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아날로그 소녀 지선이

설리숲 2005. 8. 29. 22:31

 

 그저 귀엽고 착하게만 생긴 외모다.
 피자를 좋아할 것 같은, 디카를 좋아할 것 같은, 꽃미남을 좋아할 것 같은……
 젤리슈즈를 좋아하고 압구정을 돌아 예쁜 액세서리를 사들이며, 또래의 친구들과 만나 영화를 보고 수다를 떨며, 가끔은 주말에 외박도 할 것 같은 그런 평범한 아가씨다.

 이번 여름장기도보에 마지막으로 합류했다. 신청했다 지우고 또 신청했다가는 취소하고, 기어코 일터를 사직하고 달려왔다. 내겐 그저 어린 소녀로만 보이는 그는 그러나 가슴 속에 많은 세상을 담고 있다.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무거운 생각들을 지고 있어 한편으론 애처로워 보이기도 하다.
 옷은 그저 헐렁한 남방에 헐렁한 모직바지, 신발은 운동화, 머리엔 색바랜 핑크빛 모자, 그게 그의 옷차림의 전부다. 여드름이 드문한 얼굴에 화장도 안한다. 그의 어머니 말씀이 아니라도 요즘 세상에 착하기만 한 보기 드문 별종이다.
 그 흔하디 흔한 휴대폰도 없다. 그가 전화하지 않으면 나는 그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가 없다. 여름도보에 참가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올 때도 내내 공중전화로 나와 통신했다.
 여행이 끝나고 그는 부산 쪽으로 갔다. 이왕 내려온 김에 며칠 놀다 가겠다고.
 한밤중에 전화가 온다. 그의 어머니다.
 "여행은 진즉에 끝난 걸로 아는데 얘가 아직 안와서 걱정이 돼서……"
 휴대폰이 없다는 건 무엇보다도 부모님이 불편하고 애가 탄다. 짜식 전화라도 한번 드릴 일이지.
 "걱정 마세요 어머니. 워낙 듬직하고 앞가림을 잘하잖아요. 회사에 사표도 냈다 하니 좀 돌아댕기고 싶겠죠"
 마치 내가 그의 담임선생이라도 되는 양 어머니를 안심시키다.

 며칠 후에는 내가 궁금해 어머니께 전화를 하니 며칠 더 놀다 주말께나 오겠다더라고.
 그러고 보니 내 휴대폰에도 미지의 번호가 몇 찍혀 있다. 경상도 지역번호다. 포항으로 간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가 공중전화로 전화를 건 게 틀림없다. 그러면 됐지 뭐. 그래도 답답하긴 하다. 자식 휴대폰 하나 장만하지. 저만 편하면 그만인가 주위 사람들 답답한 건 내 몰라라 하고……

 한편 나 부끄럽기도 하다. 아날로그적 삶을 살겠다고 산속으로 들어와 놓고는 컴퓨터다, TV다, 전화에, 자동차까지 버리지 못하고 이러고 살더니 결국은 없던 휴대폰까지 떡하니 걸고는 말이 좋아 산사나이지 결국은 문명의 언저리에서 어정대고 섰는 꼴이라니.

 얼마나 더 가야 내 안의 찌꺼기를 다 씻어낼 수 있을까.
 얼마나 더 깊은 골짜기로 걸어 들어가야 내가 찾는 순수를 볼 수 있을까.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여자에게서도 나는 또한번 가르침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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