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숲/햇빛 속으로

과천 관악산 연주암

설리숲 2025. 12. 25. 14:37

두 볼이 알싸한 아침이었다.

두어 번 무너미고개를 넘어 안양으로 내려간 적은 있었지만 산행은 한번도 안해본 관악산을 올랐다.

꼭대기 연주대를 넘어 과천으로 하산할 요량이었다.

앞으로 등산도 더러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차례 강력한 한파가 다녀갔는데 서울대 옆 등산로에는 아직 붉은 단풍기가 남아 있었다.

그 외에는 모든 게 깊은 겨울풍경이다. 낙엽, 얼어붙은 계곡물, 수시로 마주쳐 지나가는 등산객들의 입에서 나오는 허연 입김들.

악산이라니 미리 각오를 하고 올랐으니 힘들다는 생각은 안들었지만 얼마 걷다 보니 두툼하게 입은 몸에 땀이 흥건하게 흐른다. 과연 악산인가.

가을이면 아름다웠을 계곡은 삭막하고 황량하게 깊어져 가고 있었다. 골골샅샅 비어 있는 풍경이 겨울만이 주는 매력이기도 하겠다.

 

 

 

어느 때 갑자기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어. 쳐다보니 세상에나! 조카다. 큰누나 아들이다.

낯선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일생에서 그리 흔하지 않은 일인데 관악산에서의 조우라니.

공무원이 그 시간에 관악산 산행을 왔으니 궁금했지만 웬일이냐고 묻진 않았다. 그도 나도 다 그만한 생활이 있으니.

얼마 전에 겪은 그의 아픔을 상기하고 있어 더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잠시 수어하고 돌아서 헤어졌다.

 

 

! 저기 개멋있겠다.

아가씨 둘이 씨억씨억 암벽을 오른다.

길도 아니고, 계단도 없고, 로프도 없는 험한 바위 틈이다.

나는 안되겠다.

젊음이 좋다. 아름답다.

 

 

 

 

그리고 연주대에 올랐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연주대고 그 벼랑 위에 되똑하니 올라앉은 건 연주암 응진전이다.

 

깎아지른 절벽 위 사찰을 볼 때마다 왜 편한데 짓지 않고 굳이 저런데 힘들게 올라가서 지었는지 악의 없는 불만이 생기곤 한다. 짓는 사람들도 힘들고 부처를 찾는 중생들도 얼마나 힘든 일인지.

 

 

 

 

 


연주대  벼랑 위 응진전에 올랐다
.

멀리서 볼 때 붉게 덮은 것이 와보니 연등이다. 종교적인 의미와 개념을 무시하면 참말 아름다운 풍물이다.

연등을 걸어 사방으로 막지 않았다면 천야만야 발아래 풍경이 오금이 저리게 아찔했을 것 같다.

 

 

 

 

응진전에서 한참을 내려와 연주암 본채.

용주사의 말사라는 연주암은 암자인데도 웬만한 사찰보다도 규모가 크다. 템플스테이도 운영한다고 한다.

마당에 겨울산의 찬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요사채 툇마루가 회랑처럼 길다.

신도들이나 지나가는 등산객들이 눈치 보지 않고 편히 쉬게 개방해 놓았다.

겨울 햇살 들어오는 마루에 한참을 앉아 여유를 즐긴다.

스님도 함께 어울려 애기보살 등산객들과 잡담들을 나눈다.

 

그중 문득 귀에 들어오는 말이 있었다.

부모에게 야단을 맞지 않고 큰 사람은 훌륭한 인물이 되지 않아요.”

나는 한번도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은 적이 없다. 그래서 큰 인물이 되지 못한 것 같다.

나뿐 아니고 우리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생전에 어머니는 자식들이 워낙 착해 욕 한번 안하고 매 한번 안 들었다는 걸 스스로 대견하게 여겨 아는 사람들에게도 자랑처럼 말하곤 했었다.

또한 우리 형제자매 간에도 얼굴 한번 붉힐 일이 없을 정도로 띠앗이 구순했다는 것도 역시 대견스러워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모범생으로 살아온 날들이 그리 즐거웠던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불현듯 어머니가 그리웠다.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무렵에 늘상 있는 일이다.

아까 만났던 외조카는 몇 해 전 병으로 아내를 먼저 보냈다. 작년에 나는 또다른 조카를 먼저 보내고 한동안 공허하고 음울하게 보낸 적이 있었다.

한 가지에서 나서 언젠가는 따로 흩어져 헤어지는 게 우주의 순리이지만 이별은 늘 아프고 슬프다.

더구나 나이 어린 젊은 살붙이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이야.

 

형제자매들이 다들 연로해 있다. 내게는 점점 더 빈자리가 넓어질 것이다.

수북이 쌓였던 낙엽도 다 사라져 공허한 벤치를 보니 깔축없이 겨울임을 절감하며 자꾸만 마음이 공허하고 쓸쓸해졌다.

 

 

 

 

내려오는 길은 더 이상 구경할 것도 없이 힁허케 내리 달렸다.

이튿날 아침엔 제법 다리가 뻐근했다.

 

 

 

 

 

  찬바람이 몹시 불던 대문이

 

  접혀 있다

 

  아직도

  다음 페이지로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것은

 

  당신의 흔적과 마주하기가 두려워서가 아니다

 

  먼 길 흔들리며 돌아올 때

  어깨를 쓰다듬어주던 억새의 부드러움이

 

  가슴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내 푸른 시간이 굵은 주름으로 접혀

  기대고 있는

 

  옹이 하나 덩그런 집 한 채

 

         김정학 <페이지>

 

 

 

 

 

 

 

 

 영화 <흑인 올패> 중 Manha De Carna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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