
 소위 '두이노 문원'의 벽에서 옛 글자들을 읽는다.

 작년 3월 20일 아우라지 강가에서 정기모임을 가졌었다. 아직도 늦추위가 뼛속을 파고드는 이른 봄.
 그땐 참으로 생기발랄했었지. 꼴같잖은 무슨 문원을 만든다고 게바라란 놈이 한겨울부터 설레발을 쳐대는 통에 천장 수리하고 굴뚝 박고 아궁이 만들고 벽지 사다가 도배하고 나니 그래도 제법 꼴이 잡혀 그럴싸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땐 참 생기발랄했었다. 정기모임이랍시고 먼데서 이 깊은 산골로 꾸역꾸역 모여들어 이 문원이라는 걸 탐방했었다. 다들 가슴 안엔 작은 빛들을 간직했었으리라. 여기 와서 숲의 정기도 마시고 몇 줄 글도 쓰리라. 아님 그냥 와서 놀다가 가도 좋으리.
 위의 벽서들을 보면 그 마음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겨우 한 해가 지났다.
 아무도 들여다 보지 않는 저 방은 굴왕신같이, 그야말로 흉가가 되어 있다. 꼴같지 않게 설쳐대던 게바라란 놈은 언제 그랬냐 저곳 생각 한자락 없는 채 어디 가서 또다시 설쳐대고 있을 테지.
저렇듯 포근한 마음들을 토해내던 그이들도 역시 겨우 한 해 전의 편린 조각들을 다 버렸을 거다 아주 많은 날들을 흘려 보낸 듯이 말이다.

 횃대님의 거미줄 그림을 보니 문득 저 방이 생각났지. 나 역시 아주 오랜 전의 일처럼 기억이 아득하다. 겨우 한 해 전인데 말이다.

 수첩을 들고 저 방에 들어가 그날 해사한 빛들을 마음에 담고 그려 내던 저 글발들을 채록해 오다.
 아주 짤막한, 그날 그 순간 가장 쓰고 싶었던 단어들이니 세상 어느 것보다도 고귀하고 수준 높은 문학작품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저 진귀한 글발들이 다래다래 거미줄 아래 저리 삭아 가고 있는 거다.
 찌들어 가는 흉가와 함께 스러질 저 지순하고 발랄한 빛들이 사라져 가는 게 안타까워 여기다가 저장해 두려 한다.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들의 비참함이여-

 무관심 남편보다는 그래도 의처증 남편이 나을까.


 그땐 참 생기발랄했었다.

     

        

     2005.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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